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없는 보수의 도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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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5월 03일 10: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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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한국 정치의 유행은 ‘선진화’와 ‘중도’인 듯하다. 언론이든 정치인이든 이 두 단어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못하는 지경이다.

    ‘선진화’ 비슷한 말은 박정희 때부터 귀가 닳게 들어온 것이고, ‘중도’는 예전에는 많이 듣지 못한 조금은 생소한 말이다. 이 점에서 현 정국에서 두 단어가 같이 혼용되는 데는 어떤 의미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또, 요즘 쓰이는 ‘선진화’와 ‘중도’가 일정한 경향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말 자체에 가치 선택이 내재해 있거나 듣는 사람의 호오 판단을 직접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점도 유념해 두어야 한다. ‘경제성장’이나 ‘민주화’보다는 훨씬 가치 중립적인 듯 들리는 두 담론이 애용되는 데도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 2005년 한국선진화포럼 출범식
     

    1. 보수 정치권과 언론의 ‘선진화’

    작년 9월 28일 한국 주요 정당이 ‘선진화’를 무엇이라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토론회가 있었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세일)의 창립 심포지엄 ‘대한민국 선진화, 어떻게 할 것인가’에 열린우리당 강봉균, 한나라당 전재희, 민주노동당 이용대, 민주당 최인기 정책위의장이 참석해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이 날 발표된 각 당의 ‘선진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김선희 기자 「여야 4당 정책위 의장 ‘선진화’ 논쟁」 <레디앙>, 2006. 9. 28 재구성
     

    위 표에 따르자면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는 미묘한 표현 상의 차이만이 보이고, 두 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는 철학 자체의 차이가 느껴진다. 물론 열린우리당이 ‘동반 성장’이란 표현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동안 실제 구사해온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의 조율 관계를 살펴 보면 한나라당의 ‘성장 지속론’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선진화’의 목표를 총 경제 규모 또는 외연의 수치적 확대로, 그 방법을 ‘개방’과 노동자의 기업활동 협력에 두고 있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런 기조는 두 당의 이데올로그라 할 수 있는 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박세일은 경실련을 거쳐 한나라당의 정책위의장을 지냈고, 김호기는 참여연대를 거쳐 노무현 대통령 취임사 준비위원이었다.

    “대내외 개방입니다. 대내 개방은 규제 완화고 대외 개방은 자유무역협정(FTA)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유스럽게 기업과 개인의 창의에 맡기자는 것입니다. …우선 성장하고 발전해야 합니다. 대신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선 공동체가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성장을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성장이 되도록 저소득층에 대한 양질의 교육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경제적 의미의 선진국이라면 1인당 GDP가 2005년 가격으로 3만 달러 정도는 돼야 하지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다음 단계인 자유화를 이뤄야 합니다. …한국이 FTA의 허브가 돼야 합니다.” – 박세일, 「선진사회로 가는 길」, <한국일보>, 2006. 4. 9

    “반세계화가 대안이 될 수 없지요. 우리의 내수시장 규모가 크지 않고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닌데 세계화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3의 비전인 지속 가능한 세계화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에다 새롭게 대외 개방과 대내 복지의 선순환을 결합시키는 이중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사람에 투자하자’는 이른바 사회투자국가를 적극 추진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노조의 임금인상 자제가 있다면, 기업은 고용 안정성을 보장하고 정년을 연장해야 합니다.

    …오늘날 경제 활력이 시장에서 나오고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하면 안 되지만 신자유주의 논리처럼 최소 국가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김호기, 「선진사회로 가는 길」, <한국일보>, 2006. 4. 16

    박세일은 “규제 완화”라고 말하고, 김호기는 “경제 활력은 시장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박세일은 노무현 정권의 논리를 빌려와 “FTA 허브”를 말하고, 김호기는 “지속 가능한”이라는 수사(修辭)를 덧붙여 개방을 주장한다. 박세일은 “저소득층에 양질의 교육”을 주자고 말하고, 김호기는 “사람에 투자하자”고 말한다.

    박세일은 “노동력 없는 사람에 대한 지원”을 서비스하고, 김호기는 “임금인상 자제”를 호소한다. 두 사람은 서로 크게 다른 양 말하고 있지만, 3자 입장에서는 두 사람 생각의 차이를 찾아내기보다는 두 사람의 같음을 읽는 것이 훨씬 쉽다.

    위 두 사람의 선진화 방법론은 언론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올해 1월 1일부터 4월 21일까지 서울에서 발행되는 9개의 종합일간지에는 ‘선진화’라는 제목을 단 기사가 24개 실렸다. 이 기사들의 논지를 살펴보면 ‘노동운동 억제’가 7건, ‘규제 완화’가 5건, ‘시장 개방’이 4건으로 전체 24건 중 16건이나 차지한다.

    2. 노동운동 억제, 규제 완화, 시장개방의 문제

    노동운동이 선진화를 가로막는가?

    보수언론들은 파업으로 인한 우리 나라의 노동손실일수가 외국보다 10배라는 둥, 100배라는 둥의 보도를 양산해낸다. 하지만 그렇게 많다는 노동손실일수가 전체 노동시간의 0.1~0.3%에 지나지 않아 한국 노동자들이 여전히 전세계 최장의 노동을 하고 있으며, 노동손실일수 역시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한국 수준의 경제 규모를 지녔을 때의 1/3에서 1/5에 지나지 않음은 말하지 않는다.

    파업 증가율, 파업 참가자 수 증가율, 1000명 당 파업으로 인한 노동손실일수 등 객관적 수치로 비교하면, 우리 나라의 노사 갈등 지수는 OECD 30개 국가 중 14위로 중간에 머물고 있다(2002년~2004년 기준, 김동원, 「우리나라 노사관계 평가기준 연구」, 2007. 1).

    우리가 선진국이라 알고 있는 나라, 유럽이나 미국, 일본은 한국보다 노동운동이 더 발전해 있고, 노동자 임금도 비싸다. 따라서 형식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선진화의 일반적 경로에서 노동운동의 발전과 임금 인상을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고, 그렇다면 ‘노동운동 억제’ 주장은 선진화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노동운동의 발전이 선진화와 인과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의 억제가 선진화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문제는 노동운동이 사회구조와 경제운영의 합리화에 기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지, 노동운동 그 자체의 진퇴에 있지 않다. 비합리적 재벌체제, 내수 부진 – 소득불균형 구조, 그리고 보수 일변도의 기형적 정치에 도전하는 노동운동은 선진화에 기여할 것이다.

    규제를 완화하면 선진국이 되는가?

    일반적으로 ‘규제 완화’는 정부의 시장 개입 축소, 공공 축소, 사영 확대를 일컫는다. 한국의 보수정치인과 언론은 재벌에 대한 일체의 규제를 해소하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핀란드나 아일랜드, 네덜란드처럼 산업자본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신주단지처럼 받드는 미국에 강력한 산업자본 규제 정책이 있음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처럼 기업활동 규제를 없애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 경쟁력 1위 핀란드에 국민의 환경권․노동권․복지권 확보를 위한 세계 1위의 규제가 있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요컨대, 규제의 적절성 여부는 사회운영의 특수한 목적에 부합하는가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지, 많거나 적다고 옳은 것이 아니다. 핀란드에서는 노키아 간부에게 1억 3천만 원짜리 과속 과징금을 부과하고, 한국에서는 재벌 일족에게 조세감면과 법인세 인하 혜택을 준다. 핀란드에서는 국민 건강을 위해 외국계 기업에게조차 소금 사용을 규제하고, 한국에서는 중고등학생의 두발을 규제한다.

    공공은 비효율이고 사영은 효율이라는 맹신에는 실소가 나올 뿐이다. 민영화된 영국 철도가 효율적이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언제나 국가 경쟁력 1위로 꼽히는 핀란드가 한국보다 36배나 많은 공기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의 사기업이 북유럽의 공공 기관보다 효율적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효율성은 공공이냐 사영이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민주주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이재영, 「물 민영화에 주목하자」, <레디앙>, 2006. 8. 1).

    막가파식 개방이 선진화?

    한나라당 전 정책위의장 박세일의 “세계화를 추진한 나라 중 양극화를 겪지 않은 나라들도 많습니다(위 <한국일보> 기사)”는 주장은 청와대 김성환 정책조정비서관의 “개방이 양극화를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경제 개방도가 높으면서도 양극화가 확대되지 않는 나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네덜란드, 아일랜드, 스웨덴, 스위스 등이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김성환, 「한미FTA를 반대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제안」, <청와대 브리핑>, 2007. 4. 16)”는 발언으로 되풀이된다.

    위에 든 나라들이 이른바 ‘개방’으로만 나아가고 있다는 전제 자체가 사실이 아니다. 스웨덴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던 유로화(European Monetary Unit) 도입을 2003년 국민투표에서 부결시켰고, 2005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유럽헌장이 부결되었고, 스위스에서도 미국과의 FTA가 2006년 국민투표에 의해 중단되었다.

    김 비서관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스웨덴과 아일랜드에서는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대두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2003, 2004년까지의 기준 통계에 따르면 스웨덴 상위 20% 계층의 소득은 2% 내외 증가, 중위계층과 하위 20% 계층의 소득은 0.5% 가량 감소했으며, 1980년대 3%대였던 상대빈곤율이 5%로 상승했다. 아일랜드 등에서는 명목소득의 상승이 외국계 대기업에 종사하는 소수의 고학력층에게만 집중되는 양극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복지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유럽 나라에서도 이런 지경인데, 이미 개방화의 정도가 일본을 앞서는 한국에서 ‘묻지마 관광식 개방’, ‘막가파식 개방’을 해대는 것이 어떤 참상을 불러올지는 너무도 뻔하다(이상, 이재영, 「극단적 개방독재 벗어나라」, <레디앙>, 2007. 4. 17).

    3. 삶의 선진화, 사회복지의 향상

    보수정치인들과 언론의 ‘선진화’론은 빼다박은 듯이 똑같은 공식에 따른다. [선진화 = 선진국이 되는 것 = 선진국은 경제적 부국 = 경제적 부국이 되려면 경제성장 = 경제성장을 위해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 노동운동 억제, 규제 완화, 시장개방을 통해 경제성장이 가능한가도 의문이지만, 경제 규모를 키우거나 외연을 성장시키는 것이 곧 선진화인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그런 성장이 한국 국가의 목적인가도 되물어보아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어디를 찾아봐도 ‘선진화’나 ‘선진’이란 말은 안 나온다. 헌법에는 ‘선진화’ 대신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으로 명시돼 있다.

    헌법에서도 ‘성장’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GDP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앞서 든 여러 정치인들과 언론의 ‘선진화’론은 헌법 정신에서 이탈한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목적은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돼 있듯이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이다. 즉, 삶의 질의 향상을 추구하되, 그 혜택이 고르게 돌아가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최근 영국 레세스터 대학교가 연구 발표한 국가별 행복 순위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비즈니스위크>에 보도된 행복 순위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김경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는?」 <머니투데이> 2007. 3. 24 재구성
     

    행복 순위 상위를 차지하는 나라들은 바하마, 부탄, 브루나이를 제외하면 산업화된 부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위 표를 살펴보아도 명목GDP가 행복도에 그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1인당 GDP가 4만 달러, 5만 달러를 넘는 아일랜드와 룩셈부르크는 비교적 하위인 11위, 12위인 반면 1인당 GDP 3만 달러 수준의 북유럽 국가들이 상위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들은 모두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잘 갖춰진 공공 사회복지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이것은 국민의 행복도, 삶의 질이 명목 GDP와는 상대적으로 낮은 연관성을, 사회복지와는 상대적으로 높은 연관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헌법 역시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고 밝히며,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이 무엇인지를 구체화한다. 그렇다면 [선진화 = 국민 삶이 개선되고 행복해지는 것 = 보편적 복지 서비스의 향상 = 복지 향상을 위한 각종 정책]이라는 도식이 ‘선진화’의 올바른 길일 것이다.

    4. ‘중도’와 ‘선진화’는 한국 민주주의 실패의 증거

    ‘선진화’와 함께 운위되는 ‘중도’ 역시 여야를 넘나든다. 한편에는 조갑제의 맹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중도’임을 거듭 밝히는 박근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여권에 가까운 황석영, 강준만 류의 ‘중도론’이 있다.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우리 정치가 낡은 보수와 진보의 틀에 갇혀 국가발전을 위한 역량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 …… 합리적 보수의 숫자를 늘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도적 사람이 많아져야 과거 상처를 치유하고 선진적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황석영, <경향신문>, 2007. 1. 23

    “‘중도(中道)’를 두텁게 한 뒤에 좌우가 한 단계 낮은 키로 중도의 양 옆에 포진해야 한다. 극단적 분열주의가 기승을 부리면 어느 쪽이 옳건 그르건 모두 다 자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강준만, 「왜 중도(中道)인가?」, <한국일보> 2006. 11. 14

    중도론자들은 하나 같이 선진 외국의 정치가 중도화되었음을 설파하고 있는데, 이들은 그 나라들에서 100년 넘게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 사실은 애써 무시한다. 중도론자들의 주장처럼 안정되고 선진적인 나라들에서 중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진보와 보수가 갑론을박하고 진퇴하며 이룬 역사의 산물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중도는 지점(地點)이 아니라, 시점(時點)이다. 그렇다면 중도의 필요충분조건은 일제에서 열린우리당에 이르는 지난 100년의 보수 치우침을 상쇄할 향후 100년의 진보 치우침이어야 한다. 따라서, 개혁이라 자처하는 정치세력, 시민운동, 언론매체의 중도론 합창은 채 영글지 않은 진보를 짓밟으려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 반공론의 21세기 판이다(이재영, 「중도론은 21세기 반공론」, <레디앙>, 2007. 1. 27).

       
      *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 &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 「2007년 유권자 성향조사」, 2007. 1  
     

    위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중도화 추세가 뚜렷한데, 이런 결과는 거의 대부분의 조사에서 동일하게 나오고 있다. 그런데 유권자들의 중도 수렴 현상에는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이 실패했다는 정치 심리,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는 패배감, 또 한 번의 선택을 할 자신감이 없어졌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즉 지난 20여 년 정치의 변화가 국민들에게 경제사회적 보상을 주지 못한 것, 한국 정치의 실패에 기인하는 것이다.

    여야 정치인들과 논객들의 ‘중도’론은 유권자의 중도 수렴 현상에 편승하려는 것이다. 한나라당 류는 ‘반북’이나 ‘수구독재’ 이미지를 불식시키려 하는데, 이는 “수구 한나라당 되면 이북하고 더 틀어져 불안해지는 것 아니냐”라는 유권자 심리를 추수하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류는 ‘반재벌’이나 ‘무능개혁’ 이미지를 불식시키려 하는데, 이는 “우선 경제부터 돌아가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는 유권자 심리를 추수하는 것이다.

    ‘중도’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다. 좌나 우, 진보나 보수가 있는 것처럼 중도도 있게 마련이고 그 순기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여야의 ‘중도’론이 자신들의 이념에 대한 성찰이나 수정 없이 단순한 이미지 변경 차원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의 ‘중도’론은 자신들의 색채를 숨기려는 정치적 분칠이고, 유권자의 자신 없음을 추수하는 정치적 무소신의 고백이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그리고 그 주변의 ‘중도’는 갈 길을 모르고 멈춰 서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표상이다.

    한국의 보수정치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성장주의로 돌아갔지만, ‘오로지 성장’이라 내놓고 말 못하고 ‘선진화’라 에둘러댄다. 1987년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진화’를 추구하되, ‘중도’라는 무소견한 절충으로 그것을 이루려 한다. 문제는 절름발이 선진화론을 버리지 않는 중도란 어불성설이고, 그런 중도로는 올바른 선진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 이 글은 진보정치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미래공방> 5,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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