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계급, 군 없으면 노예 신세"
        2007년 05월 04일 02: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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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북한채널(편집위원장 김근식 경남대 정치언론학부 교수)>의 이메일 소식 <이슈 & 오피니언> 4월 30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전문 게재를 허락한 <북한채널>에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노동절을 맞아 남북의 노동자들이 창원에서 공동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4월 29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이번 행사는 남쪽에서는 처음 열리는 것으로서 2.13 합의 이후, 남북관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사로도 읽혀진다. 노동절을 맞아 남북의 노동자가 만나는 것이 이제는 낯설지 않은 연례행사가 되어 버렸다.

    남북노동자 낯설지 않은 연례행사와 낯설음

    그러나 남북의 노동자들이 각자의 사회에서 처한 위치는 아직도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근거하고 있는 노동계급 중심성에 비하면,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 계급은 그 중심성은 잠재적일 뿐이다. 따라서 계급적인 측면에서 동일하게 노동자계급으로 규정되지만, 남북의 사회에서 차지하는 그들의 지위와 역할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 북한의 노동자계급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이론 즉, 맑스-레닌주의에서 말하는 생산수단의 주인이자, 혁명의 주력군이며, 세상을 창조하는 역군으로서의 지위에서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북한에서 선군정치가 이론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혁명의 주력군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북한의 노동계급은 사회의 ‘제1계급’의 지위를 군인에 넘겨주고, 혁명적 군인정신을 배워야 하는 ‘제2계급’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선군정치에 따르면, 북한에서 혁명의 주력군은 노동자계급이 아닌 군대로 정의된다. 전통적인 맑스-레닌주의에서의 일탈처럼 보이는 북한의 이같은 규정은 현실적인 필요성과 북한 사회에서 차지하는 군의 특수한 지위와 역할에 근거하고 있다.

    선군정치를 설명하는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군은 가장 혁명적이며 전투적인 역량이며, 오늘날의 노동자계급도 군대가 있는 조건에서 영도계급이지 군대가 없으면 노예의 운명을 면치 못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혁명정신만 강조하고 ‘혁명적 군인정신’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혁명적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노동계급이 과거의 혁명정신만 강조하던 노동계급보다 더 위력하고, 결과적으로 노동계급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 선군정치 포스터
     

    혁명적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노동자계급

    선군정치에 따라 북한에서 군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최상의 수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군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목적으로 한 ‘원군’ ‘군민일치’가 1990년대 들어와 보다 더 강화되었고, 군 창건일이 김일성, 김정일 생일 다음으로 중요한 기념일이 되었다. 군부 인사들의 서열 상승도 눈에 띄며, 경제 정책도 국방공업을 우선으로 하는 노선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선군의 사회적 분위기는 최근 4월 25일 열린 군 열병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군 열병식이 성대하게 치러졌음은 물론, 평양 시대 곳곳에서 이들을 환영하고 축하하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에서 군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태도도 남다른 것으로 보인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군에 대한 원호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일부 탈북자들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북한의 선군이 ‘군을 중시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군의 사회적 역할을 들여다보면, 군의 노동자계급 역할에 대한 강조가 점차 더 눈에 띄게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군이 가장 중요한 사회세력이지만, 이들의 사회세력으로서의 역할은 물리력과 건설자로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군은 노동계급의 ‘정수분자’

    군을 노동계급의 ‘정수분자(精粹分子)’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보는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군은 물리력을 지닌 또 하나의 노동계급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군은 본연의 임무로서 ‘체제 수호’의 역할과 동시에 ‘건설자’로서 노동계급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대규모 건설장에 파견된 군은 군이라기보다는 조직화된 그리고 ‘군복 입은 노동자’에 더 가깝다. 북한의 군이 담당하는 이러한 역할은 비단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부터 있어왔던 것이며, 1990년대의 위기를 거치면서 보다 더 강화된 것이다.

    또한, 북한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군대생활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오늘의 군은 곧 미래의 노동계급을 형성하며, 따라서 군과 노동계급은 결국 하나의 계급적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북한이 선군정치를 통해 전통적인 계급 관계 및 역량 편성의 변화를 시도한 것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1990년대의 위기가 아니더라도, 북한에서의 계급적 구분은 과거와 같은 혁명성과 구조적 지위로부터 찾기 어렵게 되었다.

    북한의 주장대로라면, 이미 계급구분이 거의 의미를 찾기 어렵게 된 사회구조적 변화가 발생했고, 이를 다시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노동자, 농민, 인텔리 등에게 계급성을 부여하기 어려운 일반적인 ‘민중’의 범주로 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계급평등의 성과 또는 계급구분의 모호함

    사회주의 일반에서 나타나는 계층구분 현상은 북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고, 따라서 노동계급을 과거와 같은 혁명의 주력군으로 내세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미 1980년대 김정일 위원장은 노동계급을 맑스의 시대와는 달라진 계급으로 규정하였고, 그들의 혁명성 또한 맑스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나타나듯이 소위 말하는 화이트 칼라, 블루 칼라와 같은 노동계급 내부의 분화도 나타나고 있었고, 생산수단에서의 위치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직책과 역할에 따른 구분만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사회주의 이념이 지향했던 계급 평등이 이루어진 것이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자면, 계급 구분이 모호해진 것이다. 국영 노동자로서, 그리고 협동 농민으로서 이들은 모두 ‘공화국의 공민’인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에서의 구조적인 위치가 아니라 바로 ‘사상의식’이며, ‘집단성’이었다.

    결국 과거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으로서 사상의식과 집단성, 규율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군이었고, 군은 노동계급을 대신하여 혁명의 주력군으로 규정될 수 있었다. 과거 김일성이 강선제강소를 방문하여 ‘믿을 것은 바로 여러분 노동계급뿐’이라고 했던 것이 이제는 ‘믿을 것은 바로 여러분 군대’뿐인 것으로 된 것이다.

    믿을 것은 바로 여러분 군대뿐

    이것이 역사의 진전인지, 퇴보인지의 가치판단은 의미가 없다. 단지,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북한의 노동계급은 오랫동안 누려왔던 ‘혁명의 주력군’을 군에 내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계급의 당이 군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고, 당원의 상당수는 노동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과 노동계급이 계급적 선을 경계로 구분되지 않고 있으며, 노동계급의 정수분자로서 군을, 군의 믿음직한 동맹자로서 노동자, 농민 계급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의 관계는 계급적 연대감이 아니라 최고 지도자 및 체제에 대한 연대감으로 채워져 있다. 과거 노동계급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서 주력군이었고, 선진적인 계급으로서 이를 지도했다면, 이제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진 조건에서 혁명의 전취물(체제)을 지켜야 하고, 이를 발전시켜야 하는 사회적 조건에서 주력군이 군대로 바뀌었다.

    앞으로 북한의 이러한 주장이 어떻게 변화될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북한의 사회변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변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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