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 사회주의는 법인세율 차이
        2007년 04월 12일 02: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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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유문제에 10년 넘게 집착했는데 그래봤자 별로 소득이 없었다면 문제는 소득 분배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는 결국 조세제도로 귀결된다. 소유형식의 다양성은 소득분배라는 ‘목표’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소유 문제는 ‘다양성’ 이상의 해법 찾기 힘들어

    "소유 변혁보다 분배 확대에 우선 주력하는 사민주의의 우익적 경향, 즉 실존하는 사민주의 전체는 결국 조세 정책으로 귀착되는데, 이는 자본주의 경기 부침에 의해 위협받을 수 밖에 없다 (레디앙, 이재영 "사민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 비판" 중에서)

    오랫동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소유와 조절이라는 잣대가 동원되어 왔다. 그러나 소유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별로 실효성이 없다. 소유 문제는 단지 "소유 형식은 다양해야 한다"는 것 이상의 다른 결론을 찾기 힘들다.

    단순하게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법인세 세율의 차이에 불과하다. 국유기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법인세율 100%가 적용되는 기업이다. 미국은 한 때 법인세율이 47%까지 갔었는데 사실 조금만 더 나가서 50%를 넘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탈을 쓴 사회주의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기업이 번 돈 중에 국가가 절반 이상을 가져간다면 그게 국영기업인지 민간기업 인지, 헷갈릴 것이다.

    ‘우리가 맞서야 할 것이 공황을 넘어선 진화된 자본주의’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바로 그 공황을 넘어선 자본주의를 창조해낸 것이 바로 조세 시스템이다. 즉 조세 정책을 위주로 하는 사민주의가 자본주의 경기변동에 의해 위협받는다기 보다는 오히려 조세제도가 경기변동을 통제하는 측면이 있다.

    부자들이 종부세에 감사해야하는 이유

    사실 한국의 자산 소득자들은 종합부동산세에 ‘저항’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 이것은 <지속 가능한 자산소득>을 위한 국가의 선물이다. 상승한 평가이익을 종부세를 통해 국가가 고정시켜주는 효과가 있고, 경기를 진정시켜 거품붕괴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미리 세금 몇 백 만원 내는 게 낫지, 자산 가치 폭락해서 하루아침에 몇 억씩 까먹는 게 낫겠나?

    이렇듯 누진세는 경기변동의 폭을 체제가 수용 가능한 범위 안으로 축소 시켜 결국 자본주의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것은 부유세도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이 부유세 공약을 내놓았을 때 사회당 유인물에는 “세금 더 걷는다고 자본주의 뒤집어지나?” 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맞는 말이다. 누진과세는 자본주의를 당장 뒤집기 보다는 자본주의를 서서히 변질시키는 수단이다. (참고로 나는 당시 부유세론자 였다)

    우리나라에 법인 기업만 32만개가 있다. 이 32만개의 법인을 전부 무상몰수해서 등기소에서 국가소유로 낙인찍고 어디선가 32만 명 이상의 사회주의자들을 조달해서 32만개의 법인마다 최소 한명씩 관선이사를 파견하는 방안과 그냥 법인세율을 몇% 올려서 단지 기업의 사회적 성격을 코딱지만큼 더 끌어올리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좋을지? 이런 고민이 존재하는 셈이다.

    32만명의 사회주의자가 필요하다

    사실 법인세는 그 존재 자체로 사회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는 세금이다. 덧붙이자면 부가가치세의 의미도 심각하다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 사회는 부가가치세를 통해 전 상품 등록제를 실시 중이다.

    사회주의의 탈을 쓴 배급제 사회에서도 생산의 품목과 수량만 계획했지 그 밖의 교환이나 사적인 거래까지 국유화의 손길을 뻗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는 부가가치세 시스템을 통해 (원칙적으로) 모든 상품 거래를 국가 기록(?)에 남긴다. 내가 볼 땐 소유형식에 매달리는 것 보다 이것이 훨씬 더 고도한 수법이다.

    그래서 나로써는 현재의 이념지형 속에서 존경할 만한 유일한 인물은 주대환이다.

    2.

    이름 붙이기도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나도 사회민주주의랑 민주적 사회주의랑 간판 말고 실질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 그게 궁금했다. 게다가 어차피 같은 사람들이 만든 말 아닌가? 여기서 전자를 부정하고 후자를 인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작업의 의미를 완전 부정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차피 개념 속에서 살아야 하는 팔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의 지평을 넓혀 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생각의 벽’이다. 어떤 생각의 벽을 만들고 그 안에 갇힌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다 또 다른 생각의 벽과 충돌하고 그 과정에서 낡은 벽을 넘어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점점 생각의 영토를 넓혀 나갈 수 있다.

    새마을운동이랑 사회주의운동이랑 똑같을까

    그래서 되도록 어떤 개념을 갖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설사 그것이 포장만 바뀌는 것이라 해도 어찌되었건 생각의 벽을 자꾸 업그레이드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모든 생각의 벽을 다 걷어치우고 그냥 벌판에 선다면 바람 불어 시원하기는 하겠지만, 누가 물어 볼 때 결국 “잘살아 보자”는 얘기 밖에 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새마을운동이랑 사회주의운동이랑 똑같을까?

    3.

    30년 넘게 연애도 못해본 노총각 노처녀들에게 우리는 가끔 “가까운데서 찾아라!” 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이념적 시도가 있었으나 많은 부분 한계를 드러내면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어디 멀리서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실은 가까운데서 찾아봐야할 필요가 크다.

    마르크스가 근본적인 변혁을 주창하면서도 근본주의자로 몰리지 않는 것은 꿈으로 가득 찬 서른 살의 나이로 공산당 선언을 쓰면서도 매우 구체적인 실천지침을 함께 남기는 일종의 균형감각(?)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균형감각

    즉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거창한 말 외에도 "누진세를 강화하라"든가 "운송, 금융 같은 것들을 국유화하라"든가 하는 비교적 사소한(?) 얘기까지 함께 적어 놓았던 것이다.

    나는 고도로 조직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것의 차이는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의 차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촘촘해지는 자본의 조직화 경향 속에서 어디부터가 사회주의고 어디까지가 자본주의였는지는 우리 다음 세대의 눈에나 보일 것이다.

    * 이 글은 ‘독자게시판’에 올라온 것을 옮겨온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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