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속으로 들어간 '문화의 집'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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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26일 10: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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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버지니아 텍 사건을 둘러싸고 생산된 많은 이야기 중에서 <오마이뉴스>에 실린 정신과 전문의 조중근 박사의 글이 주목된다. “감당 불가능한 분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이를 표현할 마땅한 방법을 몰랐었기 때문인 것 같다”는 지적에서 특히 ‘표현’이란 단어가 중요한 것 같다.

모든 예술은 ‘표현’ 또는 ‘언어화’라는 점에서 이미 지난 일이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조승희가 내면의 들끓는 감정과 충동을 예술적 표현을 통해 분출할 수 있었다면 조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애드가 앨런 포우 같은 독특한 스타일을 지닌 소설가가 됐을지도” 모를 것이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나 조승희같이 어려서부터 아무 말을 안 하는 성격의 경우 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그의 가족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그를 방치했던 것 같다. 미국 학교에 있다는 상담실도 최적의 대안은 아닐 수 있다.

조승희만이 아니라 문화적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미국의 많은 한인 1.5세의 청소년들이 겪을 수 있는 문제는 인류학적, 문화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예술가들이 더 잘 도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과정에서 받게 되는 상처의 치유는 원래 종교의 영역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청소년의 경우 스스로 종교를 찾아 치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것은 드문 일이다. 오히려 교과서적인 공자 말씀을 전해주는 성직자나 교사들의 말은 그들의 분노와 좌절을 더 깊게 만들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생각나는 것이 ‘문화의 집’ 사업이다. 이 사업은 노무현 정부 이전에 이미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수용으로 우리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들어 놓은 김대중 정부 시절에 도입된 것으로 알고 있다.

‘문화의 집’은 유럽에서 68혁명 이후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이 지방 곳곳의 ‘동네 속으로’ 들어가 진보적 가치관 즉 ‘모든 사람들을 인간답게 살게 한다’는 정신을 조용히 문화를 통해 대중 속에서 실천한 운동이다.

이 운동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삶의 결의 소중함을 대중들이 스스로 깨닫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는 예산 지원만 하고 모든 운용은 민간 전문가들이 자유롭게 하는 데 성패가 달려있음은 물론이다.

현재의 ‘FTA’ 정부에서 모든 것을 무료로 서비스하는 ‘반신자유주의적’인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정책적으로 중시되고 중요하게 진전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문화의 집’ 사업을 미국의 한인사회에 수용하도록 추진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크다고 본다.

무엇보다 미국적 삶의 방식은, 필자가 살아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통계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불행한 조승희도 외로움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이렇게 내성적이고 고립된 청소년들이 ‘문화의 집’에 가면 들어가자마자 누구의 지도를 받거나 대화를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냥 즐기면 된다. 처음에는 그냥 한번 가보다가 자주 들르다 보면 조금씩 적극적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거나 시집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악기를 다루거나 소그룹 활동에 참여하거나 인터넷을 하며 각종 문화 예술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한국의 문화재나 역사 등 한국 문화 정보만이 아니라 미국의 다양한 문화 예술 정보와 세계 곳곳의 여행에 대한 정보를 준비하여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에는 실제로 여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터넷의 동영상을 통해 가상적인 여행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특히 현실에서 ‘도피’하도록 부추기는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라 현실을 ‘성찰’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는 다양한 영화들을 대하게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자연스럽게 미국 또는 한국에 거주하는 정신분석 의사나 전문 예술인들과 일대일 대화를 인터넷으로 하게 하면 자신이 ‘상담’ 받는다는 의식 없이 전문적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무료로. 이와 같이 자주 청소년들이 ‘문화의 집’을 이용하다 보면 스스로의 적성을 느끼게 되고 부모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진로도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미국에는 원주민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남미에는 원주민들이 고유한 삶의 방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 많다. 이런 삶의 모습을 미국에 있는 한인 청소년들이 접하게 하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무엇이든지 거부하고 싶고 ‘다른 것’을 찾는 청소년들에게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안적 삶의 방식 예를 들어, 아시아나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의 ‘조합운동’, ‘생태적 소농 운동’, ‘대안적 대중매체 운동’ 등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전달해줌으로써 실제로 ‘다른 삶’이 가능함을 인식하게 해주는 것은 한마디로 영성적인 것이다.

클리프톤 로스에 의하면 “영성은 교회, 성당, 미사, 목사님, 신부님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에너지와 지성과의 접촉을 통한 재생의 내면적 과정과 관계 있다. 즉, 땅과 삶의 복잡한 관계망, 문화적 저항 등과 관계 있다”고 한다.

최근의 반 FTA국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상승했지만 연령별로 20대가 FTA를 제일 많이 반대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젊은 층의 변혁에 대한 기대가 중요하다.

미첼 발리보에 의하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양들이 고집 세게 자유를 원했다. 그래서 목동은 목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양들은 끈질기게 도망을 갔다. 그래서 목동은 개를 데려왔다. 많은 양들이 도망치려다가 다치거나 죽기도 했다. 그래도 자유를 원했다.

그래서 목동은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최면술사를 계약해서 양들로 하여금 자유롭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목동과 양떼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시간 앞에서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고 따라서 아무리 길더라도 잠에서 깨어나고 난 뒤 양들은 현실을 알게 된다. 모든 종과 인간의 역사도 세대를 통해 새롭게 재생된다”고 한다.

브라질의 경우 초등학교에서부터 철저하게 다양한 인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가지지 않게 교육한다고 들었다. 브라질은 백인, 원주민, 흑인, 동양인, 혼혈인 등 다양한 인종이 미국처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적으로 명랑하게(?) 삶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녀들을 조기유학 보내려거든 앞으로 21세기 후반기에는 미국보다 더 강대국이 될지도 모를 브라질로 보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물론 실제로 브라질과 남미 국가들이 앞으로 강대국 블록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미국식 리더십을 따르면서 – 예를 들어, 미국이 주도하는 ‘중남미 자유무역 협정’ 체결을 통해 – 강대국 또는 강소국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축으로부터 옆으로 비껴서 신자유주의에 맞선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남미 국가들이 추진하는 ‘남쪽 은행’(Banco del Sur)은 IMF와 세계은행에 잠재적 위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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