• 대우+김&장과 맞서 승리한 '범생이'
        2007년 05월 17일 07: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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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대 중반이나 됐을까 싶은 동안이었다. 악의 한 점 없어 보이는 순박한 표정까지 한마디로 그의 얼굴에 ‘범생이’라고 씌여 있었다. 그는 노동운동가들에게 흔히 보이는 거친 표현들도 쓸 줄 몰랐다. 담배도 소주도 없이 부당한 해고에 맞서 10년을 싸운 사내. 대법원에서 두 번씩이나 회사를 꺾은 사람. 그를 16일 금속노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금속노조 대우자동차판매지회 김경수씨(43)의 직책은 조합원이다. 노동조합 간부 한 번 해본 적 없는 그야말로 ‘평조합원’이다. 그런 그가 회사와 맞서 10년을 싸웠고, 지난 5월 10일 대법원으로부터 “5년 동안 부당해고 시켰으니 15년치 월급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끌어냈다.

       
     
     

    “기쁘기도 했지만 마음이 찡하기도 했어요. 대우라는 거대한 그룹을 상대로 만 9년 넘게 끌어온 거예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어떻게 될지 몰랐죠. 회사가 대법관 출신, 김&장 출신의 능력있는 변호사들을 동원해 마지막까지 안심할 수 없었어요. 저는 시골 출신인데, 소 등에 씌워져있던 굴레를 벗었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굴레를 벗은 심정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던 날, 다섯 식구는 조그만 잔치를 벌였다. 그의 아내는 모처럼 쇠고기 반찬을 만들었고, 포도주도 상에 올라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빠가 해고돼 가족의 고통을 어렸을 적부터 함께 나눴던 고등학교 1학년 큰 딸 미선이는 “우리 아빠가 이겼다”며 좋아했다. 장애가 있는 둘째딸과 막내까지 온 가족이 건배를 했다.

    무엇보다 가장 기쁜 건 9년의 세월을 함께 견뎌준 그의 아내다. 아내는 남편의 승리를 예견했는지, 대법원 판결 전날 찹쌀떡을 해서 그에게 내밀었다. “애들 대학 가고 그럴 때 찹쌀떡 먹잖아요. 당신 승리를 기원하는 떡이에요.” 

    만 5년을 부당해고돼 못 받은 월급에 그 기간 동안의 평균임금까지 회사가 그에게 15년치의 월급을 주게 된 대법원 판결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돈을 받았다. 지난 2005년 10월 12일 회사는 고등법원에서 패배하자 20%의 가산이자를 지급하지 않기 위해 돈을 그의 통장에 넣었고, 대법원에 상고했다.

    공부도 1등 판매도 1등이던 모범사원

    1986년 12월 10일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그는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82년에 한양대 무역학과를 입학한 그는 6개월 방위생활을 마치고, 당시 ‘르망’으로 잘 나가던 대우자동차를 선택했다. 경쟁률이 10대 1이었다. 소극적인 성격을 바꾸겠다며 시작한 자동차 영업사원이었는데 그는 사당영업소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는 전체적으로도 손꼽히게 실적을 올려 상장을 많이 받았고, 회사는 부상으로 그에게 도쿄 모터쇼를 두 번이나 보내줬다. 90년대 중반에 연봉 4천만원, 그는 중산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1989년 대우자동차노동조합 판매지부가 만들어졌고, 그는 처음 대의원을 했지만 이후 단 한번도 노조간부를 맡지 않았다. 정말 열심히 판매만 했다. “자동차 영업이 마이너스 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좋은 고객 분들을 많이 만났고, 정직하게 영업했어요. 진짜 중산층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죠.”

    대우자동차의 인기가 시들어가고, 대우자동차에서 판매부문이 분사되고, 차가 안팔리는 시절이 왔지만 그는 열심히 일했다. 그 때는 시쳇말로 지나가던 개가 ‘차’라고 소리를 질러도 가서 차를 팔던 시절이었다. 계약금 10만원만 들어오면 무조건 차를 주던 시절, 그래서 많은 동료들이 부실채권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그만둔 직원들도 많았다.

    딱 한 건의 부실채권

    그에게는 딱 한 건의 부실채권이 있었다. 예전에도 차를 구입해줬던 여든이 넘은 한 어르신이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지면서 할부금을 1년 넘게 내지 못했다. 그는 차를 압류해 놓았는데 그분에게 할부금을 갚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어르신에게 돈을 조금씩 넣을 경우 연체이자도 갚지 못하니까 그의 개인통장에 돈을 넣고, 목돈이 되면 한 번에 차 값을 갚도록 하자고 얘기하고, 회사에도 이를 보고했다. 매달 돈이 들어올 때마다 관리과장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이게 ‘그날 밤의 끔찍한 사건’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998년 3월 어느날이었다. 노사관계가 험악했던 시절, 회사는 영업소마다 노동조합 탈퇴 작업을 대대적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회사는 노조위원장을 탄생시킨 사당영업소를 타겟으로 삼았다. 후배를 통해 이 사실을 안게 된 그는 관리자들에게 “영업소 전체 회의에서 모두가 노조탈퇴를 원하면 전체가 탈퇴하고, 그렇지 않으면 회유나 협박을 하지 말라”고 제안했다.

    조합원들은 토론을 통해 탈퇴를 안 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앞장섰던 동료 직원도 사과했다. 이를 지켜보았던 관리자는 그 날 밤 울산으로 내려가 차 값을 연체했던 고객에게 확인서를 받아왔다. 회사는 공금횡령으로 그를 인사위원회에 넘겼고, 형사고발까지 했다. 80이 넘은 고객이 두 번씩이나 서울까지 올라와 그가 잘못이 없다고 했지만 회사는 그를 해고했다.

    노동조합 신분보장도 받지 못하고

    기가 막혔고 앞이 캄캄했다. 동료들도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외톨이였다. 노동조합에서 신분보장도 받지 못했다. 젊음을 다 바쳤고,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너무나 억울했다.

    “해고되고 2년 동안 바깥 출입을 못할 정도였어요. 너무 고통스런 일이라서 아무 것도 못하고 집안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해고기간에 장애를 가진 둘째 딸이 너무 아파 정말 가슴에 한이 맺혔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증거자료를 하나씩 수집했고, 검찰조사에서 무혐의 판정을 끌어냈다. 그러나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노동행위와 부당해고가 인정되지 않았다. 

    싸움은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2000년 8월 1심에서 부당노동행위로 인한 부당해고라는 판정을 끌어냈다. 그러나 회사는 끝까지 그를 횡령범으로 몰아갔다. 그는 치밀하게 자료를 준비했고, 그의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은 그를 지원했다.

       
     
    ▲ 2004년 가을 그는 가족들과 복직 기념으로 설악산에 올랐다.
     

    5년간의 해고 생활

    결국 그는 고등법원을 거쳐 2003년 6월 13일 해고된 지 만 5년만에 대법원으로부터 부당해고라는 판결을 받았다. 회사와의 1차전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그가 일하던 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그를 발령냈다.

    그는 청와대에 진정을 내면서 다시 싸움을 시작했고, 노동부가 대표이사를 고발하자, 회사는 1년이 지난 2004년 지난 7월 5일 그를 사당영업소로 발령냈다. 만 6년만에 원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5년의 해고기간, 어떻게 생활을 해나갔을까? “차를 잘 팔았기 때문에 고객들에게 계속 연락이 왔어요. 그동안 어려운 후배들한테 차를 주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이 때 제 고객을 후배들에게 넘겨줬어요. 사람들이 딜러로 가서 영업해보라고 했는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죠. 결국 생명보험회사에서 보험영업을 했습니다.”

    그는 2000년 9월부터 생명보험 영업을 했다. 오히려 대우자동차에 있을 때보다 월급을 더 받기도 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소득이 많다 하더라도 특수고용직이라 일부는 고객을 위해서 투자해야 하고, 아무리 영업을 잘 하더라도 몇 달 실적이 안 좋으면 잘리게 돼요. 정말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았죠.”

    2차 대전이 시작되다

    1차전이 끝나갈 무렵 그는 회사를 상대로 2차전을 준비했다. 회사와 노조의 단체협약 제 54조에는 “부당징계 또는 부당노동행위 판명시 즉시 원직으로 복귀시키며 임금 미지급분에 대해서는 출근시 당연히 받았을 임금은 물론 평균 임금의 200%를 추가가산 보상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는 2002년 12월 이 소송을 시작했다. 

    회사는 이를 2개월치 평균임금만 추가로 주면 된다고 주장했다. 민사소송이었기 때문에 지방법원부터 고등법원까지 판사들도 끈질기게 화해를 시도했다. “재판 과정에서 판사님들이 많이 얘기를 했어요. 저에게는 협박으로까지 느껴졌으니까요. 심지어 한 판사님은 자기가 검토해보니까 두 달치 더 받는 게 맞다면서 제게 합의를 종용했죠.”

    그가 합의를 거부하자 금액은 조금씩 올라갔다. 1심 마지막 조정회의였다. 조정실에서 담당판사가 2억 4천만원을 받고 회사를 그만두면 어떠냐고 제시했다. “갈등은 됐지만 사람이 명예가 중요한데, 그걸 인정하면 잘못을 인정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판사님 죄송합니다. 그랬어요. 근데 변호사님도 아쉬워 하더라구요.”

    “판사님 죄송합니다”

    2004년 5월 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위 평균임금의 200%는 피고의 원직복직의무의 해태에 대한 징벌적 의미의 배상을 의미한다”며 “순수한 손해배상예정과는 달리 감액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회사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대법관과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와 ‘김&장’ 소속 변호사 등 6명을 영입하며 사활을 걸고 이 재판에 나섰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2005년 10월 12일 재판에서 그의 승리를 재확인했을 뿐 아니라 원직복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발령낸 것에 대해 무효라고 판결했다.

       
     
     

    그리고 지난 5월 10일 2차전 결승전에서 마침내 그는 ‘위대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햇수로 10년, 만 9년 만에 그는 떳떳한 노동자, 자랑스런 남편과 아버지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판결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대우자동차노조 9명의 노동자 등 많은 노동자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해고될 때만 해도 민주노총이고, 뭐고 몰랐어요. 차만 팔던 사람이 노동이 뭐고, 자본이 뭐고 개념이 없었죠. 차 파는데 모든 걸 집중했어요. 노동조합이 파업하면 속으로 파업 안하면 안되나, 차 좀 팔아야 하는데 그런 생각까지 하기도 했거든요.”

    노동조합 깨는데 눈이 먼 어리석은 회사가 ‘범생이’ 노동자를 ‘전사’로 만든 것이었다. “회사가 그렇게 나오면 제가 노조 탈퇴하겠다고 할 줄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 모함을 당해 해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니까 그 배신감에 꼼짝달싹 못하겠다라구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어요.”

    길거리를 떠도는 220명의 판매노동자들

    그는 지금 사당영업소로 출근하지 않고, 40여명의 동료들과 발산역에 있는 사무실에 나가고 있다. 이날도 “오늘 특별히 전달사항 없다”는 팀장의 말을 듣고 사무실을 나왔다. 회사는 직영점을 없애고 모두 딜러로 만들기 위해 회사를 분할했다가, 부당하다는 법원판결이 나자 조합원 220명에 대해 전원 대기발령을 내린 상태다.

    대우자동차판매 본사가 있는 부평에는 지난 해 회사 분할 과정에서 스트레스로 숨을 거둔 최동규 조합원이 8개월째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조문찬 강북지부장이 또 뇌종양으로 숨졌다. 3년 째 위암으로 투병하는 조합원도 있다. 220명 조합원 모두가 회사의 탄압과 오랜 투쟁에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회사의 부당한 해고 때문에 저와 제 가족이 정말 힘들고 어렵게 살았는데 최소한 미안하다는 사과라도 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회사는 아직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가 해고될 당시 대우자동차판매 조합원은 2,500명이 넘었다. 지금 조합원은 220명 뿐이다. 2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쫓겨나 지금도 차가운 거리에서 실업자로, 비정규직으로, 딜러로 생활하고 있다. 남아 있던 노동자들은 회사의 탄압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했다.

    열심히 차를 판던 ‘범생이’ 노동자를 전사로 만든 회사, 착하디 착한 노동자들을 투사로 만들고 있는 자본. 이제 높으신 사장님은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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