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정치적이고 재미있는 남미 여행기
        2007년 05월 01일 04: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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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일종의 여행기다. 지은이 손호철 교수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남중미 8개 국을 여행했다. 쿠바,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멕시코, 과테말라. 손호철은 여행 안내지에 나오는 관광지를 부러 거르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스터 섬이라든가, 마추픽추, 티티카카 호수를 보며 손호철은 읊조린다. 이런 식이다.

    “고산병으로 머리가 너무 깨질 듯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날이 밝자 배를 타고 티티카카 호수에 들어갔다. 세상이 시작되고 자신들의 조상이 처음 생겨났다고 믿는 성지답게 하늘 아래의 호수는 신비감이 가득했다.

    …부엌에 들어와 함께 식사를 하며 맑은 웃음을 짓는 다니엘 일가를 보는 순간 후지모리 향수에 대한 우려도, 고산병의 고통도 다 사라졌다. 티티카카 호수와 눈 덮인 안데스 산맥의 영혼을 먹고 자란 맑은 미소를 될 수 있으면 오래, 오래 기억했다가 세속에 머리가 아플 때면 그 미소를 떠올리리라.” – 「하늘 밑의 호수, 티티카카」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손호철, 이매진  
     

    필자가 필자니만큼 이 책은 일종의 정치 얘기다. 게다가 한국의 유명한 진보 정치학자이니 여행 안내자의 역할을 너무도 충실히 해준다. ‘죽어서도 쿠바 살리는 게바라’, ‘5월 어머니회와 5.18’, ‘남미의 박정희 후지모리의 몰락, 그 이후’ 같은 소제목들은 손호철이라는 필자가 아니고서는 나오지 못할 이야기들이다.

    “아바나 시내에도 호세 마르티의 동상 등 많은 동상이 널려 있지만 카스트로의 동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살아 있을 때부터 거대한 동상을 세워 김 전 주석을 신격화한 북한의 개인숭배가 쿠바에는 없음을 시사해준다.” – 「북한과 쿠바, 같지만 다른」

    “악수를 하면서 자세히 바라보니 대통령이라기보다는 투박하고 순진한 촌사람 같았다. …차베스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불리한 여건에서도 세 차례에 걸친 수구세력의 쿠데타를 분쇄함으로써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이냐, 아니면 권력양도를 통한 혁명의 제도화냐 …후자보다는 전자 쪽으로 나갈 것 같은 걱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21세기 돈키호테 – 차베스와 볼리바르혁명」

    “상파울루에서 만난 택시기사 카를로스는 노동자당의 골수 지지자로 룰라를 찍었는데 그 결과가 ‘거대한 국민사기극’이라며 열을 올렸다. …이런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룰라 대통령은 이미 성공한 대통령인지도 모른다. 룰라의 지지자들은 브라질처럼 불평등한 사회에서 룰라 같은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사실 자체가 최대 업적이며, 이 점에서 룰라는 이미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 「우라정권보다 더 우파 같은 룰라」

    “한국에도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하는 등 진보정당이 발전하고 있는데 해주고 싶은 말은?" "룰라처럼 승리지상주의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파보다 더 우파적 정책을 펼 바엔 무엇 때문에 집권을 하는가. 프랑스의 철학자 가타리가 잘 지적했듯이 집권하면 그 자체가 우파이며 ‘이 세상에 좌파정부란 없다’는 말을 잊지 말기 바란다.” – 인터뷰, 루이스 브레세르 페레라 『브라질 정치경제』 편집장

    또, 이 책은 수상록(隨想錄)이기도 하다. 여행이란 게 대개 그렇듯이 손호철은 곳곳에서 속내를 드러내 보인다.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은 것이 또 하나 있다면 바로 ‘라틴적 삶’입니다. …우리는 원래 시간을 잘 안 지키는 느긋한 ‘코리안 타임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간의 압축성장과 속도전 때문에 ‘빨리빨리의 나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일과 경제적 성공의 노예가 된 호모 파베르(작업인)를 호모 루덴스(유희인)로 바꿔 나가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손호철의 글을 읽는 것도 좋지만, 책 곳곳에 큼직하게 자리하고 있는 100여 개의 칼라 사진을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관광지 여행엽서와 똑같은 구도의 사진도 있고, 그 쪽 사람들과 밀착해 있지 않고서는 포착키 어려운 라틴아메리칸들의 일상도 엿볼 수 있다. 손호철의 말마따나 엄청난 돈과 시간이 있지 않고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니, 사진이라도 열심히 봐두어야겠다.

    손호철 교수와 함께 여행한 이는 라틴아메리카 파시즘 연구자인 이성형 교수다. 이 교수는 이미 몇 년 전에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창작과 비평, 2001)』를 내놓았는데, 같은 사물을 보았을 두 사람의 느낌과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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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손호철은

    화가를 꿈꾸다 부모의 반대로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했지만 ‘선배를 잘못 만나’ 운동권이 되는 바람에 8년 만에 졸업장을 땄다. 동양통신(현 연합뉴스)기자로 일하던 중 광주학살에 대한 언론검열에 저항해 제작거부운동을 벌이다 유학을 떠났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오랫동안 비정규직 강사 생활을 했다. 전남대 교수를 거쳐 현재는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정치연구회 회장, 진보학술 동인지 <이론>대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민주노총 정치위원회 자문위원장을 지냈고, <진보평론> 공동대표, 진보넷 참세상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정치학의 새 구상』, 『전환기의 한국정치』, 『해방 50년의 한국정치』 등이 있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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