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명 살해만큼 '잔혹한' 신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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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20일 09: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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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버지니아 공대에서 32명을 살해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은 범죄자….

    마치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현실로 나타나자 신문들은 연일 온갖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사건과 정보, 해석을 제공하는 것은 신문의 본령이지만, 문제는 신문보도 자체가 사건보다 더 영화스럽고 잔혹하다는 사실이다.

    목과 머리에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사진 그대로 게재

    "너희는 오늘을 피할 수 있는 천억 번의 기회와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너희는 내 피를 흘리게 했다.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한 가지 선택만 남겨놨다. 결정은 네가 했다. 이제 네 손에는 영원히 씻기지 않을 피가 묻었다."

    "나쁜 XXX들. 너희는 내 마음을 파괴하고, 영혼을 강탈했다. 너희 때문에 나는 예수처럼 약자를 위해 죽는다."

    "너희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 벤츠, 금  목걸이, 보드카와 코냑, 그리고 유흥과 환락으로도 부족했는가, 속물들아. 그런 것들도 너희 욕망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 조선일보 4월20일자 2면  
     

    20일자 아침신문들에 일제히 보도된 내용들이다. 조승희 씨가 1차 범행 직후 NBC 방송사에 소포를 보냈다는 사실은 새로운 것이다. 그러나 신문들이 여과 없이 조씨의 발언을 인용보도하고 총을 들고 과시하거나 망치를 들고 있는 사진, 자신의 목과 머리에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사진 등을 꼭 내보냈어야 했을지 의문이다.

    신문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를 연상케 하는데, 우선 각 신문의 1면 제목만 살펴봐도 흥행을 노리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당신들이 빈 라덴처럼 내 인생에 9·11 테러"> (조선일보)
    <"벤츠-코냑-금 목걸이로도 부족한가"> (동아일보)
    <비틀린 증오 세상을 쐈다>(경향신문)

    사정이 이렇다보니 <부유층 증오…계획범행인 듯>(서울신문) <동영상 일부는 6일전 제작 "계획범행">(한국일보) 등의 일반적인 제목이 밋밋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조선일보는 2면 관련기사에서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조씨가 살해현장에서 신원을 은폐하기 위해 권총번호를 지우고 신원확인을 못하도록 얼굴을 쏴 자살했다는 내용을 싣기도 했다.

       
      ▲ 중앙일보 4월20일자 1면  
     

    이문열이 범죄심리 전문가?

    중앙일보는 소설가 이문열씨에게 조씨의 범죄에 대한 자문을 구해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중앙일보는 1면 <"자신만의 내부적 악마 키웠다 예수 흉내냈지만 종교성 빈약">에서 이문열씨와의 일문일답을 실었다. 이씨가 이번 참사와 관련해 1면에 등장한 이유를 신문에서 찾자면, 그가 "인간의 종교적 속성과 구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 작가"라는 점과 2006년 최근작 <호모 엑세쿠탄스>가 ‘처형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라는 점, 그리고 그가 미 보스턴에 체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기사에서 △조승희씨를 호모 엑세쿠탄스로 볼 수 있을까 △조씨가 십가가 위에서 모욕당하고 결박당한 기분을 아는가라고 표현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참사를 예방할 수 없었을까 등의 질문을 던졌다. 이씨는 "호모 엑세쿠탄스는 구체적 현실의 삶과는 무관하게 자기들의 책무(처형)에 매진한다"며 "조승희가 종교적으로 미친 것 같지는 않다…그는 어떤 자신만의 내부적인 악마를 키워왔다"는 정도의 일반적인 답변을 했다.

    비극엔 빠지지 않는 게임·영화·영웅담

    중앙일보는 또 조씨의 범죄의 원인 중 하나로 게임을 지목했다. 중앙일보는 "조승희는 카운터스트라이크 등 폭력성 있는 게임을 즐겼다"는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를 인용하면서, "NBC 방송을 통해 공개된 범인 조승희의 사진 중에는 검은 색 티셔츠에 카키색 조끼를 걸친 모습이 있다. 어깨에는 탄창을 두르고 있다. 손가락이 나오는 반장갑을 끼고 양손에 한 자루씩 권총을 들고 있다. 이는 카운터스트라이크 게임에 나오는 전투원의 기본 복장과 유사하다"고 보도했다.

    기사 옆에는 게임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함께 "정교한 3차원 그래픽이 지원돼 게이머가 가상공간 속에 진짜로 들어가 있는 듯 느낀다" "이 때문에 북미와 유럽 젊은이들에겐 스타크래프트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웅담도 빠지지 않는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에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 당시 옆 건물 있던 한 재미교포 교수가 웹캠으로 범죄현장을 중계하는 기지를 발휘했다고 부각시켰다. 조선일보는 <옆 건물서 학교 웹사이트로 생중계 / 한인 교수 기지 발휘 학생들 대피시켜> 제목으로, 중앙일보는 <한인 교수 기지가 제자들 살렸다>는 제목으로 이를 보도했다.

    ‘한발 물러선’ 동아일보

       
      ▲ 동아일보 4월20일자 8면  
     

    동아일보는 오늘자(20일)에서 ‘한발 물러선’ 보도태도를 보였다. 동아일보는 조씨의 사건을 크게 부각시킨 신문들과 차별되게 1면 머리기사로 환란충격을 회복하고 출산률이 3년 만에 반등했다는 내용의 <IMF세대 ‘뒤늦은 웨딩마치’>를 게재했다.

    또, 이번 사건의 보도도 에번스 리비어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의 인터뷰 <"위로는 필요하지만 한국이 수치심 느낄 이유 없어"> 제목의 기사를 A3면에 싣고 "이번 범죄는 문제가 있는 개인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이며 누구도 범인과 한국을 연관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A8면에 미 전국총기협회(NRA)에 쏟아지고 있는 총기규제 여론을 상기시키는 <"얼마나 더 죽어야 총기 규제할 건가"> 기사를 싣기도 했다.

    유럽언론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 의회가 총기협회 로비에 밀려 몇 년째 총기규제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한국언론들이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범죄 자체에 함몰돼 있는 건 아닌가라는 아쉬움을 그나마 달래주는 기사다.

    경향신문은 6면 관련기사에서 "유럽언론들은 미 언론들이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며 "미국 외에 모든 나라에서 총기 규제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 미국은 정작 눈을 감고 있다"는 BBC의 보도와 "콜럼바인 사건 생존자들의 지적대로 미국사회가 원인 제공한 부분을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르몽드 보도를 전했다.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지적이다. 이날 한겨레는 경찰종합학교 사격감독을 인터뷰 한 <권총 두자루로 대량살인, 그 비밀은>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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