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동당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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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5월 03일 12: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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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대선 불출마 소식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 사람도 논문표절한 거 들켰나?”였다. 물론 정치세력화에 있어 자신의 자질과 능력이 부족하다는 대단히 겸손한 이유를 들었지만, 학자출신들이 ‘논문표절’ 때문에 정치권에서 낙마했던 사실을 심심치 않게 접하는 현실에서 뜬금없이 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슨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 강병익 진보정치연구소 상임연구위원
     

    20년 전 ‘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한 비판 중 하나가 ‘수입이론의 무비판적 적용’이라는 거였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표절’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성격을 밝히고 나름대로의 대안사회를 향한 고민의 산물로 ‘인용’된 것이라면, 그 자체로 충분한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변화된 현실, 지난 논쟁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현실을 수정하고 변경하는 고민과 연구가 지속되지 못한 것은 ‘사회구성체 논쟁’이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이를 담당할 사람들의 때이른 ‘패배주의’나 ‘게으름’의 문제일 것이다.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진보세력의 관찰부족, 관념과잉을 지적한 박홍순 전 민주노동당 기획위원장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동의하면서도 이해 못할 것은 그래서 “반신자유주의는 운동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다양한 변화와 쟁점들을 “무언가 한 두 개의 쟁점으로 모아내야 한다는 조급증, 총괄적인 대안 제시가 되어야 한다는 조급증이 오히려 운동과 현실의 괴리를 만들어내고”, “변화가 구체적이듯이 운동도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제도, 정부에 대한 구체적인 저항이 아니라 어떤 이념 반대운동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 그 이유다.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을 제대로 하자라는 취지가 아니라면, 이 같은 지적은 과거 YS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저항운동진영이 ‘이념시대’를 종언하면서 전문가운동, 정책운동, 시민운동으로 각개약진했던 결과를 성찰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태도다.

    박홍순의 비판대로라면 지역으로, 전문영역으로, 시민의 권리찾기 운동으로, 우리운동은 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실은 왜 이리도 팍팍한가에 대해 뭔가 답을 해야 한다. 한국의 진보운동이 ‘민주화’ 이후 분화의 양상만 있었을 뿐 수렴과 논쟁을 통한 상호 긴장이 없었기 때문은 아닌가.

    운동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다원주의를 수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통분모를 찾고 이를 저항의 기지로 삼을 때, 운동으로서 존재 의미가 있는게 아닌가.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는 경제정책으로는 고전적 자유주의인 ‘통화주의’에 바탕을 두고 개인과 시장을 중심적인 가치로 둔다. 정치적으로는 2차대전 이후 관리경제와 혼합경제, 그리고 복지국가라는 ‘전후합의’(post-war consensus)가 경제위기와 국가실패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이를 정치적으로 대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를 이념적 토대로 하는 신보수주의로 등장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시장경제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고 이를 극단화한다는 점에서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인민의 생활양식을 포괄하는 사회적 생산양식이자 소비양식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심화를 통한 사회적 양극화와 금융자본의 세계화는 한 사회의 인민의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거대한 사회개조 프로그램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써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은 논술형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답형이어야 한다. 이것이 정치이고, 현 시기 진보운동의 최대 현안일 수밖에 없다. 논술형 운동은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정책과 지역운동이다. 그리고 비정규직 투쟁과 복지확대운동, 재벌개혁운동, 한미FTA 반대운동 등을 통해 힘겹고 부족하지만, 구체적인 투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반신자유주의 운동은 대안사회 향한 최소한 합의이자 출발점

    전통적으로 저항세력의 담론은 말 그대로 저항을 통해서 형성되어왔다. 지배계급의 담론과 실현양식을 반대하는 것은 저항세력의 무능함이나 조급증의 발로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저항운동의 전개양식이다.

    결국 이 시대의 진보는 크게 보면 “형성의 진보”(구갑우)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논쟁의 참여자들이 한결같이 지적한 ‘위기’에 대해서도 절감하고 있다고 본다. 그 ‘위기’를 돌파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움츠림을 위해서도 신자유주의라는 화두는 진보세력에게 “우회할 수도 없고”(이광일), 비켜서면 안 되는 접점인 셈이며, 관념의 운동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이다.

    내가 생각하는 현재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한계는 운동이 될 수 없는 걸 운동해서도 아니고, “다수 대중들에게 실감하기 어려운 타자(他者)의 언어”(정상호)이어서도 아니다. 바로 대중운동의 방식을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아니라, 과거 명망가형 운동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찾고 싶다.

    신자유주의 반대가 타자의 언어가 되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어떻게든 설명하고 논술하려고 하는 지식인들의 계몽적 태도에 있다.

    비정규직법 때문에 소외당하는 비정규직, 마음놓고 맡길 공공보육원 찾기 어려운 젊은 부모들, 농업도 바뀌어야 한다며 ‘희생의 정당성’에 무방비로 노출된 농민들, 정규직 교수들 이상의 강의를 전담하고 하고 있는 시급 3만원짜리 시간강사들, 그들이 바로 신자유주의를 몸으로, 생활로, 설명해 주는 장본인들 아닌가.

    정상호 교수가 “‘민중의 삶과 인민의 문제’에 대한 진보의 무감증”과 “생활정치”의 부재를 지적한 것은 뼈아픈 부분이다. 동의한다. 하지만 모든 진보운동이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피켓팅에만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신자유주의’라는 선언에 숨어 있지도 않았다.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네트워크 권력 속에 숨어 있는 사회관계를 드러내고,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의 개방정책과 부동산정책, 그리고 공교육과 공보육정책, 복지정책에서 ‘좌파’다운 공공성의 철학을 드러낼 것을 요구하고 비판했던 것이다.

    대안없는 비판이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면 나는 그 질문을 다시 돌려줄 수밖에 없다. 대안이 아예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있는 대안도 무시했던 것인가. 한미FTA에 대한 반대 목소리에는 국제관계 속에서 국가간 불평등을 심화시키기 때문에 FTA 자체를 반대해야 한다는 측부터 통상절차와 국민적 합의를 전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입장이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그 어느 쪽과도 대화하려 들지 않았다.

    1가구 1주택을 법률로, 혹은 개헌을 해서라도 헌법에 명문화라도 해야 한다고 민주노동당은 입장을 밝혔다. 의료와 교육의 공공성 문제를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라는 슬로건 제시하는데 그친 것은 아니다. 단계적 로드맵을 밝히고, 입법화하는 것을 그 동안 의정활동을 통해 전개해왔다. “경제학계의 최장집”은 없지만, ‘사회경제정책’의 마인드는 이미 진보진영의 화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뼈아픈 지적, 지속돼야 할 논쟁, 그리고 민주노동당

    ‘진보논쟁’에 이은 ‘그 후 논쟁’은 ‘진보의 정체성과 정치적 과제’를 이어받아 진보와 민주주의, 운동과 정치, 진보와 민주노동당 등 논점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만의 고통을 느낄 단계는 아니지만, 분명 ‘불임’은 아니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지적한 뼈아픈 지적은 진보세력의 자양분으로, 성장을 위한 행동계획으로 또 다른 논쟁이 필요하리라 본다.

    앞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이러저러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진보정당을 ‘자임’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역시 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없는 정치세력이라고 본다면 이 논쟁에 주목하고 ‘진보의 위기’를 ‘진보정당의 혁신’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책임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열린우리당을 앞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나는 이게 기뻐해할 일인지 의문이다. 이미 정당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유령 정당인 열린우리당에 정당 지지율이 앞선다는 것이 무슨 정치적 의미가 있겠는가.

    여당은 사분오열하고, 거대야당은 자중지란에 빠진 상황에서, 그야말로 보수정치가 갈데까지 가고 나서야 대중들은 진보정당에 조금 눈길을 돌리는 상황에 우리는 처해 있다.

    여기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를 평화통일공약을 앞다투어 내놓고 ‘경쟁’하겠다는 당의 대선후보들의 행태도 한 몫 차지하고 있다. 이번 대선을 진보정당의 혁신의 계기로 삼겠다는 생각이 진정으로 대선후보들에게 있다면 제일 먼저 당을 어떻게 이끌고 무엇을 바꾸고, 이를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 정도 밝힐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번 ‘진보논쟁’의 실천적 과제를 당의 대선 후보들도 심사숙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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