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신자유주의? 아니 반자본주의
        2007년 05월 08일 06: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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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신자유주의’가 이번 대선의 대립 구도에서 과연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질지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분분하다. 그런가 하면 ‘반신자유주의’가 운동의 쟁점이 될 수 있다, 없다, 논란도 벌어진다.

    확실히 ‘신자유주의’란 말이 어렵기는 하다. ‘신자유주의’ 이전에 ‘자유주의’조차도 우리에게는 아직 학술 용어다. 토착화 이전의 말인 것이다. 그래서 간혹 집회에서 ‘신자유주의 반대’라 적힌 현수막이나 머리띠를 보면 흥분이나 감동보다는 뭔가 어색함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입문서나 개론서도 꽤 나온 편이다. 97년 외환위기 즈음에 베스트셀러가 된 『세계화의 덫』을 필두로, 유사한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 책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남반구 여러 나라를 덮친 IMF의 구조조정 공세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각하’의 영도 아래 산업 입국에 여념이 없던 저 1970년대에 자본주의의 핵심부인 서구에서는 모종의 중대한 사태들(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출발점이 된)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뒤늦게 감지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우리 입 안에서 모래알처럼 서걱댄다. 책을 그렇게 읽어도 통 입에 붙질 않는다.

       
    ▲『반자본주의 – 시장독재와 싸우는 사람들』사이먼 토미 (유토피아)
     

    한데, 이게 우리한테만 그런 것은 아니었나 보다. 언젠가부터 여러 나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반신자유주의’보다 ‘반자본주의’란 구호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얼마나 선명한가! 그리고 얼마나 깔끔한가! 무릇 정치 용어는 이래야 한다.

    사실 이게 그렇게 무식한 이야기만도 아니다. <레디앙>에 실린 요 전번 글(1인 1표의 궐기를 준비하자. 4월 23일)에서 필자는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자유주의가 아니라 고전적 자유주의의 ‘새로운’ 귀환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고전적 자유주의란, 적어도 그 경제적 측면만 놓고 보면, ‘자유’라는 대의 아래 자본 축적의 무한 자유를 옹호하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그 자유주의의 귀환인 신자유주의란 결국 자본주의의 가장 노골적인 변호와 찬양일 것이다. 한 마디로 ‘벌거벗은’ 자본주의!

    그래서 비교적 최근 나온 책들 중에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것을 자본주의라는 보다 근본적인 맥락 안에 자리매김하는 저작들이 눈에 띈다. A.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책갈피)이나 T. 셰리던 등의 『이매진 –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비전』(이매진)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다.

    그런데 최근 이 목록에 한 권의 저작이 더 추가되었다. 사이먼 토미라는 영국 저자의 『반자본주의 – 시장독재와 싸우는 사람들』(유토피아)이다.

    제목만 봐서는 캘리니코스 책의 유사품 같은 느낌도 있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기존의 책들에 비해 입문서로서는 더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반자본주의』의 미덕

    첫 번째는 좀 더 친절하다는 점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에서부터 논의를 풀어간다. 제목에서부터 자본주의에 반대한다고 공언해놓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출발점이겠다.

    하지만 고참 이론가나 운동가들이 써놓은 다른 많은 책들을 보면, 그 정도 이야기는 수십 년 전에 떼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첫머리부터 ‘자본주의’니 ‘제국주의’니 ‘착취’니 ‘축적’이니 하는 말들이 봇물치곤 한다. 반면 『반자본주의』의 저자 토미는 시장과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관련성 등 특히 요즘 독자들이 관심 있어할만한 각도에서 자본주의를 찬찬히 조명한다.

    이러한 미덕은 요즘 운동의 한 세대 전 과거에 해당하는 1968년 신좌파 세대의 전진과 패배에 대한 보고인 제2장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사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시애틀과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반자본주의 운동(이른바 ‘운동들의 운동’)을 이해하려면, 그 직전까지의 세계 좌파운동의 궤적을 알아야만 한다. 세상에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한데, 『반자본주의』는 그 족보를 정확히 압축,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두 번째 미덕은 현재 반자본주의 운동 안에서 서로 경합하는 여러 흐름과 경향들을 냉정하게 정리, 소개한다는 점이다. 저자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 꼭 집어내기 힘들 정도로 ‘객관적’ 소개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좌파 자유주의의 입장에서부터 변형된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자율주의나 평의회 공산주의 혹은 아나키즘까지 다양한 조류들을 담담히 선보인다.

    그렇다고 저자에게 자신만의 입장이 없겠는가. 평자가 보기에 저자는 어쨌든 집권을 통한 사회 변혁 쪽에 강조점을 찍는 이른바 ‘다수자’ 입장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인 것 같다. 그보다는 지속적인 사회운동의 실천과 직접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편이다.

    하지만 ‘한국어판 후기’인 <민주주의의 전복을 꿈꾸며>를 보면, 남미에서 벌어지는 진보적 지역통합의 시도에서부터 중국의 부상까지 미래의 여러 가능성들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대표와 엘리트들의 민주주의가 아닌, 다채로운 무늬를 지닌 민중들의 민주주의”라는 원칙을 확고히 견지하면서도, 그 ‘다채로운 무늬’가 전제할 수밖에 없는 여러 ‘우여곡절’에 대해 냉정한 현실주의의 자세 또한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개혁은 혁명적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한국의 독자들은 이제 우리 시대의 국제 좌파운동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살필 훌륭한 안내서를 한 권 더 갖게 되었다. 다만 전제해야 할 것은 안내서가 여행 코스까지 결정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안내서에 제시된 여러 갈래 길들 중 어느 코스를 선택할지는 우리 자신의 몫이다.

    즉, 『반자본주의』의 저자가 제시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떠한 전략에 강조점을 찍을지(좀 더 급진적인 형태의 사회민주주의를 추진할지 아니면 혁명적 조류의 새로운 부활을 꿈꿀지, 혹은 다수자 혁명을 추구할지 소수자의 탈주를 쫓을지)는 여전히 열린 문제다.

    다만 사족처럼 평자 자신의 입장을 내비치는 누를 독자들이 양해해주신다면, 『반자본주의』의 저명한 추천자들 중 한 사람, 보리스 카갈리츠키(러시아의 사회주의 이론가)의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오늘날 성실한 개혁주의자라면 누구나 혁명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는 진지하게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혁명적인 단호함과 급진성, 운동성을 동반해야만 한다는 것.

    왜 그럴까? 그 의미를 곱씹다 보면, 토미의 책이 병렬적으로 소개하는 다양한 개혁주의 전략과 혁명적인 운동들이 함께 가져야 할 어떤 상호관계(좀 잘난 척하고 말한다면, ‘변증법’)에 대해서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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