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 불임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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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18일 09: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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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전제를 하자. 이글은 <레디앙>에 발표될 글이고, 나는 <레디앙>이 민주노동당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많이 찾아오는 매체로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진보논쟁 전반을 다루지만 특히 민주노동당에 관련된 문제를 다루려 하고, 그것도 까칠하게 다루려고 한다. 과도할 수 있는 주장에 대해 부디 관용의 정신이 발휘되길 기대해 본다.

정답만 있는 진보논쟁

   
  ▲ 성공회대 김정훈 교수
 

아주 시니컬하게 최근에 벌어졌던 진보논쟁을 요약하면, 난 그것이 불임(不姙)의 논쟁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논쟁의 범위를 어디까지 두어야하는지 곤혹스럽기는 하지만, 논쟁의 촉발자이며 주도자였던 최장집, 조희연, 손호철 교수의 논지로 한정한다면 내 논쟁의 후기는 ‘다 맞는 말씀이기는 한데,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지’이다.

세 분이 모두 동의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 혹은 진보가 위기라는 것이고, 그 위기의 원인은 정당정치의 부재와 그로인한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 및 실질적 민주주의의 미성숙 혹은 후퇴라는 점이다. 강조점은 다를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최장집 교수는 제도정치의 중요성을, 조희연 교수는 사회운동의 활성화를, 손호철 교수는 신자유주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주장은 아무런 주장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최장집 교수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아니라면 과연 새로운 정당이 어떻게 건설될 수 있는가에 대해 답했어야 했고, 조희연 교수는 재생산 및 분화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회운동이 어떻게 재활성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답했어야 했으며, 손호철 교수는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대의가 어떻게 국민적 수준에서 설득되고 실천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어야 했다. 정답은 있지만 대안은 없는 논쟁, 나는 진보논쟁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다.

물론 세 분의 역할은 정답을 제시하는 것에 그칠 수 있다. 진보논쟁을 시니컬하게 평가하는 것은 어쩌면 현실은 답답하고, 명확한 해법은 보이지 않는데 강호의 고수인 이 분들이 속시원한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한 투정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투정을 넘어 현실은 정답을 넘어서는 대안을 요구하고 있다.

진보란 무엇인가?

구갑우 교수는 진보논쟁의 쟁점을 첫째, 진보란 무엇인가? 둘째, 진보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셋째, 민주주의와 진보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로 정리하면서 진보논쟁의 풍부화를 시도하고 있다.

나는 구갑우 교수의 논지에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여전히 진보개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정치적으로 세련되며 대중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진보가 형성되어야 하고, 진보는 민주주의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래에서는 위의 논쟁점을 따라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진보는 상대적인 개념이고, 그렇기 때문에 운동적인 개념이다. 나는 ‘사회적 약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관점 및 운동’을 진보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논쟁적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는 당장 계급적 관점이 없다는 비판이 나올 것이다.

나는 계급은 형성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고, 굳이 좌파나 우파라는 개념이 아니라 진보라는 개념을 쓰는 것은 단순히 ‘친북좌파’라는 수구의 담론때문이 아니라 진보는 국면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계급 이상의 개념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둘째,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삶의 질은 단순히 경제적인 풍요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문화적, 생태적 가치를 포함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진보를 이렇게 정의하면 구갑우 교수의 말처럼 진보는 아주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되고, 누구에게 독점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또한 이렇게 다양하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운동적인 개념이다.

진보가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운동과 정치 혹은 정당은 다른 논리를 가진 영역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가 대의민주주의를 인정하는 한 운동의 논리와 정치의 논리는 다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진보운동은 진보정당의 정책으로 체계화될 필요가 있다.

진보정당은 다양하지만 진보적인 요구들을 정치적으로 조정할 임무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보정당은 진보세력 내에서 헤게모니전략을 구사하는 세력이다.

민주노동당은 정당인가 운동세력인가?

진보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진보세력은 누구인가? 사회운동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시민운동, 민중운동, 그리고 지역의 다양한 풀뿌리 운동이 진보세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사회에서 진보세력은 누구인가? 물론 민주노동당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만이 진보세력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계급 혹은 민족이라는 단일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진보세력은 민주노동당을 넘어 존재한다.

구갑우 교수의 문제제기를 더욱 급진화 시키면 민주노동당이 과연 정치세력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이 스스로 전선체의 일부로 자리매김한다면 민주노동당이 과연 정당인지, 운동세력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문제를 더욱 급진화시키면 ‘말해져서는 안될 금기’를 가진 정당이 과연 진보정당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더욱 까칠하게 말해서 민주노동당은 좌파정당 혹은 민족주의정당으로 규정할 수는 있지만 진보정당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수 있다.

너무 까칠했다. 나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진보세력의 헤게모니 정당은 아직 아니라는 점이다. 이점을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민주노총마저 독자대선후보를 검토한다는 소식이 들리는 시점에서 이 점에 대한 분명한 인정이 없이는 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의 도약은 힘들 것이다.

진보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구갑우 교수는 진보진영이 다음 선거에서 집권할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한다. 아마 민주노동당을 염두에 둔 주장일 것이다. 나는 민주노동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정의한 진보세력의 집권가능성에 대해서는 말한다면, 나는 적지만 가능성이 있고, 가능하다면 집권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진보개혁세력의 단일후보를 내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진보세력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사실상 대선과 관련하여 촉발된 논쟁이었고, 진보논쟁이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이와 관련된 진보논쟁은 대체로 참여정부 실패=진보세력의 무능=대안부재론과 그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선과 관련하여 볼 때 이 논쟁에서 주목할 지점은 대안부재론, 즉 구체적 표현으로는 한나라당 정권 용인론이다.

대안 부재론은 현실적으로 한나라당과 정책적 차별성을 갖는 동시에 현실적 집권능력을 가진 세력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부정적 답변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서 열린우리당은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인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할 능력도 없기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안부재론은 그 비판의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수구세력의 ‘진보세력 무능론’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도덕적이지만 무능한 사람이 좋은가’ 아니면 ‘부패하지만 능력있는 사람이 좋은가’라는 세계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황당한 질문을 만들어낸 수구세력의 ‘진보세력 무능론’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대안부재론은 당연한 결론으로 나오게 된다.

질문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과연 대안부재론은 맞는 진단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수구세력은 한반도의 평화정착 문제를 진보세력보다 잘 해결할 수 있는가? 부정적이다. 그럼 수구세력은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인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조장할 것이다.

나아가 이 문제의 해결 없이 한국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은 가능한가? 이 역시 부정적이다. 결국 수구세력은 진보세력보다 더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를 침체시킬 세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진보논쟁이 생산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진보세력 무능론이 아니라 ‘수구양극화세력 무능론’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프레임에서 출발하면,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대안이 없는 세력, 혹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더 악화시킬 세력으로 수구세력이 인식될 수 있고, 따라서 수구세력은 보다 정확히 수구양극화세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

‘수구양극화세력 무능론’에서 출발하면 ‘수구양극화세력 집권 망국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역으로 한나라당 정권 용인론이 아니라 대안 가능론 혹은 대안 필요론이 도출된다. 진보세력은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국민을 위한 대선승리의 역사적 의무도 있는 것이다.

‘수구양극화세력 무능론’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되돌아 볼 때, 다시 말해서 수구양극화 세력보다도 더 능력이 있으면서도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원인을 되돌아 볼 때, 진보세력은 진정한 자기 반성과 진보의 내용과 세력을 재구성 할 수 있다.

문제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제 중요한 문제는 진보세력의 대선전략이다. 나는 이번 선거를 통해 한국의 정치지형이 진보-진보개혁-수구보수나 진보-보수-수구보수로 재편될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이 모든 진보세력을 통합하여 진보-보수의 대립구도를 만들어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가능해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전자의 구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후자의 정치지형이 형성된다면 한국정치는 보수단일구조, 즉 일본화할 것이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를 통해 남미화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장기적으로 10년, 20년을 준비하자면 할 말이 없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전자의 구도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위의 분류에 따른 진보개혁세력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민주노동당의 문제가 아니지만, 진보와 진보개혁세력이 단일후보를 만들어내는 문제는 민주노동당의 전략적 선택의 문제다.

나는 민주노동당이 일정한 원칙하에서 선거연합에 참여하고, 선거연합의 승리를 발판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세력확대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정치지형의 형성에 있어서도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연립정권이지만 집권의 경험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확대할 수 있으며, 이것은 장기적으로 민주노동당 단독집권의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보는 민주주의자다

이론적으로 민주주의는 특히 정치적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확대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다. 자본주의가 ‘1주 1표’의 원리에 근거하는데 반해,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정치적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해왔고, 최근의 남미의 좌파돌풍은 사회적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제도임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촉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진보논쟁과 관련하여 두가의 함의를 갖고 있다. 먼저 한국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미FTA의 진행과정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임민주주의’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를 낳게 한다.

많은 논자들이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나도 이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제도 이상의 것이다. 최근의 한미 FTA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노무현 정권은 어느 정도 완성된 절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

이 점은 최근의 개헌논쟁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헌법이라는 제도도 중요하지만 제도의 실행 혹은 관행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개헌론’을 제기하기 이전에 사회적 개헌이 작동할 수 있는 역관계를 다시 한번 고려해 보는 것이 진보주의자의 관점일 것이다.

이 주장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갖는 또 하나의 함의, 즉 정치적 민주주의의 독자성, 정치의 독자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낳는다. 보다 단순하게 말해서 정치는 신자유주의 반대 이상의 영역이다.

정치는 신자유주의 반대 이상의 영역이다

대중들은 옆집 사는 민주노동당원이 싫어서 한나라당에 투표할 수 있으며, 심상정 의원이 여자여서 지지할 수 있고, 청계천에서의 ‘작업’의 성공으로 이명박을 지지할 수 있다. 정치는 신자유주의 반대로 해명되지 않는 복합적인 과정이며, 바로 이렇기 때문에 헤게모니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전략은 근본적으로 엘리트주의적이다. 대중에게 진리를 설득한다면 대중은 진리를 지지할 것이라는 엘리트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민주노동당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계급환원론 혹은 민족환원론은 그 징표이다.

계급적 관점 혹은 민족적 관점이 진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상황을 명확하게 읽을 수는 있지만 현실은 명확함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나아가 진리는 독점되지도 않지만, 진리만으로 대중이 설득되지도 않는다. 레이코프의 말처럼, 대중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다시 말해 대중적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대중의 생각과 대중의 언어로 접근해야 한다. 이점에서 진보가 보다 풍부해지고, 다양해져야 한다는 구갑우 교수의 말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진보 넘어서기

이제까지 진보논쟁을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앞에서 전제했듯이 까칠한 방식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과도한 비판일 수 있다.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기왕 까칠한 김에 끝까지 까칠해 보자. 진보논쟁을 검토하면서 내가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세대 차이였다. 특히 아직도 NL과 PD를 중심으로 진보를 설명할 때 나는 상당한 곤혹감을 느꼈다. NL과 PD가 제기했던 당대의 문제의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담론구도로 설명할 수 있는 현실이 극히 제한적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러한 담론이 유지되는 데에 대한 곤혹감이었다.

나를 더욱 황당하게 한 것은 한 토론회에서 민주노동당의 이러한 정파대립을 비판하자, 민주노동당의 당원인 한 토론자가 그게 무엇이 나쁘냐고 한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80년대에서 변한 것이 없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냐는 것이다.

맞다. 근본적으로 보면 한국은 여전히 분단국가이고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을까. 보다 근본적으로 NL식으로 북한을 인식하는 것이, PD식으로 자본주의를 인식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최근에 전시회가 열리는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불충분하다면 진보진영이 자주 인용하는 말도 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저 생명의 나무이다”. 진보는 운동이다. 따라서 진보는 끊임없이 진보를 넘어서야 한다. 그 불안한 선택이 진보가 근대의 적자임을 나아가 근대의 극복자임을 보여주는 징표이고, 진보가 진보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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