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훈은 한미FTA를 말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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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28일 11: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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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이 신작 장편을 펴냈다. 전작 『칼의 노래』 『현의 노래』에 이어 이번에도 역사물이다.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이를 피해 임금이 남한산성에 갇혀 지내다 결국 적 앞에 머리를 조아린 치욕의 병자호란 한 대목을 『남한산성』은 호명한다.

    왜 병자호란이며 남한산성이어야 했는가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옛터가 먼 병자년의 겨울을 흔들어 깨워, 나는 세계악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무참하였다.”(‘하는 말’ 중에서)

    세계악, 약소한 조국의 운명?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를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곧바로 김훈 특유의 화법은 이어진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룰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가령 『남한산성』은 한미FTA에 대한 작가의 문학적 사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남한산성』은 이른바 ‘참여문학’인 것일까?

       
      ▲『남한산성』 김훈 (학고재)
     

    소설 『남한산성』에는 시종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것은 작가가 택한 상황이 원래 위급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위급함을 위급한 것으로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겨냥하고 있는 진짜 과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 안에서 적과 싸우자는 자/논리와 적과 화해하자는 자/논리가 부딪치는 장면을 보자.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 전(戰)이고,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지키는 것이 수(守)이며, 화해할 수 없는 때 화해하는 것은 화(和)가 아니라 항(降)이오.”(p.142)

    “화해할 수 있을 때와 화해할 수 없을 때를 말하고 또 성의 내실을 말하나, 아직 내실이 남아 있을 때가 화친의 때이옵니다. 성 안이 다 마르고 시들면 어느 적이 스스로 무너질 상대와 화친을 도모하겠나이까.”(〃)

    위 두 인용은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김상헌과 최명길의 발언이다. 그러나 두 인물의 ‘역사적 발언’은 곧바로 일종의 삶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발언’으로 확산된다.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갇힌 성 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p.142~143)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p.143)

    대의와 명분이라는 현실의 대립이 말과 삶․죽음의 길이라는 형이상학 차원의 대립으로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김훈이 장편의 재료로 고집스레 역사를 끄집어내는 의도가 아마 이것이리라. 소설가는 역사라는 텃밭의 정원사인 셈이다. 김훈은 아마 1급의 정원사이리라.

    그러나 그가 자신의 솜씨와 심미안과 세련을 과시할수록 독자로서 헛헛해지는 대목은 더 커진다. 나는 예전에 김훈의 소설을 두고 ‘실패한 모노톤의 복화술’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까닭은 김훈의 소설에는 그의 문체만 도드라질 뿐 그가 만들어낸 작중 인물들에게서 정작 살과 뼈와 피가 없다라는 것을 지칭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작중 인물들이 모두 같은 어조로 같은 고민을 같은 스타일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김훈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김훈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번 소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 주장을 다시금 되풀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 『남한산성』의 끝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남한산성』의 끝은 지극히 김훈다운 인물인 대장장이 서날생의 몫이다. 서날생은 말 그대로 장인의 경지에 이른 천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비극의 톤이 시종일관 관통되고 있는 소설 전체를 통틀어 그가 유일하게 ‘웃는 존재’가 된다라는 사실이다.

    “서날쇠는 뒷마당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 뿌렸다. 똥물은 잘 익어서 말갛게 떠 있었다. 쌍둥이 아들이 장군을 날랐고,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내 왔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를 초경을 흘렸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중에서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서날쇠는 혼자 웃었다.”(p.363)

    이것이 대의와 명분, 말과 삶․죽음의 길의 싸움을 겪은 후 맞는 최후의 풍경이다. 거기에는 흙이 있고 불이 있고 육체가 있다. 지극히 김훈스러운 풍경이다. 아니 어쩌면 그 풍경은 김훈의 문학적 유토피아일지도 모른다. 김훈은 자신의 형이상학을 그 속으로 당겨서 부려놓는다.

    그렇다면, 그럼으로써 삶은 계속된다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것을 우리는 이른바 민중적 낙관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김훈은 민중의 현실을 결코 민중적 차원에서 말하지 않았다. 상황에 대한 형이상학적 언술을 시종일관 전개하다가 느닷없이 그 해결을 민중적 삶의 풍경 속으로 풀어놓을 뿐이다. 민중의 삶은 방목에서 발견되는 혹은 찾아지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살과 뼈와 피로써 함께 살 때 비로소 겨우 찾아지는 삶이다. “모든 문학은 참여문학이다”라고 말할 때에만 김훈의 『남한산성』은 참여문학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세계악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소설은 “무참하였다.” 김훈을 읽고 김훈을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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