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와 운동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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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16일 01: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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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진보논쟁’이 한 차례 지나갔다. 노무현 정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2007년 대선에서 민주, 개혁, 진보 세력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등 정체성과 대선 전략이라는 실천적 문제를 놓고 진행된 논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비록 논쟁의 전개과정에서 일정한 문제점도 있었지만, 서로 다른 시각과 세계관이 공개적으로 노출됐다는 점에서 지난 1차 진보 논쟁은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의견들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 수 있다. 올해 대선 국면에서 진보진영과 민주노동당이 선택할 주요 노선에 대한 합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예컨대 진보진영 단일 후보 문제, 단일 후보의 선출 방식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레디앙>은 1차 ‘진보논쟁’의 의미와 성과를 되돌아보고, 진보에 대한 문제의식의 공유와 함께 대선 국면의 실천적 합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소장 학자와 현장 활동가들의 관련 논의를 이어간다.

    이번 기획은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부소장. 정치학)의 도움에 힘입은 바 크다. 1차 논쟁 역시 조희연, 조현연 두 교수의 도움이 컸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진보논쟁이 벌어지기 얼마 전, 한 자리에서 필자가 한반도 평화과정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자 한 분이, “진보세력은 누군가 말을 하고 나면 그걸 비판하려 하는 군요,” 라고 말을 던졌다. 일순 약간 당황하면서, “진보세력은 비판을 하면서 ‘동시에’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하려 한다.”는 답변을 했던 것 같다.

       
     ▲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 교수
     

    약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두 가지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하나는 새로운 길을 가는 것에 대해 누구나 심리적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사실이었다. 새로운 길이 여러 개 제시된다면, 심리적 불안과 더불어 선택의 혼란까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비판과 대안이 분리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진보세력 스스로가 둘을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라는 문제제기였다. 대안을 담고 있지 않은 비판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투정이다. 현상 변경을 지향하는 진보의 길이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보수의 길보다 근본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새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보의 길이 보수의 길보다 근본적으로 어려운 이유

    민주정부 하에서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최장집 교수의 문제제기로 시작된 진보논쟁은 백가쟁명으로 이어졌다. 이 논쟁은 지금 여기에서 진보의 목표와 거기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개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 진보세력이 사회운동의 형태로 등장한 이래로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민주화라는 대의가 ‘자폭의 논쟁’으로 가는 길을 막았을 뿐,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드러나듯, 한국사회의 성격과 변화의 방향을 둘러싸고 여러 운동세력이 대립을 거듭해 왔고, 지금도 그 흔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진보적 정치세력을 자임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웹 사이트 게시판에서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정치·사회세력들이 거듭해 왔던 오래된 그들만의 논쟁구도인 ‘자주 대 평등’의 대립을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최장집 교수의 문제제기에 대한 다양한 대응에 ‘진보논쟁’이란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일까. 진보를 자임해 왔던 세력들이 그 동안 서로 몰랐던 새로운 차이를 발견했기 때문일까.

    진보진영의 ‘뒷북 논쟁’

    논쟁의 초기 참여자인 최장집-조희연-손호철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든, 노무현 정부가 진정한 진보 정부인가 아닌가가 논쟁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회세력의 일부가 참여하고 있는 현 정부가 지지층의 요구와는 달리, 마치 스스로가 보수정부인 것처럼 시장만능적 경제정책을 통해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즉 그들 모두 민주화 이후 20여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서 진보란 양극화의 해소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는 장단기 방법에 있어서는 세 분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차이가 세 분의 논쟁을 진보논쟁으로 부를 수 있는 적극적 이유이기도 하다.

    논쟁의 핵심은, 첫째 진보라는 목표의 실현을 위해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둘 가운데 어느 것에 강조점을 둘 것인가,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둘째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진보세력의 목표는 무엇인가, ‘상대적’ 진보정부의 창출에 기여할 것인가 아닌가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논쟁이 세계화 운운하던 1990년대 초중반이나 늦었더라도 1997년 IMF 위기 직후에 벌어졌다면 적절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논쟁은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된 이후에 진보세력이 벌이고 있는 ‘뒷북논쟁’이다.

    이 논쟁은 1987년 이후 선거로 집권한 민주정부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노무현 정부의 임기를 1년여 정도 남겨 놓고 완전히 좌절된 상황에서 터져 나온 진보세력의 ‘위기논쟁’이다.

       
      ▲ 사진=연합뉴스
     

    진보의 진보를 위한 근본적인 질문들

    현실정치의 시각에서 이야기한다면 보수세력인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을 수 있는가 없는가, 또는 막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둘러싼 ‘반보수논쟁’이다. 자칫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쟁이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깊은 천착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고자 하는 진보논쟁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초기 논쟁을 심화하기 위해 2007년 2월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원회’가 개최한 민주진보진영의 2007년 대선전략 회의의 제목은 <위기의 진보진영, 대반전 가능한가>였다. ‘집권전략’이나 ‘대반전’이라는 말이, 지체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진보세력의 성찰과 혁신의 의지를 담고 있는 표현인지 의심스럽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회의에서 ‘진보의 다원주의’를 인정하면서 ‘진보의 진보’를 위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진보의 진보를 위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서구와 달리 민주화 이후에 정치경제적 자유주의가 등장했고 따라서 역사적 시각에서 본다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었던 자유주의적 가치의 확산이 평등과 연대의 가치와 충돌할 수 있음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분단체제라는 한반도 특수적 현상이 여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는 한반도 차원에서, 진보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한 진보논쟁이 필요하다.

    한 철학자의 말처럼 저항과 형성이 하나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김상봉, 『서로주체성의 이념』), 진보의 담론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오래된 질문들이지만 진보의 생존과 진보논쟁의 진보를 이제는 피해갈 수 없는 몇 가지 질문들이 있다.

    피해갈 수 없는 몇 가지 질문들

    첫째, 지금 여기에서 진보란 무엇이고 진보세력은 누구인가? 둘째, 진보를 실현하기 위해 진보세력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진보세력의 두 축인 진보적 사회세력과 정치세력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다수는 왜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진보적 정치세력을 지지하지 않고 있는가? 셋째, 민주주의와 진보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순서대로 이 질문을 둘러싼 논쟁점을 정리해 본다.

    첫째, 진보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서구적 근대의 산물인 진보개념이 발전개념과 등치될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 이유뿐만 아니라 사회적 양극화의 해소와 분단체제의 극복과 한국사회의 선진화 등등의 다양한 진보의 목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진보의 개념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윤해동, “진보라는 ‘욕’에 대하여”; 김기봉,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을 넘어서”).

    사실 이 주장의 이면에는 진보를 자처했기도 했고 언론에 의해 진보로 규정되기도 했던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반성이 자리 잡고 있다. 조금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정치·사회세력을 규정하는 개념으로서 진보개념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골프를 치는 노무현 정부의 아류인 자칭 진보 때문에 그 말 자체가 싫고 자신은 원래 좌파라는 규정을 선호했다는 생태주의자의 목소리가 있다(우석훈, “극우와 자칭 진보들의 ‘19홀 골프’). 진보가 비교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시각 차이를 지칭하는 좌우파가 진보와 보수보다 적절한 개념화라는 주장도 제기된다(김기원, “노무현 비난하면 면죄 되는가”).

    그러나 필자는 비교를 전제로 하고 있고 따라서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개념이기는 하지만, 진보가 지금 여기에서 저항과 형성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진보개념의 유용성을 인정하는 편이다.

    진보의 개념은 아직도 유용하다

    또한 진보는 전통적인 좌파를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좌파는 진보일 수 있지만, 진보는 좌파가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진보라는 이름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진보의 내용이다.

    한미 FTA에 대한 반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저항의 진보’는 현실에서 쉽게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한미 FTA에 대한 반대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삶의 형태’를 만들어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해소의 방법에 대해 다른 생각들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反) FTA 전선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 ‘안’의 미국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국가의 몰락과 지금도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회주의적 대안을 더욱 부정하게 만드는 북한의 존재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형성의 진보’를 상상하기 어려운 실정이지만, 그 한계 속에서도 우리의 질문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물론 진보의 미래가 설계도를 따라 가는 길이 아님은 분명하다. 자유의지에 기반한 윤리적 실천이 없이 진보적 미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야한 결정론과 다를 바가 없다. 물으면서 길을 갈 수밖에 없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만으로 진보의 내용이 채워질 수는 없는 일이다.

    한반도적 맥락에서 사회민주주의조차 대안적 의제로 설정하기 힘들게 만드는 ‘분단체제’(백낙청, “최근 진보논쟁서 정치·민생과 직결된 남북문제 누락”)를 고려할 때, 한국사회에서 진보의 내용 채우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저항의 진보가 형성의 진보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지속가능한 평화를 만드는 작업인 분단체제 허물기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고, 반대로 분단체제 허물기가 저항의 진보를 형성의 진보로 만들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한국적 진보의 내용을 복잡하게 만드는 변수들

    그러나 분단체제 허물기가 자본의 주도로 이루어질 때,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정당성이 강화될 수도 있다. 즉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남한의 미래 형태가 북한의 미래가 되고, 북한의 미래의 형태가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남한의 미래가 되는 형국이다.

    한국적 진보의 내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변수는 진보세력의 결집체인 한미 FTA 반대를 위한 ‘연대’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 연대에는 생산의 영역에서 진보를 추구하는 사회운동과 소비의 영역에서 진보를 추구하는 사회운동 그리고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사회운동이 결합되어 있다.

    흔히 민중운동, 녹색운동, 시민운동으로 부르는 사회운동체의 연대다. 여기에 민주노동당은 물론 열린우리당의 일부세력까지 참여하고 있을 정도다. 다양한 정치·사회세력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한국사회의 현실이 고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밥나라’, ‘김밥천국’이 되어 가고 있는 한국적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결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이 그렇게 간단한 것도 아니다. 김밥나라, 김밥천국이지만, 세계 어느 지역보다 IT가 대중의 삶에 스며들어 있어 최고의 테스트베드로 간주되고 있는 곳이 한국이기도 하다. 한미 FTA 반대에도 복잡한 한국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대부분의 진보세력이 FTA가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에 공감하지만, 그 이유와 더불어 여러 이유 때문에 FTA에 반대하고 있다.

       
      ▲ 사진=참세상 이정원 기자
     

    FTA를 반대하는 여러가지 이유들

    첫째 경제통합협정과 다를 바 없는 FTA 그 자체에 반대다. 이 세력은 크게 둘로 분화된다. 하나는 FTA에는 반대하지만 경제성장의 담론을 수용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로 FTA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경제성장이 삶의 넉넉함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둘째, 개방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FTA 추진전략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국제협상의 불공정이나 국내협상이 거의 없었던 협상과정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반대다. 두 번째 반대자의 경우 대부분이 경제성장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

    즉 FTA에 반대하는 진보세력 내부에는, 평등지향적인 사회정책이 담겨 있지 않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반대가 공유되고 있지만, 성장담론 대 녹색담론의 대립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대립은 진보의 궁극적 목표가 평등인가 자유인가로 비화될 수 있다.

    길게 본다면 불평등의 해소가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삶의 기초가 되겠지만, 생산영역에 기초하고 있는 불평등의 해소를 위한 사회운동과 소비영역에 주목하는 아름답고 자율적인 삶을 추구하는 (탈자본주의적) 사회운동이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세력이 모두 한 길을 갈 수도 없고 갈 필요도 없다. 진보의 길은 여러 갈래 길이다. 그 길의 끝에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연대의 가치는 중요하다. 서로의 문제와 문제의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연대야말로 평등과 자유와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진보를 묶어주는 끈, 사회경제적 불평등 비판과 분단체제 허물기

    지금 여기서 저항의 진보를 묶어주는 연대의 힘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생산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다. 분단체제 허물기에도 연대의 원칙이 관철되어야 한다. 한반도적 수준에서 반전·반핵·평화를 지향하는 분단체제 허물기는 그 비판이 저항의 진보를 넘어 다양한 형성의 진보로 나아가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이제 두 번째 질문들로 가 보자.

    임박한 대통령선거에서 진보정당이 집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저항운동을 통해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한 국가에서 진보정당이 10% 내외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진보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하는가를 논하기 이전에 지금 여기에서 진보정당이 시민·민중의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한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 이 설명이 없이, 반보수연합이나 진보대연합 운운하는 것은 정치적 소수의 생존전략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힘들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앞서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북한의 존재야말로 진보정당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에게 북한비판은 금기였고 지금도 그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을 때, 입장표명을 주저했던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진보정당의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으로서 북한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일구어간다는 대의에 진보세력의 누구도 반대를 하지 않겠지만, 그리고 그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진보세력은 적극적 역할을 해 왔고 앞으로도 그 일을 해야 하지만, 정치권력을 둘러싼 경쟁에 참여하는 진보정당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북한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기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의 미래에 대한 진보정당의 정책을 시민·민중은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진보정당의 정책으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의 저발전을 낳은 또 다른 원인은, 한국의 민주화를 추동했던 사회세력의 보수정당을 통한 정치사회 진입이었다. 민주화세력이 곧 진보세력으로 인식되던 시절에 자주 발생하곤 했던 이 영입사건들은 시민·민중이 보수정당을 진보정당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진보세력이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는 선택인 이른바 비판적 지지로 인해 진보정당의 저발전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 이후 진보세력의 비판적 지지론은 정치적 연합이나 정책연합이 아닌 투항과도 같은 것이었다.

    민주화 추동 세력의 보수진영 진입

    비판적 지지의 결과로 민주화세력의 일부가 정치권력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현실정치의 논리를 앞세우면서 보수화의 길을 걸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이 혼란이 언론과 정부 자신에 의해 더욱 증폭되었다. 노무현 정부와 진보가 동일시되면서 집권도 해보지 못한 진보세력이 무능하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개되고 있는 진보논쟁에서도 비판적 지지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반보수연합론은 비판적 지지의 변종이다. 진보세력이 분열하면서 각축하지만 막판에는 정치적 연합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주장(조희연, “연합에 앞서 분열하면서 각축하라”)도 시민·민중에게는 비판적 지지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진보적 정치세력의 중심이 되어야 할 민주노동당이 스스로 진보적 사회세력의 전선체 조직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또는 정치와 운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로, 진보적 정치세력의 지지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민주노동당이 정당이라면, 정치권력을 잡게 되면 무엇을 하겠다는 청사진과 그 청사진을 실현할 수 있는 정책 및 정책수단으로 승부를 해야 한다. 정치적 연합이나 정책연합은 그 다음의 일이다. 다른 어떤 정당보다도 민주노동당은 정책정당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제까지의 한국정당이 정책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민주노동당의 정책정당화는 제도정치 내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

    정치와 운동은 존재형태와 목표가 다른 실천행위

    이 지점에서, 운동정치의 활성화가 제도정치에서 진보적 정치세력의 지지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검토해 보자. 민주노동당이 제도정치에 진입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분명 사회운동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한 사회운동이 없었더라도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이었다면, 진보적 정치세력에 대한 요구는 증대했을 것이다. 오히려 강한 사회운동의 전통과 지금 여기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의 민주노동당의 지지도는 초라한 수준이다. 이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진보적 정치세력은 정치와 운동이 같은 것이 아니냐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치와 운동은 존재형태와 지향하는 목표가 분명 다른 실천행위다.

    사회운동은 차별을 받거나 차이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동기나 또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실현을 막고 있는 장벽을 없애기 위한 의도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운동의 정당성은 ‘자임’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에서 정당성은 ‘다수’를 획득하는 경우에만 얻어질 수 있다. 정치세계에서 활동하고자 한다면 다수를 지향하는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 존재론적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의 게임규칙을 바꾸기 위해서도 정치세계에서 활동하는 정당은 다수를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치와 반국가적 실천행위인 운동

    운동은 진지전이다. 운동은 삶의 양식을 바꾸고자 하는 실천행위다. 운동은 정치세계에서 권력을 잡고자 하는 실천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진보를 위한 권력일지라도 권력이 권력으로서 자립하게 되면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손호철, “반신자유주의 단일 전선으로” 참조).

    운동은 본질적으로 반국가적 실천행위다. 정치는 권력을 잡고자 하는 실천행위다. 즉 운동과 정치는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질 수밖에 없고 심지어는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동정치의 활성화가 진보정당이 권력에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진보정당 자신의 우리사회에 대한 총체적 전망과 미시적 정책이다. 더더욱 강한 사회운동이 ‘불가피한’ 이익집단운동의 길을 가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운동정치에 기대는 것은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다양한 사회운동이 반드시 민주노동당의 지지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들은 정책에는 주목하지만 정치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다. 만약 운동과 정치가 적절한 만남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홍성과 같은 ‘지역’에서 일 것이다. 현재 진행되는 진보논쟁에는 지역이 누락되어 있다.

    진보논쟁에서 누락돼 있는 지역 문제

    또 하나. 진보세력의 저발전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대중의 의식과 존재의 괴리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홍세화, “의식 수정 없으면 대안도 없다”). 대중이 더 고생을 해보아야 진보정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주장도 맥락을 같이하는 자조적 목소리다.

    전형적인 정치경제학 비판의 사고다. (근대 이후 이른바 의식과 존재가 괴리를 보이지는 않은 적이 있는가. 이 지면에서는 다루기 힘든 주제라 일단 비켜간다.) 사회경제적 상태와 정치적 지지가 조응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매개하는 관념과 실천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의 형태를 띠는 ‘근대화된 빈곤’으로 인식될 때(김종철, “지금,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무엇인가”), 대중은 그 문제의 근원을 제도보다는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강하다.

    정치경제학 비판과 더불어 ‘심리학 비판’과 ‘윤리학 비판’이 필요한 이유다. 진보세력은 대중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진보적 문학세력이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작가인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신파지만, 정치적 건강성과 공공성을 가지고 있고(김명인, “문화를 읽어주는 남자: 공지영 신드롬”), 대중은 그것을 보고 감동을 느낀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착하게  살자"는 보수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있는 것일까. 진보세력은 그만큼의 감동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진보가 일상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진보의 ‘몸’은 거기에 가 있어야 한다. 진보의 윤리학에 대한 문제제기다. 예를 들어 진보가 살아가면서 해야 할 100가지를 만들어 보자. 연대의 삶 속에서 정신을, 이념을 일구어내야 한다.

    이제 마지막 질문으로 가보자.

    노무현 정부와 민주주의 그리고 진보의 관계

    노무현 정부의 부침은 민주주의와 진보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이미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는 비아냥이 들리기도 한다. 올 것이 온 셈이다. 보수와 진보의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은 분명 갈린다.

    보수가 민주주의를 대의제 민주주의의 틀 속에 가두려 한다면, 진보는 삶의 모든 영역에 민주주의를 심고자 한다.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대는 진보의 과정이자 ‘목표’다.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대가 목표라고 이야기하면, 좋다 그렇게 살면 좋긴 하는데, 그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느냐는 반응을 만나게 된다.

    민주주의와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해 원론적 이야기를 할 지면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있다, 없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유동하는 다양한 대답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험을 돌이켜 보자. 1997년 IMF 위기나 한미 FTA 협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의 부재는 삶을 어렵게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민주화의 동력이었으면서 동시에 경제성장의 기초였음을 증명할 수는 없을까.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의 경험을 보면서 노동자의 경영참여와 같은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실현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삶의 넉넉함을 제공할 수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 가치 폄하되면 반동의 시대 올 수도

    노무현 정부는 우리에게 민주정부 하에서 삶의 넉넉함이 실현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역설적 결과는, 보수세력이 지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빈곤 때문에 발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가 자유민주주의조차 쓰레기더미에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까지도 있다(박석운, “지금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할 때다). 민주주의의 가치가 폄하될 때, 정말로 원하지 않는 반동의 시대가 올 것이다.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국적 민주주의’의 불가능이다. 국가 밖의 적을 상정하는 국가안보담론이, 국가 밖의 변화에 대한 강조인 지구화담론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진보세력의 국제관계론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보세력도 국제관계를 국가들의 게임으로 보고 그 게임의 규칙이 힘의 정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을 때 그것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힘의 정치에 입각하여 발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진보가 비난하곤 하는 미국 부시정부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북한 김정일 정부의 행태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구적 수준에서, 동아시아 수준에서 시민사회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국제정치경제의 민주화를 진전시켜 나갈 때,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원하는 평화의 기초를 닦을 수 있다.

    이제 진보논쟁의 막이 올랐다. 더 이상 금기는 없다. 차이를 드러내고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차이를 절대화하지는 말자. 진보세력 내부의 민주적 논쟁을 통해 연대의 가치를 만들어 가자. 임박한 대선으로 촉발된 논쟁이지만 논쟁의 시공간적 지평을 확대하자. 삶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원칙에 합의하면서 여러 갈래로 놓여 있는 진보의 길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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