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의 대중화, 대중의 진보화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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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26일 03: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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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보논쟁의 입장권도 없는 보통 ‘시민’의 발언

    노무현 대통령이 기존의 진보 세력을 교조적 진보로 비판하고, 자신을 유연한 진보라 자칭하였을 때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무자격을 준엄하게 비판한 바 있다.

    필자는 솔직히 요즘과 같은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스스로가 진보인지 중도인지 때때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산다. 아무튼 이 글은 확신에 찬 진보주의자의 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진보’를 대상으로 한 평범한 정치학 연구자의 인상적 관찰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2. 진보의 개념 규정

       
    ▲ 정상호 한양대학교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흥미로운 것은 1차 논쟁에서나 2차 논쟁의 참여자들이 진보가 무엇이고, 누가 진보인지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장황스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는 학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 이미 뚜렷한 외연과 내포를 갖는 실체적 개념인데도 말이다.

    비교의 관점에서 진보는 세 가지 차원에서 정립되어 왔다. 첫째는 평등주의, 노동계급, 분배정책을 중시하는 엄밀한 사회과학적 규정으로 좌파세력 및 사회민주주의 노선 일반을 지칭한다. 급진 좌파의 개념으로서 자유주의, 시장, 성장 중심의 우파와 명확한 대립 축을 갖는다.

    둘째는 1960년대 68혁명이 상징하는 것처럼 기존의 일체의 권위주의적 질서에 저항하였던 환경ㆍ평화ㆍ여성ㆍ인권ㆍ문화 등 신사회운동을 포괄한다(New left, progressive). 전자가 노동운동을 선두로 생산의 영역에서 집단ㆍ국가ㆍ권력의 정치라면 후자는 운동 사이의 어떤 위계와 중심도 부정하면서 소비와 여가의 영역에서 개인ㆍ시민사회ㆍ영향력의 정치를 추구한다.

    셋째는 각국의 정치 및 사회 상황과 맞물려 형성된 역사적ㆍ상대적 진보의 개념이 존재한다. 이념과 정책에서의 질적 차별성이 크지 않지만 미국의 민주당은 공화당에 비해 자연스럽게 진보 정당으로 인식되어 왔고, 한반도 분단체제를 지양하였던 DJ는 진보적 정치인으로 간주되어 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서구의 경우가 세 수준에서, 즉 정당ㆍ운동ㆍ역사 발전의 ‘교집합’으로서 진보 개념이 구체적으로 발전되어 왔다면, 분단조건 하에서 정당정치와 연대의 경험이 일천한 우리의 경우 합집합으로서의 확장적 진보 개념이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진보 개념에 대한 어떤 배타적 정의를 주장하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수준에서 사용하고 있는 지를 명확히 밝히면 그만이다. 이 글에서는 진보를 세 수준을 모두 아우르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3. 우리에게 없는 진보의 핵심: 실현가능한 진보경제학

    최근의 진보논의는 대중의 이해를 반영하지 못하고 참여 욕구를 유발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관념적 논쟁의 성격이 짙다. 이유인즉 진보를 엄정히 좌파로 해석하고 선명한 기치를 못 내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안적 출구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대중의 일차적 관심과 간절한 희망은 ‘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가 작동하면서 내 가족과 이웃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삶이 공존하는 소박한 사회’이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이러한 집단적 열망(elan)을 구현할 설계도를 ‘발전모델’이라 부른다.

    한국의 진보 발전모델이 없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정권(regime)들은 수명을 다하기까지는 그럭저럭 잘 작동되었던 발전모델을 내장하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발전모델은 단순한 경제학 이론이 아니라 다수 국민의 실질적 삶을 개선하는 동시에 노동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지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연합정치(coalition politics)의 실질적 토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적ㆍ녹 동맹을 구조화시킨 북유럽의 복지국가모델이나 미국의 뉴딜은 대표적 사례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민생고 해결을 혁명공약으로 들고 나왔던 박정희 정권은 신중상주의적 발전국가 혹은 개발독재라는 발전모델로 대중의 절절한 열망에 응수하였다.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대중경제론’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

    1971년 대선에서 등장한 DJ의 대중경제론은 자립적 국민경제, 한국형 혼합경제체제, 생산재 생산 공업의 선도, 특혜금융 폐지와 중소기업 금융정책의 우대, 근로자의 경영참여를 제도화하는 노동정책, 사회보장기금 신설(재정의 5%)의 사회복지정책, 지방자치와 대중 참여를 핵심 내용으로 하였다.

    대중경제론의 정치사적 의미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노선 즉 남북대결과 특권적 재벌 경제의 노선에 대항하는 유력한 진보적 대안이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한국 민주화의 경제적 이념으로서 오랫동안 중도개혁정당들의 핵심 정치 담론의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는 점이다.

    끝으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의 선택적 친화성과 상호 수렴을 통해 진보와 개혁, 제도 정당과 사회운동 세력이 합의ㆍ연대할 수 있었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경제학계의 최장집이 간절하다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세계화와 양극화의 조류가 한국사회를 엄습하기 시작하였지만 바로 그 순간 민주정부들은 정치적 지지를 극대화하고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는 사회발전모델을 방기하였다. DJ의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구체화ㆍ정책화로 진보하기는커녕 집권 1년 만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으로 퇴보하였다.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서도 통합적 사회발전모델의 부실은 오히려 심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장과 분배의 동반성장론은 국정운영 원리로 격상되지 못한 채 주변적 담론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문제의 본질은 세계화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의 불철저한 인식이나 정권의 보수적 성격, 진보의 명료한 개념 정립 따위가 아니다. 대중들이 강력히 바라는 것은 실존 차원에서 처음 겪는 오늘의 복합적 위기 상황에 대한 합리적 대안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첨단 지식정보화를 걷는 한국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마르크시즘이거나 또는 케인지즘이다. 정치학계의 원로 교수가 고군분투하면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담론을 통해 민주주의의 지평을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확장시켜 준 것처럼, 경제학계의 최장집이 간절하다.

    진보를 단지 저항적 비판자의 역할로 제한하거나, 이를 실현할 힘이 없을 뿐 이미 이런저런 청사진이 준비되어 있다는 반론은 옹졸한 강변이다. 실례로,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민주노동당의 정체성과 비전에 부합하는 핵심 정책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과문한 탓인지 어떻게 재정마련을 할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무상교육의 경우 자치단체의 비법정전입금이나 교육경비보조금의 확대를 언급하고 있지만 도대체 대한민국에서 여기에 소요될 엄청난 재원을 충당할 자치단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4. 반신자유주의 전선이 아닌 ‘진보의 개방전략’을 제시하라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수출주도공업화 반대,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WTO 가입 반대, 한미 FTA 반대 등등 한국의 진보세력은 집권세력의 개방노선에 늘 결사항전 전략(anti-strategy)으로 일관하였다.

    물론 거기에는 농어민을 대표로 하는 사회적 약자의 보호, 합법적 절차와 설득 과정을 거치지 않는 집권세력의 비민주적인 결정, 사회적 부담의 일방적 전가, 국가주권의 약화 등 정당한 저항의 철학과 근거들이 존재한다.

    다수 국민들은 한미FTA를 주권보다 통상문제로 인식

    그렇지만 이제는 개방 문제에 대해 반대를 넘어선 보다 적극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수차례 강요된 개방전략 속에서 단련되어 온 대중들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진보진영의 능동적 세계화 전략과 개방정책에 대한 합리적 대안제시를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개방의 파고 속에서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내던져졌던 다수 국민들은 오늘에 이르러 진보세력보다 예민하게, 역사적으로 구조화된 한국 국가의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을 인지하고 있다. 적은 내수시장과 자원부존의 개방형 수출경제라는 숙명적 조건과 세계화라는 거역하기 어려운 거시 조류를 분단된 한국의 운명으로서 체득하여 왔던 것이다.

    그간의 체화된 경험을 통해 다수 국민들은 FTA 문제를 국가주권의 결정적 훼손(미제의 식민지)보다는 통상 및 교역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비록 제한된 정보이지만 그들은 영민하게 한미 FTA가 자신과 국가경제에 미칠 손익계산을 따지며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는 정부와 다양한 이유에서 반대를 주장하는 강경운동세력 사이에 낀 말없는 다수의 바램은 협정의 불공정성을 시정하고, 완급을 조정하며, 사회적 통합성에 기여할 합리적 개방전략의 확립이다.

    그럼으로 현재의 한미 FTA 국면에서 농민의 자식으로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저항운동 전략을 짜내는 것은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유망한 대응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한국의 진보세력이 가져왔던 개방전략은 남북한 통합경제→동아시아 지역통합→동북아 공동체(다자안보공동체)의 비전이었다.

    그것은 합리적 대안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동북아의 불안정한 지역정세를 반영하여 구조적 취약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북한의 개혁과 남북한 경제통합은 북핵 문제에 봉착하여 주기적으로 단절되었으며, 유사한 산업구조로 인해 훨씬 높은 가능성을 가졌던 한일 FTA는 2004년 11월 6차 협상 이후 2년 넘게 중단되고 있다.

    진보적 개방전략의 구체적 내용 내놓아야

    진보진영은 그동안 공정무역을 지향하며 공공성과 국가주권을 존중하는, 그러면서도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와 외교안보 그리고 지역전략을 모두 포괄하는 대안적 개방전략을 주장하여 왔다. 그렇지만 그러한 진보적 개방전략의 구체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의 가능조건은 무엇인지, 그것이 양극화 해소를 포함한 포괄적 사회통합과 부응하는 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해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지금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진보 개념의 표준화된 이론적 정립이 아니라 대내외적 여건과 역량을 고려한 그리고 국민의 평균적 상식에 부합하는 진보의 진취적인(proactive) 개방 전략이다.

    5. ‘민중의 삶과 인민의 문제’에 대한 진보의 무감증과 신뢰의 위기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국면에서 진보진영은 지속적으로 이슈를 선점당한 채 수세적으로 몰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이 겪는 위기의 근원에는 국민 정서와 대중의 삶에 대한 무감증이 자리 잡고 있다.

    대학의 비정규직 시간강사로서 나의 첫 번째 고민은 어떤 형태이든지 다소 안정된 정규직으로의 진입이다. 가난한 학부형으로서 나는 현재의 학교ㆍ교사ㆍ교육시스템을 총체적으로 불신한다. 내 경험으로는 그것이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그들이 전교조이든 아니든 거기에 어떤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강북 모퉁이의 소형 아파트, 그것도 절반만 소유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몇 년 동안의 부동산 광풍은 21세기의 또 다른 혁명을 꿈꾸게 만든다.

    비정규직인 나에겐 호사스런 논쟁들

    정치학 연구자인 내개 있어서도 진보의 표준적 정의가 좌파냐 아니냐는 문제나 진보의 바람직한 구심점이 정당이냐 운동이냐는 논쟁, 그리고 참여정부의 성격에 대한 시비는 차라리 호사스럽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고용ㆍ교육ㆍ부동산 등 서민의 삶을 위협하는 민생 현안에 대한 아무런 해답도 비전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한국의 진보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된다. 민교협ㆍ전교조ㆍ민주노총ㆍ참여정부의 개혁파의 공통점은 취약한 대표성과 ‘안정된 정규직 집단’이 누리는 편협한 조직이기주의이다.

    민교협은 거시적인 사회적 현안에 대해 선도투쟁을 주도하여 왔지만, 그들이 비정규직 시간강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전교조는 3불 정책과 공교육의 획기적 강화를 외치고 있지만 누적된 교육모순을 타파할 구체 대안을 제시하는데 실패함으로써 학부모와 학생들의 신망을 잃고 있다.

    그들은 교원평가제와 방과후 학교를 지지하는 학부모들의 절박한 정서를 헤아리기보다는 정부의 간계에 놀아난 대중들의 무지로 폄하한다. 요약하자면, 한국의 진보는 민중의 문제, 인민의 문제를 신자유주의라는 무시무시한 리바이어던 탓으로 돌리는 데 너무 익숙해져 논란이 될 만한 어떤 정책적 처방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6. 진보의 대중화와 대중의 진보화의 선순환을 위하여: 국민적 관점의 진보

    생활정치의 핵심은 단지 노동이 아니라 대중의 삶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실용적 문제해결 능력이다. 이러한 관심과 능력의 집약적 표출은 저항적 사회운동이 아니라 정당과 정책이다. 선거 때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주기적으로 나서는 사회운동진영의 구상ㆍ포럼ㆍ연대와 같은 이벤트는 반정치적이며 진보진영 전체에 해악적 효과를 미친다.

    한국의 진보에게 요구되는 전략이자 덕목은 ‘국민적 관점’의 급진적 재구성이다. 진보진영은 최근 몇 년간 부동산문제에서도, 개헌문제에서도, 개방문제에서도, 분단과 평화문제에서도 지적ㆍ도덕적 헤게모니를 뺏김으로써 진보의 내적 성장과 사회전체의 진보적 발전의 계기를 잃어 버렸다. 남아 있는 유일한 기회는 교육문제이다.

    우리의 역량과 조건상 총체적 변혁노선의 설정과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자. 차라리 ‘기회균등을 보장할 교육혁명’을 실현할 합리적 프로그램 중심으로 진보의 역량과 지혜를 집중하자. 정당구조, 선거, 노동, 남북문제 등은 지역주의 대립과 계급 균열을 심화시킬 갈등적 이슈이다.

    총체적 변혁노선 설정, 설득 불가능성 인정하자

    교육은 30대에서 50대까지의 다수 세대, 서민과 중산층의 포괄적 계층, 노동계급과 신ㆍ구 중간계급, 농민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 이슈이다. 더불어 좌파정당ㆍ사회운동ㆍ개혁적 자유주의 정치그룹의 정책적 연대가 가능한 통합형 이슈이다.

    소위 한국역사상 가장 높은 교육수혜를 입은 386세대를 비롯한 진보진영은 그동안 이 문제가 지닌 고도의 복합성과 실패의 누적된 경험 때문에, 조기유학과 사교육이라는 너무나 신자유주의적인 개별적 탈출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공공성의 관점에서 집단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진보의 고유한 자세이다. 영어구사능력을 기준으로 선진시민과 이등시민이 구분되고, 사회적 자원과 가계소득의 1/4이 대학진학을 위해 소진되는 한국의 교육상황은 대중의 보수화와 진보의 구조적 정체를 악순환시키는 핵심 고리이다.

    다수 대중들에게 워싱톤 컨센서스나 신자유주의는 실감하기 어려운 타자(他者)의 언어이다. 차라리 교육과 같은 현실적 문제를 통해 신자유주의에 돌파구를 내고 진보가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생산적이다. 그 시작은 20세기 산업화 시대의 논리이자 오히려 실질적 문제해결을 가로막고 있는 무상교육과 같은 구두선을 폐기하고 지나치게 수세적인 3불 정책을 극복하는 것이다.

    창의적인 진보의 이니셔티브를 통해 대중의 합의를 창출하는 교육혁명의 과정은 진보 스스로가 창의적으로 변화하는 혁신의 과정이며, 정치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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