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남자의 팍팍한 서울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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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25일 07: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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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11월. 칼리와 함께 한국에 돌아왔다. 1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 아빠는 나보다 한 달 더 파리에 머물었는데, 이것저것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있기도 했지만, 결정적 이유는 내가 떠나올 때, 다신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셨던 엄마가 나와 칼리는 집에서 지내도 되지만 희완은 안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 만 한살을 맞은 칼리
     

    엄마의 한계 : 나와 칼리는 되고 희완은 안됨

    세 사람이 함께 살 집을 마련하고, 살림살이를 대충 마련할 때까지 희완은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다. 1년 전 다시 집안에 발들이지 말라고 했던 때에 비하면 놀라운 양보였지만, 엄마의 태도는 여전히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문제 제기 않고 주어진 만큼에 대해 감사하기로 했다.

    희완 쪽에서 먼저, 내게서 숱하게 들어온 내 엄마의 비타협적 성격과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에 갖는 대한 배타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문화적 차이’로 인정하고 넘어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희완의 식구들로부터 같은 대접을 받았다면 나는 어찌 했을 것이며, 우리 엄마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 아마도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거기서 끝이 나고, 나의 결정에 우리 엄마도 충분히 동의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희완은 엄마 집을 방문한 적이 없다. 친구들이 가끔 희완과 우리 엄마의 사이가 어떤지 궁금하다고 하면,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서로 접촉하는 일도 없지만 싫어하지도 않아.” 그 쿨함에 다들 기가 차 한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한 번도 얼굴을 안 본 것은 아니다. 집에서 지낸 아이 돌잔치 때 엄마와 희완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였다. 희완이 한국에 온지 3개월여 만이었다. 그날 잔치 중에 휭하니 나간 희완이 엄마, 이모, 언니, 나, 그리고 칼리로 이어지는 집안의 모든 여자를 위해 각각 난(蘭)을 하나씩 사서 선물하는 바람에 점수를 왕창 따기도 했다.

    오래된 이웃이라는 적

    희완이 가는 건 안 되고, 엄마가 오시는 건 괜찮고? 이상한 논리인 듯했지만, 생각해 보면, 엄마가 두려워하셨던 건 수십 년 동안 살아오셨던 동네 이웃의 수군거림이었던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시내 식당에서 치른 엄마 칠순에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 희완과 칼리, 내가 자연스럽게 초대되고, 모든 친척들 사이에서 희완의 존재를 편하게 대하셨던 것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 진다.

    내가 민주노동당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너를 알아본 곳이라면 거긴 분명 똑똑한 집단일 거다.” 라는 말로 흔쾌히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셨고, 엄마의 의식의 세계는 급속도로 확장된 바 있다.

    모녀의 정치토론은 거의 매일 밤 이어졌었다. 그리고 프랑스인과 함께 아이를 낳은 딸을 통해 엄마와 우리 가족, 심지어는 친척들의 인식의 세계까지도 순식간에 터부의 벽을 가뿐히 뛰어넘는 확장을 경험하게 되었으나, 엄마는 이웃 아줌마들이라는 가장 무서운 벽을 아직 못 넘고 계셨던 것이다.

    친척들 앞에 소문으로만 듣던 매우 이질적인 나의 가족이 등장하였을 때, 놀라울 만큼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화되었다. 결정적인 요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칼리였다. 아이라는 존재들이 보편적으로 지니는 경이로운 능력이 발휘되었기도 했고, 사교성을 타고난 칼리가 남다른 친화력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나와 평소에 거의 대화도 나누지 않던 외삼촌도 아이를 통해 나에게 반갑게 대화를 건네시고, 점점 멀어지기만 하던 사촌들도 함박웃음으로 칼리와 나를 대하며 아이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칼리가 파리에서 이어서 한국에서도 엄마의 비틀거리던 인간관계 회복에 한몫을 하고 나서주었다.

    듬성듬성 건너뛰는 그 난해한 애정표현

    나의 엄마는 한편으론 그 공식적인 박대가 미안해서인지, 희완이 뭘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 음식을 꼭 해서 주시기도 하고 겨울용 내복을 사서 전해주시기도 하셨다.

    이 이상하고 뜨뜻미지근한 애정표현에 희완은 더디고 굼뜨게 적응하고 있었다. 압축성장한 사회의 영향을 받은 한국사람들이 재깍재깍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후딱후딱 불필요한 과정을 제거하는데 능한 반면, 오랫동안 지구가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어왔던 제국주의 국가의 후예들은 성급히 스스로를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기보다 불편하더라도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려는 습관이 있다.

    한 박자 늦게 표현하고 가급적이면 직접적 표현을 피하는, ‘생콩’이란 별명의 우리 엄마의 무뚝뚝 스타일은 가까이 있는 내게 바로 옛기억을 불러일으켜, 파리에 있을 적에 쪼금 더 다감하고 표현적이었던 나는, 한국으로 오면서 친절하지 않은, 툭툭 던지는 터프한 방식의 표현을 선호하게 되었다.

    선문답 완전 불가능하고, 한마디 하면 척하고 새겨듣는 능력이 거의 바닥이며, 답답할 정도로 논리적 언어로만 일거수일투족을 표현해야 하는 입 아픈 구조의 표현방식에 익숙한 프랑스 남자에게 한참 에둘러 가는 한국식 표현은 대부분 난해한 농담으로 비칠 때가 많았다.

    당연히 애정표현이 배달사고를 일으키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한국이라는 사회, 지리적 조건과 지척에 있는 엄마라고 하는 환경이 내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여 나의 모드는 좀처럼 전환되지 않았다.

    한국사회에 자리잡은 감동적인 신인류 : 택배기사

    엄마가 미리 봐 둔 (새집증후군과 아파트를 피하다 보니 걸려든)낡은 단독주택을 별 고민없이 계약하고, 아이 때문에 바깥에 멀리 다닐 수 없어, 한 달에 걸쳐 인터넷을 통해 필요한 살림살이를 구입하면서, 매우 중요한 발견을 하나 하게 된다.

    불과 5-6년 사이 급속히 확산된 웹쇼핑 문화가 소규모 상인들을 잡아먹으면서 창출된 거대한 직업군 택배기사들의 세계가 그것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다른 직업에서 이 직업으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상처를 딛고 꿋꿋하게 새출발하는 이 시대의 한 아픔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보여준 성실함과 민첩함. 매번 느끼게 하는 그 조건없는 선의에 난 연속적으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편없이 싼 물건을 구입했는데도 배달과 설치, 뒷마무리까지 말끔하게 단시간에 해치우고, 툴툴 털고 다음 배달지로 향하는 이 사내들. 직업적으로 훈련된 것이라 해도, 짧은 순간에 이들이 꾸밈없는 인간미를 그토록 선명하게 전할 수 있었다면, 이건 단순한 직업의식일 수 만은 없었다.

    이들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마주치게 되면서 난 성급히, 이 사회에 대해 가졌던 내 비관적인 의견이 일부 수정되어져야 함을 느꼈다. 넥타이와 양복 속의 남자들이 여전히 근거없는 권위를 내뿜으면서 신자유주의를 맹목적으로 허겁지겁 쫓아가는 어리석은 존재들일 지언정, 필경 형편없을 노동조건에서 저토록 건강하고 심플한 여운을 남기는 체취를 지닌 사람들이 살아있다면 이 사회는 아직 얼마나 살만한가? 인터넷 쇼핑의 재발견이었다.

    세 사람의 한국살이를 바라보는 시선들

    칼리는 ‘어린이집’ 이라는 사회생활을 마치 평생 해왔던 일인 양, 첫날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잘 적응하더니, 한 달 만에 비공식적인 반장으로 등극, 1살 인생의 놀라운 성공신화를 보여주었고, 희완은 앞서 얘기했듯이 가사와 예술작업을 병행하는 새로운 패턴의 삶을 시작하였고, 나는 꺼두었던 연구원으로서의 시동을 걸며, 큰 걸림돌 없는 우리의 한국살이는 시작되었다.

       
      ▲ 칼리 돌날 집에서 찍은 가족 사진
     

    가끔 세 사람이 외출을 하게 되면, 지하철에서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동포들의 거북한 반응은 순혈주의의 강박이 깨지고 있는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성장통이랄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딘지 다르게 생긴 칼리한테 먼저 시선을 빼앗긴다. 그러다가 나와 아이 아빠를 차례로 보면서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여자들과 젊은 남자들은 그리고 나서 대체로 다시 칼리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아이가 몇 마디 한국말이라도 하게 되면, 거기서 완전 상황 제압이다.

    그러나 나이가 젊지 않으신 남자분들은 그게 잘 안되는 부류다. 마치 우리의 존재가 그들에게 불편한 질문이라도 던지고 있는 양, ‘저런 발칙한!’ 이런 표정으로 익숙하지 않은 트리오의 조합을 연신 시선으로 견제하신다. 어떤 분들은 대담무쌍하게 “사랑해서 결혼하신거냐” “행복하냐”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한다. 아이 아빠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데다 외국인이기까지 한 상황이 만들어낸 대범한 질문이다.

    어떤 초등학생 소년은 우리 세 사람을 연신 번갈아 보다가 매우 불만스런 얼굴로 “아줌마는 누구랑 결혼한 거에요?” 하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 아이에게 “아무하고도 안 했어.” 라고 대답하자 그야말로 그 아이는 똥 씹은 얼굴이 되기도 했다.

    간혹, 대낮부터 약간 취기가 있는 아저씨들은 거침없이 날 화냥년 취급하는 발언을 내지르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대낮부터 술을 마셔야 하는 예외적인 상황일 뿐이다. 뭐 이쯤이야. 생각보다 파란만장하지 않아서 실망스럴 정도인 사회의 반응은 대략 이 정도다. (익명의 <레디앙> 독자들이 내게 던지는 독설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

    애정결핍으로 쓰러진 희완

    문제는 또 이 사고뭉치 희완이었다. 어느 날 이 남자는 갑자기 숟가락 하나 들 수 없을 만큼 에너지 제로 상태가 되어버렸다. 한국 체류 6개월만의 일이었다. 지하철역에서 7분이면 걸어오는 집까지의 언덕길을 30분이 걸려서야 간신히 기다시피 왔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동안 내리 잠을 자기도 했다. 인근 병원에 가보았지만, 뚜렷하게 이상이 없었다. 줄 약도, 치료방법도 없었다. 고민 끝에 용하다는 한의원에 가게 되었다.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되었다고…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답변을 하면서 침을 통해 일시적으로 기운을 자극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아주 더디게 희완은 원기를 회복하였으나, 정상일 때에 비하면 여전히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렇게 속절없이 2~3주가 흘러가던 중 우리를 파리시절부터 잘 아는 친구와 통화하다가, 친구가 “희완, 애정결핍 아냐?” 하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건 의심할 바 없는 정확한 진단임을 알 수 있었다.

    희완도 물론 같은 생각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희완은 거의 나은 거나 다름없었다. 우린 원인을 알아낸 것만으로 기뻐서 얼싸안으며, 기쁨과 (내편에선) 미안함의 눈물을 흘렸다.

    아이와 일. 이 두 가지에 집중되어 있던 나의 관심은 희완을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게 했고, 마치 직장 다니는 남편이 집에서 살림하는 아내를 무슨 가구 대하듯 하는 현상이 이 집안에서도 벌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배달사고를 일으키는 줄 알면서도 터프 일변도의 표현을 고수해왔던 나의 소통방식도 적잖은 원인을 제공했을 터이다.

    물론 토론하기 좋아하는 희완의 요구에 의해 내가 하루종일 한 일, 한국사회의 정치이슈 등에 대해 대화가 오고 가긴 하였으나, 내 쪽에서 먼저 그가 하루 종일 뭘 했고, 어떤 새로운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그 작업들에 대해 내가 어떻게 보는지를 이야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던, 아내를 무급 가정부 취급하는 남편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웃을 때, 100%로 웃는 것처럼, 사랑을 할 때도, 마음 밑바닥까지 다 바쳐 사랑하고, 아침, 저녁으로 만나고 헤어질 때, 늘 다시 못 볼 것처럼, 그리고 10년 만에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열렬히 포옹하는 이 남자가,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길 거부하고, 결국은 나의 무관심 속에서 시름시름 시들어 가다가 마침내 몸져누워 버렸던 것이다.

    우린, 원인을 알아내고, 내가 잘못을 자각한 것, 그리고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풋풋한 연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난 것을 자축하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바로 외식을 했고, 희완은 금방 나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내린 처방은 매일 밤, 내가 그의 작업실에 들어가 그가 한 작업들을 보고, 내 느낌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1시간씩 갖자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작품을 할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할까, 내가 뭐라고 말할까를 그리며 작품을 만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희완은 완전히 아름답고 건강한 남자로 다시 태어났다.

    아…그러나, 나의 이 철썩 같은 약속은 한 달 정도 밖에 지켜지지 않았다. 그를 위해 한달에 두 번 정도 문화적인 외출을 만들어내는 정도가 지금 내가 그를 숨쉬게 하는 유일한 노력인 것 같다.

    희완은 그 사이 맷집을 좀 키웠는지, 모두가 바쁜 속에 애정의 촛불을 안 꺼뜨리고 잘 유지해 가는 일 따위는 사치에 속하는 이 사회에 조금은 적응했는지, 다시 그의 작업에 대해 내 관심이 뜸해진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아직 멀쩡하다.

    다시 그가 쓰러지기 전에, 아니면 그의 야들야들한 감성이 딱딱한 악어가죽처럼 두꺼워지는 불상사가 발생하기 전에 목수정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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