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곳에 민주노동당은 없었다
        2007년 05월 16일 02: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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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에서 정치 얘기를 가장 많이 하는 곳은? 국회? 파고다 공원이다(‘탑골’이라는 말보다는 ‘파고다’라 불러야 정치적 맛이 산다). 누군가가 열변을 토하면, 연사를 둘러싼 할아버지들이 갑론을박 격론을 벌인다. 몇 년 전까지 파고다의 모습은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2007년 5월 15일의 파고다는 조용하다 못해 고즈넉했다.

    민주노동당은 말야… 이명박이 말야… 

    그늘을 찾아 옹기종기 앉은 할아버지들은 “정치 얘기 관심 없습니다”라고 심드렁하게 답하고 다시 오수(午睡)에 빠져 들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산책 나왔을 사무직 여성들과 카메라를 든 외국인 관광객 뿐.

    민주노동당을 안 찍는 이유? 결론적으로 파고다 르포는 실패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 민주노동당은 …… 이명박이 ……” “저기 민주노동당은요?” “민주노동당은 말이야 …… 유시민이 ……” 민주노동당은 파고다 할아버지들의 선택지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에 대해 어떤 질문을 받아도, 답은 어느새 민주노동당과는 아무 관계 없는 곳으로 빠져 든다.

       
      ▲ ‘금년 대통령 선거 옳게 뽑읍시다’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건넨 성백훈 할아버지 (사진=레디앙)
     

    성백훈 할아버지(84세)는 ‘할아버지 할머니 평화군단 단장’이라 찍힌 잉크젯 명함과 ‘금년 대통령 선거 옳게 뽑읍시다’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건넨다.

    “유인물에 있는 ‘이도 박도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말인가요’는 무슨 뜻이죠?”

    “이명박, 박근혜 같은 사람들 제 아무리 해봐야 국민하고 상관 없잖아요.”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유인물에는 “국민의 마음은 벌써 이혼의 판결 끝났어요. 나라의 국난의 해법 가닥 못 잡는 여도 야도 못 믿겠다 안 믿겠다 완전히 굳은 38선 되어 버렸어요”라고 진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지지하시는 것일까?

    “참신한 인물, 무소속이 돼야 해요. 이번 대선에서는 참신한 무소속이 꼭 나올 겁니다. 얼마 전 보궐선거에서도 무소속이 됐잖아요. 국민들은 당파 싸움부터 없애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국민이 원하는 걸 거의 다 들어준 김대중씨가 가장 나았다”고 평가하는 성백훈 할아버지는 이북에서 ‘폴리스(경비대장이었다 한다)’로 3년 일하고 월남한 후 참전한 덕에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참전유공자증서’를 받고 월 7만 원씩 받는다.

    그 증서를 목에 걸고 다니는데, ‘노무현’이라는 글자는 테이프로 가렸다. 노무현 선거운동 하냐는 주변의 비아냥 때문에. 요즘에는 ‘근로동원 탄약 운반해 준 노력동원자’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유공훈장과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공산주의 운동은 꽃 필 수 없어요

    “전쟁에 나가고, 나라 일으키는 데 피 흘렸는데 아무 것도 안 줘요. 이게 나라예요? 애국애족 공 남 몰라라 하면 안 되죠. 월 얼마씩이든 일시불이든 꼭 받아내야겠어요”

    “예, 전쟁에 나갔던 어르신들께 나라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줘야 하지요. 그런데 외국에서는 그런 전쟁유공자 말고도 보통 노인들에게도 연금을 주잖아요. 민주노동당이 그런 거 가지고 국회에서 싸우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나라에서 공산주의 운동은 꽃 필 수 없어요. 공산주의는 일원주의예요. 남에 있든 북에 있든 공산당이긴 매 한 가지죠.”

    그런데 민주노동당에 대해 평하는 할아버지의 어투에는 조금의 적대감도 없었다. 그냥 본인이 생각하기에 민주노동당도 공산주의 범주에 들고, 한국에서는 정착하기 어렵다는 정도의 평이었을 뿐이다. 파고다를 처음 찾을 때에는 민주노동당 성토를 내심 기대했지만, 아무도 민주노동당을 욕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 가장 빨리 고쳐야 하는 게 뭘까요? 노인 분들이 원하시는 건 뭐죠?”

    “공공근로부터 고쳐야 해요. 예전에는 노인네들이 공공근로 가서 푼돈이라도 만졌는데, 요즘은 그것도 없어요. 그리고 실버타운 만드는 거. 우리 나라 국유지, 국유림 참 좋습니다. 경기도 연천 같이 좋은 국유림 안에 나라가 실버타운 만들어서 노인네들 살게 해야죠.”

    예전에야 고무신 받고 찍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정치 얘기 안 하겠다던 ‘이가(李家, 70세)’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풀어 갔다.

    “정치권에서 통일 얘기 너무 많이 안 했으면 좋겠어요. 통일이야 하긴 해야지만, 당장은 어렵잖아요. 동서독 통일할 때 엄청난 비용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한테 그런 돈이 있나요? 통일 한다는 건 우리가 그런 돈 마련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파고다 오면 민정당, 한나라당 같은 당들 지지하셨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무소속 좋다는 말씀들 많이 하시는데, 왜 그런 거죠?”

    “소외계층이야 원래 야당 지지하기 마련이고, 지금도 야당 지지하는 사람들 많죠. 그런데 사람들이 변했어요. 예전에는 고무신 받고 공화당, 민정당 찍어주고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죠. 국민이 정치인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데. 알 건 다 알고.

    지금 정당들은 엉망진창이예요. 정치인도 그렇고. 국회의원 한 명, 보좌관까지 하면 돈 엄청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국민한테 뭐 해주나요? 아무 것도 없죠. 저도 그렇고 여기 있는 사람들 안 해 본 게 없죠. 정치도 해보고, 다 해봤는데, 안 되더라는 거죠.”

    “노무현씨는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지난 번에는 노무현씨 찍었죠. 동정했고. 그런데 역시나 정치에서는 아마추어다, 이거죠. 강한 것 같지만, 결국은 장애를 못 이겼어요. 요즘 집값 좀 내렸다고는 하는데, 오른 거에 비하면 새발에 피죠.

    탄핵 때 저는 조순형이 아주 미웠어요. 그런데 국회 과반 가지고도 아무 것도 안했잖아요. 사학법 이사 문젠가 그런 거 가지고 싸우던데, 그게 국민 생활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국민들이 보기에는 다 미친 놈들이죠. 처리 못한 민생법안이 몇 갠데.

    제가 군 출신이라 군인정신이 좀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노 대통령이 사회를 너무 풀어 놓은 것 같아요. 할 때는 강력하게 해야 하는데, 사회를 너무 풀어 놓으니까 아무 것도 못하는 거죠.”

       
       ▲ 파고다 공원의 노인들이 그늘에서 쉬고 있다. (사진=레디앙)  
     

    이명박도 두고 봐야지

    “그런 말씀이라면 이명박이 비슷한 이미지 아닌가요?”

    “그것도 두고 봐야죠. 그 사람한테 그런 파워가 있는지……. 정치는 역시 박정희가 제일 잘 했어요. 제가 중위 때 5.16이 났는데, 민주당 정권이 워낙 부패해 있었기 때문에 잘 한 쿠데타라고 생각해요.

    박정희가 사람 잡아가두고 오래 해먹으려 한 건 잘못이지만, 경제 성장시킨 업적은 인정해야죠, 사회도 통일시켰고. 요즘은 국책사업이나 공익사업도 사람들이 반대해서 못하잖아요. KTX 금정산 문제 같은 거 안 좋은 겁니다. 박정희가 말한 ‘한국적 민주주의’ 그런 게 필요합니다. 물론 시류에 맞춰 변해야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3당이잖아요……”

    “4당이죠. 민주노동당은 울산에서 취소돼서 9석, 김홍업 이인제 들어간 민주당이 3당이죠.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 본산이잖아요. 노동자는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 외에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우리 나라에서 진짜 민주주의 되려면 미국처럼 양당 구조가 자리 잡아야 해요. 그런데 그 당이 그 당이니 민주주의가 안 되죠.”

    민주노동당, 친북정당은 아니지

    “친북정당 아닌가요?”

    “아니요. 친북정당은 아닙니다. 전쟁은 비참한 겁니다. 몇 백 만이 죽었잖아요. ‘서울 불바다’ 같은 말 나오면 걱정되고 하니까, 무조건 이북은 안 된다고 짜를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다 전쟁 터지면 다 죽습니다. 6.25 때 같이 오래 걸리지도 않고, 금방 다 죽어요.

    이북 달래느라 이런 거 저런 거 복잡하게 다 생각하고 하면 ‘친북’이란 말 들을 수도 있지만, 유화정책이나 햇볕정책 같은 거 써야지요. 물론 이북이 고마워하기는커녕 배짱 튕기니까 얄밉기도 하고, ‘퍼주기’란 말도 나오고.”

    “군에 계셨으면 연금도 받고, 생활은 괜찮으시겠네요.”

    “군에 23년 있었는데, 예전에는 퇴직하기 전에도 20년 넘으면 연금 줬어요. 예편하고 건설회사에서도 일했고. 연금이 150만 원 정도, 이자 수익 같은 거 합해서 월 200만 원 정도 들어오니까 혼자 사는 덴 충분합니다. 산본에 아파트가 한 채 있는데, 오래 전에 사별해서 서울 원룸에서 살아요. 요즘 노인들 자식한테 얹혀 살려고 안 합니다. 돈 몇 푼이라도 있으면 혼자 살려 하죠. 그런데 돈 있는 사람 별로 없고, 자식들도 그런 형편이 아닌 게 문제죠.

    요즘 연금 바닥났다고 군인연금도 줄이겠다고 하던데, 점차 군인연금이나 공무원연금하고 국민연금하고 비슷하게 맞추어져 갈 거예요. 우리 나라에서 왜 노령연금이 잘 안 되냐 하면, 국민 의식 문제도 있어요. 옆에 놈이 죽든 말든 나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사교육 문제도 그렇고. 우리 나라 사람들한테는 그런 피가 흐르는 거 같아요.

    저출산 고령화 문제 때문에 이제 와서 난리들 피우는데, 아직은 노인복지 역사가 너무 짧죠. 그리고 재원이 없어요. 세금 더 내겠다는 사람 없잖아요. 링컨이 말한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해야 합니다.”

    “인민정친가요?”

    “아니요. 국민정치죠.”

    정치 얘기 절대 안해, 정치하는 사람 쓸모없어

    끝으로, 아침부터 염두에 두었던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파고다 돌담 옆 지린내 나는 골목, 3,500원짜리 이발소 어귀에서 담배를 파는 할아버지였다. 뉴스에 가끔 나오던 중국산 가짜 국산 담배가 아닌가 싶다. 행색 멀쩡하고 카메라까지 든 사람이 말을 붙이려 하자, 담배를 황급히 감춘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아흔”

    “담배 파시나 봐요?”

    “아니요. 담배는 안 팔아요. 노인네들이 가져 나온 가방이나 지갑 같은 거 받아다 팝니다. 노점 단속이 워낙 심해서 그것도 숨어서 해야 되요. 하루 두 세 시간만 노점 펼 수 있어요”

    “벌이는 괜찮으세요?”

    “담뱃값이나 버는 거지 뭐. 분당 사는 교수 막내딸네서 살고, 용돈 받아요. 딸이 알면 안 되니까, 몰래 하는 거예요. 놀기도 힘들어요.”

    글쎄? 아흔 아버지에게 때에 찌든 등산 자켓 입혀 내보내는 교수 막내딸은 대한민국에 없지 않을까?

    “연금 같은 건 안 받으시고요?”

    “내줘야지……. 내주지 않는 걸 억지로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정치 얘기 조금만 여쭐게요.”

    “정치 얘기 절대 안 해요. 정치하는 사람들,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들인데.”

    “민주노동당이라고 아세요?”

    “그런 거 몰라요.”

    함경도 출신에 ‘분당 사는 교수 막내딸’이 있다는 할아버지는 눈치를 보며 담배 손님을 너댓이나 내쳤다. 더 있어서는 안 될 자리였다. 이거야 말로 ‘정치 민폐’다. 더 오래 머물렀다면, 그리고 할아버지가 50년이나 60년쯤 더 젊었다면, “민주노동당? 그건 니들 얘기고!”라고 말할 것 같았다.

    반나절 둘러본 걸로 파고다 민심을 알 수는 없겠지만, 놀랍게도 파고다 할아버지들은, 적어도 길게 이야기를 나누어 본 대여섯 분은 하나 같이 ‘무소속’이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원각사지 십층 석탑은 비둘기 똥을 피해 유리관 안에 잠자고 있었고, 노인들은 더 늙었다. 공원 주변의 노점상은 몇 배나 훌쩍 늘었고, 공원은 비어갔다. ‘탑’은 탑이지만, ‘파고다’는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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