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것은 항상 헌 것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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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24일 05: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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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논쟁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갑우, 김정훈 교수의 인상처럼 뒷북치는 논쟁, 불임의 논쟁이었나. 장석준 실장처럼 영감보다 불만이 많았던 논쟁이었나. 이러한 평가들은 분명 나름의 의미 있는 지적들을 담고 있다.

    과연 뒷북논쟁, 불임논쟁이었나

       
      ▲ 이광일 / 성공회대 연구교수 (사진=참세상)
     

    하지만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말하기 이전에 미리 환기시키고 싶은 것은 필자의 기억이 미치는 과거의 그 어떤 시간부터 들어왔던 경제성장, 민족의 번영, 국가발전 등의 용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말을 했던 사람들의 후계자들에 의해 귀가 따갑도록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에 대해 누가 식상하다고 말하는가. 오히려 그 향수에 더욱 열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비해 진보 혹은 좌파의 언어, 개념이 이 사회에서 시민권을 얻게 된 것은 얼마나 되었나. 그럼에도 이리저리 뒤틀린 상처투성이의 언어를 부여잡고 치유하고 씨름하는 것을 접어둔 채, 벌써 그것에 식상해한다면, 구갑우 교수가 날카롭게 지적한 대로 애초 불투명한 진보의 미래는 더욱 짙은 안개 속의 풍경으로만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최장집, 손호철, 조희연 세 분의 토론과 논쟁은 신자유주의자로 전화하였음에도 ‘진보’의 끝자락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 노무현 대통령의 주관적 의지가 맞물리면서 과잉 증폭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것이 단지 뒷북을 울리거나 불임의 토론과 논쟁이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 세 분의 토론과 논의에 대해 이미 구갑우, 김정훈 교수 그리고 장석준 실장이 상이한 시각의 비판적 관점에서 평가하였기에 필자는 그것이 남긴 긍정적인 점을 지적한 후 몇 가지 쟁점과 관련하여 ‘진보논쟁’과 ‘그 후’의 논지들에 동의 혹은 비판하면서 필자 나름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우선, 최장집 교수의 경우, 그 적실성 여부를 떠나 현실의 문제에 대해 무게 있는 발언을 계속 해왔으며 이번 진보논쟁도 그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그의 발언에 의해 첫 단추가 끼워졌다.

    최장집-손호철-조희연 논쟁의 의미

    우선, 그의 정당정치에 대한 강조는 정당민주주의가 착근되어 있지 않은 한국의 상황에서, 특히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민주노동당 안에서조차 대통령후보 선출을 둘러싸고 설왕설래 진행된 개방형경선제 논의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정당민주주의에 대한 낮은 이해수준에 비추어 볼 때, 여전히 깊이 음미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그 후’의 구갑우 교수 글에서 ‘정치와 운동은 다르다’라는 주장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개진되고 있다. 다른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핵심요인이라는 점을 집요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정당정치에 대한 그의 강조는 단지 보수정치학의 또 다른 언술 정도로 치부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80년대 말부터 한국의 민주주의를 논의하는 가운데, 계속하여 ‘계급환원주의’를 비판해 왔으며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일관된 비판은 어떤 논자에게는 다소 의아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후’의 김정훈 교수 논지와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난다.

    필자가 판단하건데 최장집 교수의 지적은 김정훈 교수가 말한 “자본주의는 1주1표, 민주주의는 1인1표”라는 주장을 넘어서고 있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를 과연 ‘1인1표’로 규정하는 것이 최적인지 여부는 좀 더 논의해 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단순히 ‘1인1표’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것이 의미 있는 기제로 작동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역으로 그 장애는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훈 글에 회의적인 이유

    이 지점에서 최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우회하여 이 문제가 해소될 수 없음을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다. 김정훈 교수 또한 PD, NL에 대한 비판을 통해 ‘계급환원론’, ‘민족환원론’을 비판하고, ‘1주1표의 자본주의와 1인1표의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을 문제시하고 있지만, 그의 글 어디에도 이러한 류의 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굳이 그의 답을 유추해보자면 신자유주의만이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는 원인이 아니라는 주장 정도를 끌어 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과연 얼마나 생산적인가 자문할 때, 그것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반론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필자의 평가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최장집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질문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의 이러한 질문과 해답의 모색은 그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비판사회과학자, 비판정치학자들이 과거부터 고민해 왔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핵심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뒷북을 친 것이라거나 불임일 수는 없다.

    물론 이미 오래 전 <경제와 사회>를 통해 IMF이후 ‘자유주의 좌파’, 즉 민중지향적인 비판적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신자유주의로 전향했음을 날카롭게 밝힌 바 있는 구갑우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진보논쟁’은 분명 뒷북을 치는 면이 없지 않다.

    더욱 발본적인 손호철 

    하지만 그 후계자들이 지금 ‘신자유주의 경쟁국가’를 완성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최 교수의 주장 혹은 ‘진보논쟁’은 뒷북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손호철 교수는 최장집 교수와는 상이한 지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최 교수가 제기한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더욱 천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가 신자유주의 반대와 한미FTA 반대를 동일시하지 않고 그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발본적이다.

    이것은 구갑우 교수가 말한 한미FTA 반대세력의 이질적 다양성을, 그리고 지금 한미FTA에 대한 찬반 여부가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을 위한 중요한 하나의 준거가 되고 있는 정치현실을 고려할 때 중요한 화두임이 분명하다.

    나아가 그는 최장집 교수의 ‘한나라당 집권론’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들에 대해 (신)자유주의정치세력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야당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으로 그것을 옹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런 비판들의 저류에 흐르는 수구집권이라는 “두려움의 동원정치”를 넘어서자고 역설하고 있다.

    필자는 최교수의 ‘한나라당 집권론’은 그 자체로 크게 문제 삼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당정치의 룰에 주목할 경우, 이러한 주장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점에서 손교수 주장에 동의한다. 이에 대해 김정훈 교수가 ‘진보무능론’이 아니라 ‘수구무능론’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반론을 펴고 있지만, 그것이 ‘노무현 정권=진보’라는 수구정치세력의 담론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의미 있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필자는 자유주의정치세력과의 분리와 자립이라는 진보운동의 목표가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번 대선이 그러한 흔들림의 마지막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기에, 손교수의 주장이 ‘익숙한 것’으로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조희연 논의의 중요성

    마지막으로 ‘진보논쟁’을 논쟁으로 확대, 심화시킨 매개자인 조희연 교수의 경우, 급진민주주의의 입장에서 기존의 논의들과 실천들을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 실천의 수준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그의 ‘보수, 중도, 진보’에 근거한 현실진단에 대해서는 장석준 실장처럼 진보의 내포와 외연, 즉 그 실체 여부에 주목하면서 좌파의 대중적 부각을 막고자 하는 ‘중도개혁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갈 수 있고 그것은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필자가 조 교수의 주장에 더욱 주목하는 이유는 비록 상이한 지점들이 존재하지만 구갑우, 김정훈  교수도 지적한 바 있는 다양한 가치들, 운동들의 교호와 연대의 가능성은 ‘급진민주주의’를 매개로 해서만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더욱 커다란 장애는 이러한 주장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말로는 급진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실천하지 않는 많은 ‘진보적 시민운동들’, 혹은 그에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이른바 ‘좌파운동들, 정치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는 세 분들의 토론과 논쟁이 뒷북을 치는 것이고 불임의 논쟁이라면, 과연 구갑우, 김정훈 교수의 주장은 어떤 점에서 앞서나가고 있으며, 생산적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구갑우, 김정훈은 앞서가고 생산적인가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두 분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도 크게 보면 90년 5월투쟁 이후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다가 이제는 일반화된 발상들, 논의들을 정리,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필자가 이렇게 다소 과도하게 평가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의 주장과 비판적 지적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논쟁’을 이끈 세 분들의 토론과 논쟁 또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두 분의 비판적 지적은 나름의 그럴만한 근거에 입각해 있지만, 다른 한편 두 분의 글을 읽으면서 드는 느낌은 과거 80년대 이후 급진운동의 이론적, 실천적 폐해의 그림자에 너무 눌려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인상이다.

    아마도 그것을 증폭시킨 것은 민주노동당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당혹스러움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두 분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변화하는 현실에 적절히 조응하지는 못할지라도 진보이론, 진보운동 또한 변해 왔다는 점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 인색할 필요 또한 없다고 본다.

    이제 ‘그 후’의 필자로서 역할을 할 차례이다. 이미 감지했겠지만 필자가 후술할 내용 또한 어떤 새로운 주장이나 영감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다만 필자는 ‘진보논쟁’과 세 분의 ‘그 후’를 참조하고 동의, 비판하면서 정치와 운동의 문제, 신자유주의 문제, 그리고 민주주의 문제로 압축하여 나름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물론 이 세 문제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운동과 제도정치의 과도한 대치

    첫 번째, 필자가 ‘진보논쟁’과 ‘그 후’를 지켜보면서 가장 우려한 것은 운동정치와 제도정당정치를 대치시키며 그 어느 것을 과도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흐름이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근대 부르주아사회가 만들어낸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형태분리라는 구조의 반영물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 운동은 상이한 세력들이 쟁투하는 사적 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에서 벌어지며, 정치는 공적 영역을 상징하는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리고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비해 무언가 불완전한 것으로, 따라서 ‘공적인 것’의 스크린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 스크린 장치로서의 제도정당정치는 가장 중요한 핵심기제로 부상된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상황과 대면하게 만드는데, 그 역설의 비밀은 제도정당정치가 공적인 것을 담보해주는 핵심 기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그 내부에서 생산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즉 그 존재이유를 무언가 모자라고 열등한 것으로 설정한 시민사회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이 지점에 그 수많은 정당이 명멸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것’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필자가 이러한 모순을 새삼 강조하는 것은 근대의 산물인 정당정치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진보정치는 바로 이러한 모순구조를, 그리하여 자신들의 존재근거로부터 자립하고자 하는 제도정당정치를 해소, 극복해나가는 것에 있음을 다시 한번 드러내기 위함이다.

    운동정치와 정당정치의 변증법

    물론 여기에는 진보정당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만일 진보를 자임하는 민주노동당이 이러한 구조를 해소, 극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분명 제도 내 진보정당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하지만, 그것이 진보정치 그 자체일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구갑우 교수가 ‘운동정치와 정당정치는 다르다’고 하면서 민주노동당의 정책정당으로서의 지향을 주문한 것에 대해 필자가 기꺼이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 우려하는 것은 그러한 차이와 정당정치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양자의 긴장과 모순을 지양하고자 하는 진보정치 본래의 시도를 가로막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필자가 과거 <레디앙>의 기고 글에서 최장집 교수의 논의를 보수적이라고 비판한 것도 운동정치와 정당정치의 변증을 간과하는 것에 대한 이러한 우려의 반영이었다(‘진정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위기인가’).

    두 번째, 신자유주의에 관한 이해의 문제이다. 조희연 교수가 ‘진보논쟁’에서 신자유주의로 포괄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주장했을 때, 김정훈 교수가 ‘정치는 신자유주의 반대 이상의 영역이다’라고 지적했을 때, 사실 이 언술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정치가 국가, 계급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은 뿔란차스나 푸코 등 그 동안 국내외의 많은 논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수용, 확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이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이 사회 다양한 영역의 사회관계들을 무한경쟁의 자본과 시장의 논리로 재구축하고자 하는 발상,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 또한 결코 낯설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문제 우회할 수 없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반대’라고 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연대의 모색 문제와 접점을 형성할 때, 이러한 규정은 필자에게 오히려 부차적이다. 필자가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신자유주의가 그 자신만이 현실을 구성하는 의미 있는 유일한 실체라고, 그리하여 여타 사회관계들은 그것을 우회하거나 그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관계들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다양한 진보들은 어디에 존재할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지금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것은 여러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냐 아니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어떻게 유보와 우회가 있을 수 있는지 과문한 필자는 알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이런 신자유주의가 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지구적 수준, 지역 수준, 국가 수준에서 거대한 권력망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우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반대가 이른바 계급운동, 계급정치만의 과제일 수 있는가.

    필자가 최장집 교수의 논의에 주목하는 것도 그의 인식,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그가 이 두 가지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한편으로 계급운동, 계급정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성장해온 ‘진보적 시민운동’의 계속되는 주춤거림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비판은 그에 관계하는 많은 분들이 지금 ‘신자유주의 반대’만으로는 안된다며 ‘새로운 중도’를 내세우는 정치세력화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동안 시민운동은 계급운동, 계급정치가 운동의 중심을 자임하며 자신들이 모든 가치판단과 실천의 유일한 준거임을 내세우는 패권적 행보를 보여 왔다고 비판해 왔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의미 있는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그러한 독점적 발상과 행태의 전형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야말로 그 화신이 아닌가.

    중도정치 표방세력들이 반성할 점

    그런데도 ‘신자유주의 반대’에 대해 머뭇거린다면, 그 행태는 많은 시민운동이 ‘이중 잣대’를 가지고 문제의 핵심을 흐리거나 부정하는 것이라고밖에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민운동, 나아가 중도정치세력화를 시도하는 분들은 더욱 철저히 스스로를 반성,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계급운동, 계급정치의 차원이 아니라 지금 시민운동 스스로가 연출하고 있는 아이러니이기 때문이다. 왜 신자유주의 앞에만 서면 그렇게 작아지는가.

    다른 한 가지 문제를 더 짚고 넘어가자. ‘신자유주의 반대’의 협애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평화문제’를 거기에 끼워 넣는 발상, 논의들을 발견하곤 한다. 과연 신자유주의와 평화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것이 단순한 시장법칙이 아니라 ‘무장한 세계화’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는 사실은 접어두더라도 이 사회를 ‘20 대 80의 사회’, 아니 ‘10 대 90의 사회’로 분절시키는 것은 과연 평화와 무관한가. 동일한 생산현장 안에서 동일한 학력을 지니고 동일한 생산성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양산하며 차별하고 인간 이하의 이주노동자를 양산하는 것은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 아닌가.

    구갑우 교수의 표현을 빌려 평화를 힘의 정치를 원칙으로 한 국가 사이의 게임을 넘어서는 확장된 시각에서 접근한다면, 신자유주의가 지구적, 지역적, 일국적 수준에서 심화시키는 사회관계들의 분절과 파편화야말로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커다란 근인은 아닌가.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신자유주의를 평화와는 거리가 있는 그 무엇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발상과 시도에는 그것을 사회관계들을 구성하는 현실적 원리로 보기보다 단지 ‘경제적인 문제’로 제한하고자 하는, 혹은 그것을 ‘계급의 문제’로만 이해하려는 협애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협애한 인식은 평화이외에 환경‧생태문제 등과의 관계를 살필 때에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항상 복수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 문제이다. 필자가 이해하는 민주주의는 항상 복수이며 그것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동일성’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긴장과 모순의 사회관계들로 구성되는 역사 속에서 이 동일성은 실현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기존의 비대칭적, 억압적, 배제적인 사회관계들을 해소, 극복하면서 그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운동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런 ‘인민주의적 민주주의’의 계보를 잇고 있는 것이 조희연 교수가 언급하는 급진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운동은 국가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구갑우 교수에, 그리고 민주주의를 운동으로 규정하는 김정훈교수에 동의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이 지점에서 필자가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그 하나는 민주주의는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을 해소,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다양한 형식을 통해 구현될 수 있으며 절차적 민주주의, 특히 그 핵심이라 할 정당정치는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여러 수단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런 맥락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와 대별되어 무언가 우월한 것으로 설정되는 ‘실질적 민주주의’도 크게 보면 민주주의로 다가가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물론 구갑우 교수의 주장을 참조하면 생산, 소비 등 어떤 영역의 사회관계들을 더욱 우선시 하고 그것의 해소, 극복을 위해 집중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른 하나는 최소한 ‘진보논쟁’과 ‘그 후’에서 다루는 민주주의는 급진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운동들, 제도정치세력들을 전제로 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민주노동당과 급진민주주의

    그렇다면 하나의 예로 민주노동당은 급진민주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필자는 구갑우, 김정훈 교수가 지적한 대로 민주노동당이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급진민주주의에 역행한다고 보지 않기에 신랄한 비판을 전제로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운동이든, 소수자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진보정당이든 억압과 배제, 차별의 사회관계들을 재생산하고자 하는 발상과 시도에 대해 연대하여 비판하고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도와 제도 밖에서 진행되는 정치, 즉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편으로 김정훈 교수가 진보를 ‘사회적 약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관점 및 운동’으로, 그리고 ‘진보는 민주주의자이다’라고 했을 때, 거기에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 당혹스러운 것은 다양한 수준에서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신자유주의 반대’에 대해서는 왜 그처럼 ‘까칠한 반응’을 보이는 지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 지점에서 필자는 시민운동에 대해서보다는 오히려 진보정치세력, 특히 민주노동당, 한국사회당 그리고 ‘노동자의 힘’ 등이, 장석준 실장의 표현대로라면 좌파정치세력이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급진민주주의는 시민운동보다는 계급운동과 더 친화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민운동들이 급진민주주의를 자기 것으로 삼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지만 말이다. 조희연 교수가 시민운동의 급진성 회복을 계속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 일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의미 있는 운동’ 혹은 ‘정치적인 것’으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중도정치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급진민주주의를 주장하며 한국의 진보지식인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는 샹탈 무페가 블레어와 대처를 비판하며, “급진적인 것은 권력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기에 중도에 위치할 수 없으며…. 신자유주의와 그것이 억압하는 집단들 간의 타협을 설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은 음미할만하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한국사회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중도정치’는 무엇을 위한 것이며 그 끝은 어디인가.

    이제 다소 지루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필자는 대중을 맹신하지도, 그들을 비하하지도 않는다. 필자 또한 어떤 지점에서는 대중이기 때문이다. 김정훈교수의 표현대로 “대중은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다.”면 더욱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진보는 기존의 지배적 관계를 옹호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기에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보수, 수구정치세력에 열광하는 대중들 말이다. 그 설득의 과정은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들 보수, 수구의 언어, 개념이 아니라 진보의 그것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항상 강조하지만 그들의 정치, 운동, 민주주의, 국가 등에 대한 언어, 개념은 참조는 될지언정 진보정치의 교과서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의 언어와 개념을 현실 속에서 뒤집어보고 분해하고 다시 재구성하는 작업은 진보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는 <레디앙>의 어느 기사 제목처럼 예수와 같은 ‘쉬운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가 쉬운 말을 사용했는지 필자는 알지 못하나, 중요한 것은 그의 말에는 수고하는 자들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는 실천이 항상 동반되었다는 점이다. 대중과의 실천을 동반하지 않는 모든 진보적 발상과 논의가 ‘쉬운 말’을 생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서구 좌파운동의 역사가, 그리고 80년대의 한국사회의 급진운동이 확인시켜준 교훈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였는데도 대중이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방도가 없다. 계속 말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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