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댄 잘 가고 산 자여 따르라"
        2007년 04월 17일 08:23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허세욱 아저씨는 우릴 많이 도와주셨어요. 너무나 따뜻하고 겸손한 분이셨어요. 가슴이 너무 아프고 부끄러워요… 이런저런 핑계로 집회에도 못 나왔어요. 그런 저를 일깨워주시려고 그랬나봐요.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저 세상 가서 편히 계셨으면 좋겠어요."

    ‘진짜 노동자’가 무엇인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허세욱 조합원이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날, 한강성심병원 앞 촛불집회에 참가한 이지희(33) 씨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말문을 잊지 못했다.

    성공회대가 운영하는 사회복지기관인 ‘봉천동 나눔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그에게도,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린 아이들에게도 허세욱은 든든한 후원자였고,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 ‘진짜 노동자’였다. 전태일 열사가 시다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허세욱 열사는 붕어빵 한 봉지를 들고 나눔의 집을 찾았고, 어린이집을 다니곤 했다.

    이날 가족들은 허세욱 열사를 화장했다. 장례대책위원회는 시신 없이 18일 노동열사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가족들에 대해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어요. 누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 허세욱 아저씨도 그렇게 얘기하지는 않을 거예요. 말없이 우리가 장례를 치르면 되잖아요." 그의 눈에서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 16일 저녁 7시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앞에서 열린 ‘한미FTA 무효! 민족민주노동열사 허세욱 동지 추모문화제’에는 1천여명의 노동자가 참가해 고 허세욱 열사를 추모했다.
     

    "우리는 절박한 가슴으로 싸우고 있었는가"

    16일 저녁 7시 허세욱 동지가 끝내 숨을 거둔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앞.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노동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촛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500여명으로 시작한 ‘한미FTA 무효! 민족민주노동열사 허세욱 동지 추모문화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더 늘어나 천 명을 넘어섰다.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오종렬 공동대표는 "한미FTA를 폐기하라는 허세욱 동지의 유언은 범국본의 강령이요, 지켜야 할 생명"이라며 "오는 18일 허세욱 동지를 하늘나라로 보내기 위해 함께 모여 미국놈 앞잡이정권을 끌어내리자"고 호소했다.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은 "현장을 누비고 다녔지만 허세욱 동지의 백만분의 일도 하지 못한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며 "제대로 싸우지 못하면 깃발도 간판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허세욱 동지의 절박한 가슴으로 싸우고 있었는지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말없이 지켜보는 병원 환자들

    한강성심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는 많은 환자들은 병원 앞에 나와 촛불문화제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평소 같으면 격렬하게 항의를 했을 환자들인데도 이날은 모두들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화상을 입어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상도(40) 씨는 무대 옆까지 나와 휠체어에 앉은 채 문화제가 끝날 때까지 이 광경을 지켜봤다. 그는 "TV를 통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너무나 안타깝다"며 "목숨까지 버리지 않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서울 평화와통일을위한사람들 회원이자 허세욱 열사가 아끼는 후배였던 김슬기 씨가 연단에 올라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전국의 미군기지에 유골을 뿌려달라고 했던 동지의 한을 꼭 가슴에 뿌리겠습니다. 미군없는 세상에서 행복하시길…"이라고 말하자 다시 촛불문화제는 눈물바다가 됐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허세욱 동지는 한미FTA가 타결되고 비준되면 수많은 민중들이 죽음으로 내몰린다는 걸 아셨다"며 "그 노동자 농민의 울부짖음을 대신한 것"이라고 말했다.

    노래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허세욱 동지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방울을 떨궜다. ‘진짜노동자’ 허세욱 동지가 한 줌의 재로 산화한 날, 많은 노동자들은 부끄러움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외치고 있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