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1표의 궐기를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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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23일 11: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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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이른바 ‘진보’ 논쟁이 있었다. 논쟁다운 논쟁을 찾아보기 힘든 요즘 그래도 상당히 흥미로운 토론이기는 했다. 한데 필자는 거기서 흥미나 영감보다는 불만을 더 많이 느꼈다.

    특히 불만스러웠던 것은, 그 논쟁에 참여한 분들 모두는 아니지만, 가령 조희연 교수 같은 논객의 글에서 분명히 드러난 진영론적 문제 설정이었다. 그런 글을 보면 마치 한국 사회에 어떤 실체를 갖춘 ‘보수’, ‘중도’, ‘진보’의 삼대 진영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사진=레디앙)
     

    여기가 프랑스라면 모르겠다. 거기서는 이런 사고 전개가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니까. 이런 분류법으로 대선 주자들을 가리는 게 누구에게나 상식이니까. 그래서 중도파와의 동맹의 득실을 따지는 좌우파 유권자들의 전략 투표를 점치는 것도 그럴 듯하게 들리니까.

    하지만 이곳은 그곳이 아니고, 한국어의 세계는 프랑스어의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의 이 언어 세계에서는 ‘진보’라는 말만큼 혼란에 빠져 있고 실체가 불분명한 어휘도 또 없다. ‘진보’ 논쟁의 한 주제가 진보의 ‘위기’라는데, 도대체 위기에 빠질 ‘진보파’ 자체가 존재하는지 오리무중이라는 것.

    한데, ‘진보’가 안개에 휩싸여 있다면, 진보와 보수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저 ‘중도’라는 것도 결국 느닷없는 것이다. 삼각형의 세 꼭짓점 중에서 두 개가 온 데 간 데 없어진다. 말하자면 애써서 보수, 중도, 진보의 삼국지를 열 몇 권 분량으로 쓰고 났는데, 그게 다 싸구려 잡지의 귀신 목격담 같은 시간 낭비, 종이 낭비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의 ‘진보’ 논쟁은 그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구도를 잘못 잡았고, 화제를 잘못 잡았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 물음이 잘못 됐다. 물어야 할 것은 ‘진보는 위기냐’가 아니었다. 그런 걸 이야기할만한 ‘진보’의 축이 과연 이 사회에 존재하는지, 그것부터 따져야 했다.

    ‘진보’가 아니라 ‘좌파’를 묻는다

    사실 ‘진보’란 말도 워낙에 좀 답답한 물건이다. 필자 자신 ‘진보’정당을 자칭하는 당의 당원이고 또 그 말을 맨 앞에 내건 연구소의 직원이지만, 이게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는다. 이 말은 원래 은어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한 단어가 있지만,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신 쓰는 은어. 그래서 이 은어를 놓고 ‘00란 뭔가’ 식의 심오한 질문을 던지기가 좀 뭣하다.

    본래 ‘진보’의 자리에 들어가야 할 단어는 ‘좌파’다. 사실은 ‘보수-중도-진보’ 식의 삼각 구도를 이야기하는 입장에서도 말이 되려면 ‘우파-중도-좌파’라고 하는 게 더 맞다. 그런데도 21세기가 된 지 벌써 일곱 해가 넘는 지금까지 ‘좌파’보다는 ‘진보’가 통용되는 것은 한국의 정치 지형이 여전히 좌와 우를 이야기하기에는 어긋나는 대목들이 많기 때문이겠다.

    우리말고도 좌우 경쟁의 정치 구도가 성숙하지 못한 몇몇 나라들에서는 ‘진보’같은 유사 표현을 곧잘 쓰곤 한다. 미국이 그 한 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도 ‘진보’와 비슷한 ‘혁신’이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그러나 짝퉁은 역시 짝퉁 티가 난다. ‘진보’나 ‘혁신’이 꼭 그렇다. 물론 인간의 말이란 게 본래 다 현실의 풍부함에는 짝할 수 없는 것이기에 원래의 ‘좌파’나 대체어인 ‘진보’, ‘혁신’이나 불완전하기는 매일반이다. 또한 필자가 이 글에서, 앞으로는 ‘진보’ 대신 ‘좌파’만 쓰자는 쓸데없는 캠페인을 주창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00란 무엇인가’ 식의 사뭇 심오한 정체성 묻기를 하자면, 역시 ‘진보’보다는 ‘좌파’가 제 격이다. ‘진보’나 ‘혁신’은 우선 자본주의의 가치와 공유하는 게 너무 많다. ‘있던 것 대신 새로운 것’ 식의 이런 말들은 만델라와 옐친을 한 동아리로 만들고, 시장 경쟁에 살아남은 자본가의 모습을 정치의 세계에 중첩시킨다.

    이명박도 이런 식으로 따지면 ‘진보’적이다. 반면에 사회운동의 주요 기둥 중 하나인 생태주의는 ‘진보’나 ‘혁신’의 가치군과는 정반대되는 현상으로 분류되고 만다.

    ‘좌파’는 조금 다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말은 프랑스대혁명에서 기원했다. 이 혁명의 표어는 ‘자유-평등-우애’였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자유’를 배타적으로 강조한 인민의 대표들은 의석의 오른쪽에 앉고 ‘평등’에 더 무게를 둔 인민의 대표들은 왼쪽에 앉았다. 그래서 전자의 무리는 ‘우파’로 불리고 후자는 ‘좌파’가 되었다.

    괜히 세계사 상식이나 점검하자고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다. ‘좌파’란 단어에 선명히 새겨진 이상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그것은 바로 ‘평등’이다. 이 불굴의 가치가 두 세기 이상 인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스며든 정치적 명칭이 ‘좌파’인 것이다.

    따라서 ‘좌파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진보란 …’ 운운에 비하면 훨씬 더 간단 명료하게 과녁의 정중앙을 향한다. 그것은 평등한 인민의 세상을 만들려는 우리 시대의 꿈과 노력들을 드러낸다. 평등의 이상‘들’(이것은 이제 복수다)이 결코 굴하거나 후퇴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면서 또한 ‘우리 시대의’ 평등주의를 묻는 것이다.

    경계선을 말하기 전에 중심을 밝혀라

    프랑스대혁명 이후 평등의 이상은 가장 단순한 도식으로 표현돼왔다. ‘1인 1표’의 원칙. 누구나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안다. 그리고 이게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라는 데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헌법의 대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이미 실현되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4년마다 한 번씩 투표하는 것만 놓고 보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원칙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관철되어야 한다는 보다 높은 기준을 제시한다면 그렇게 말 못한다.

    요즘 마치 고대 사회의 신전이나 성소(聖所) 같은 대접을 받는 ‘기업’의 현관문에만 들어서도 상황은 전혀 다르다. 그 안을 지배하는 것은 ‘1인 1표’가 아니라 ‘1주 1표’의 원칙이다. 보다 많은 주식, 즉 사적 소유권을 지닌 자가 더 많은 권리를 행사한다.

    노동자가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이 회사 저 회사를 팔고 사며 회계 장부의 가상공간에서 맹활약하는 자들이 누리는 권리에는 결코 미칠 수 없다. 사적 소유권을 지닌 ‘1등 시민’들이 그렇지 못한 ‘2등 시민’들을 지배한다.

    일터에서 나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1주 1표’는 다만 ‘1원 1표’로 확대될 뿐이다. 자산 소유자들은 소득 또한 많게 마련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나마 안정된 일자리라도 없으면 끊임없이 소득 불안에 시달려야 한다.

    부유한 자들이나 그렇지 못한 자들이나 몇 년에 한 번씩 단 하루 단 한 차례는 주민등록증을 내밀 때마다 똑같은 한 명의 시민으로 계산되지만, 삶의 나머지 기나긴 시간 동안에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당신은 당신이 내미는 지폐의 양, 당신의 결제 한도에 비례해서 시민의 등급을 달리 한다.

    다시 먼 나라의 과거 이야기를 들먹여서 좀 뭣하지만, 프랑스대혁명 때부터 그랬다. 대혁명이 낳은 최초의 헌법은 1인 1표의 원칙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 헌법의 투표권 원칙은 정확히 1원 1표와 잇닿는 것이었다. 오직 일정 액수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남성들, 이른바 ‘능동 시민’들에게만 투표권이 부여됐다. 그 정도 세금을 낼 처지가 못 되는 ‘수동 시민’들은 명백히 ‘2등’ 시민일 뿐이었다.

    이 헌법을 만들고 통과시킨 혁명의 최초 지도자들을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자’라 부르지 않는다. 혁명 후 의사당의 오른쪽에 앉았던 이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명칭은 ‘자유주의자’다. 이 자유주의자들의 지배가 계속된 20세기의 전반부까지 수 세대 동안 1인 1표의 원칙을 헌법에 집어넣는 데에만 노동자와 여성들의 숱한 투쟁이 필요했다.

    결국 지금 이야기되는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자유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새로운’ 귀환일 뿐이다. 위의 도식을 따른다면, 1인 1표의 원리에 맞선 1주 1표, 1원 1표 원리의 재궐기다. 그나마 1인 1표의 제한적이고 형식적인 실현의 산물인 북반구의 복지국가와 남반구의 신생 민족국가들에 맞서서 그것을 되돌리려는 공세다.

    ‘진보’ 논쟁을 비롯한 최근의 토론에서 중요하게 이야기되는 게 바로 ‘반(反) 신자유주의’의 기준 문제다. 그러면서 ‘한미 FTA’ 이야기도 나오고, ‘비정규직 입법’이나 ‘주택 문제 해결’이 화제에 오른다.

    틀린 이야기도 아니고, 방향이 어긋났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뭔가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강한 의혹이 있다. 신자유주의가 1주 1표, 1원 1표 원리의 확장 운동이라면, ‘반신자유주의’는 당연히 인민의 삶 모든 영역에서 1인 1표의 원리가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1주 1표, 1원 1표의 벽을 넘어선 1인 1표 원리의 확장 운동, 즉 자유주의를 넘어선 민주주의의 확장 운동이어야 한다(이 확장 운동을 일컫는 고전적 명칭이 ‘사회주의’다).

       
      ▲ 과거와 현재의 투표장 풍경 (사진=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지금 가장 먼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이 대명제다. 이것이 ‘반신자유주의’의 핵심이면서 또한 ‘좌파’의 심장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 시대 평등주의의 양보할 수 없는 지향들을 뽑아내야 한다.

    세 가지 가장 중요한 지향을 들자면, 우선 소수가 아니라 다수 인민이 사회의 자원과 성취, 가능성들을 <소유>해야 한다. 그럴 방도를 찾고 그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소수가 아니라 다수 인민이 그 자원과 성취, 가능성들을 <계획>해야 한다. 그럴 수단을 만들고 그것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은 인민이 스스로 <통치>함을 확인하고 그 권능을 행사해야 한다.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이고 그것을 부르짖어야 한다.

    ‘한미 FTA 반대’도, 그 밖의 다른 기준들도 이런 확인 과정의 한 결론으로 도출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한데, 많은 논자들이 ‘신자유주의’를 마치 정체 모를 암흑의 힘쯤으로 설정해놓은 뒤에 현실의 이러 저런 정치 세력들을 이름 붙이거나 분류할 기준으로 ‘한미 FTA’ 등을 돌출시킨다.

    거기에 애초부터 어떤 노회한 노림수가 담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결과가 무엇인지만은 분명하다. 정치의 계절마다 출몰하는 우리의 현자들께서는 한국 정치의 지도 위에 저들 마음대로 경계선을 쭉 그어놓고는 이 편과 저 편 그리고 또 다른 편 사이의 합종연횡의 셈법을 들이댄다. 그래서 이 편은 ‘진보’가 되고 저 편은 ‘중도’가 되며, 둘은 ‘합해야만’ 할 운명이 된다. 저들이 말하는 ‘역사’의 요구에 부응하려면.

    결국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의 핵심은 흐려지고, 그와 함께 ‘진보파’도, 좀 더 정확히 말해 ‘좌파’도 초점을 잃는다. 아니, 어떤 실체로 등장할 기회를 상실한다. 인민이 소유하고 계획하며 통치해야 한다는 가장 급박한 목소리는 다시 한 번 그 발언자를 확보하지 못하고, 1인 1표의 궐기는 또 한 번 연기된다.

    2007년에 해야 할 것 – 궐기자의 ‘가면’을 만드는 일

    최근 미래구상 등 일각에서 중도와 진보 사이의 선거연합, 더 나아가 둘 사이의 연립정부가 왕왕 이야기된다. 어쩌면 이게 ‘진보’ 논쟁에 참가한 일부 논자들의 논리의 종국적 귀결점일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작금의 이 선거연합론, 혹은 연립정부론이야말로 한국 사회 민주화 과정의 특징적 양상 중 하나인 ‘변형주의’의 최종 완성판이라 본다. 변형주의가 뭔가? 지지 기반이 취약해진 지배 체제가 저항 세력의 일부를 흡수하여 그 기반을 확대하는 정치 행태를 말한다. 19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현상이고, 그래서 이탈리아 맑스주의자 A. 그람시가 정치 분석에 즐겨 사용한 용어다.

    1987년의 ‘절반의 혁명’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변형주의가 끊임없이 시도되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지금 자칭 타칭 ‘중도’라고 일컫는 세력이 뭔가? 수 차례 변형주의의 계기들을 통해 정치권에 ‘수혈’된 세력의 집적이 아닌가? 그래서 자산 소유 계급 중심의 제한적 민주화 과정의 정치적 대변자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요즈음 이 중도 세력이야말로 자체 위기의 한 복판에 있다. 마치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급진 부르주아(자코뱅)처럼 자산 소유 계급의 노골적인 이기주의와 인민 대중의 불만 사이에서 짓이겨지고 있다.

    다만 200년 전의 중도파는 이 현실의 맷돌에 빨려들어 가면서도 끝까지 영웅적인 몸짓을 과시한 반면, 지금의 자칭 중도파는 이미 한 쪽 편을 선택하고는 다른 한 쪽을 끊임없이 기만하고 회유하려 든다. 이 점에서 사실 이들에게 더 적합한 명칭은 ‘중도’라기보다는 ‘신우파’ 혹은 ‘2세대 우파’다.

    그들 자신 변형주의의 산물인 이들 신우파는 자신들의 위기를 다시금 변형주의적 책략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게 바로 ‘진보’를 향해 내민 선거연합론이고 연립정부론이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마치 ‘진보’를 띄워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히려 이런 제스처야말로 지금 ‘좌파’가 인민 대중 사이에서 실체로 등장할 가능성을 차단할 가장 효과적인 기제가 되는 것이다. 이 논리 속에서 이른바 ‘진보’는 어디까지나 ‘중도’, 즉 신우파의 재확장을 위한 지렛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 좌파의 과제는 자신의 맨 목소리로 인민과 만나는 일이다. 자신의 영혼을 확인하고 자신의 육체를 갖추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정치적 전환점에 가장 긴박하게 답해야 할 물음은 ‘어떤 정치적 게임을 벌일 것인가’, 아니면 ‘얼마만큼의 현실 정치 지분을 목표로 삼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궐기>를 준비할 것인가’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 이야기 하나 하면서 끝맺고자 한다.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라는 영화(다음의 내용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께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 파시스트 체제가 된 미래의 런던에서 홀로 지배자들에 맞서 테러를 감행하며 봉기를 선동하는 ‘V’라는 인물에 대한 영화다.

    V는 종교개혁 시기에 영국 하원 의사당을 폭파하려 했던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다닌다. 그리고, 마치 수백 년 전의 가이 포크스처럼, 파시스트 체제의 꼭두각시가 된 하원 의사당을 폭파하겠다고 예고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정된 폭파일 전에 그가 가이 포크스 가면들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는 것이다.

    왜 하필 ‘가면’일까? 오랫동안 가면은 얼굴을 가리는, 즉 진실을 가리는 허구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영화에는 이런 상식을 깨는 단서가 담겨 있다. 주인공 V는 파시스트들의 감옥에서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릴 수밖에 없다. 그가 자신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은 그 상처 난 얼굴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선택한 가이 포크스 가면을 통해서다.

    예고된 폭파일에 사람들은 V의 가면을 쓰고 의사당 앞에 모여든다. 파시스트 체제를 숨죽이며 인내하는 데 익숙하던 사람들이 그 가면을 쓰고는 반란의 주역으로 거리에 나선 것이다. 가면들은 다 비슷비슷하지만 어딘가 조금씩 다르게 느껴진다. 이렇게, ‘다름’이 제 자리를 잡는 것은 ‘닮음’을 확인하는 순간에서다. 영화의 마지막, 혁명의 순간에 사람들이 서로의 ‘닮음’을 확인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들을 하나의 힘으로 결집시킨 것은 다름 아닌 V의 ‘가면’이었다.

    2007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가면’을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 저마다 사연 있는 고통과 좌절의 행로를 걸어온 사람들이 그 고통과 좌절이 보편적인 것임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벼려 새로운 현실의 도래를 앞당기는 것은 익숙한 맨 얼굴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가면’을 통해서다.

    그것은 이념일 수도 있고, 폐부에 박히는 몇 마디 말일 수도 있으며, 어떤 정체성일 수도 있고, 뇌리를 사로잡는 사건 혹은 행위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역사의 보편성은 우리 쪽에 있다는 확신을 줄 그런 ‘가면’이 필요하다. 그것이 있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 곁의 타인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고, 그와 함께 한 방향을 향해 나란히 설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궐기를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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