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투표에 목매자니 걱정된다
        2007년 04월 12일 12: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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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 않아도 <프레시안>에 실린 우석훈 교수의 기고문에 대한 나의 ‘반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반론’이 실린 얼마 후 우석훈 교수의 ‘보론’이 있었고, <레디앙>에 황진태 연구원의 ‘비판’이 게재되었다. 나에게 ‘부연’과 ‘보완’의 기회가 주어진 것 같다. 내가 ‘반론’을 통해 우석훈 교수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논지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본다.

    당혹스러운 주장, ‘독재자에게서 민주주의를 배워라’

    현 시기 FTA정세 속에서 노무현의 독단적 리더십을 문제시하려는 우석훈 교수의 의도에 크게 공감하지만, “우리의 대통령이 최소한 박정희 수준의 민주주의 호민관이 되기를 바란다”는 식의 그 구체적 발언들과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수준에서든 민주주의의 범례를 박정희 정권과 같은 공공연한 독재체제(Open Dictatorship)에서 구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이 안 되며’, 민주주의의 확대, 심화란 우석훈 교수의 당초 문제의식과도 완전히 배치된다.

    우석훈 교수는 ‘보론’을 통해 최초의 기고문에서 폈던 "노무현은 적어도 박정희만큼 만이라도 행동해야 한다"는 자신의 논지에 대해 솔직하게 오류를 시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중심 쟁점으로 떠오른 사안이 그것은 아니며, ‘보론’은 이제 “박정희의 73년체계”와 “지금의 한미FTA 추진체계” 사이의 유사성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으니 그 오류를 사실상 인정하고 정정한 셈이다.

    국민투표의 의미는 국민투표 그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국민투표라는 제도는 이 제도가 이행되는 각각의 정황들에 따라 판이한 위상들을 가질 수 있고, 따라서 그 제도의 이행 여부에만 집착하기보다 ‘조건들’에 좀 더 주목하고 ‘조건들’을 둘러싼 사고들과 활동들에 좀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단적으로 유수한 독재자들이 국민투표를 도구화하였다는 사실은 국민투표를 다만 직접민주주의 제도들 중 하나로 기술한 단순한 교과서적 인식 이상의 정치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나의 ‘반론’에서 내가 ‘우리’의 유효한 선택지들 가운데 국민투표를 아예 배제한 듯이 이해한다면 그것은 전형적인 오독(誤讀)이다.

    우석훈 교수는 ‘보론’에서 “국민투표가 좋은 제도인가? 모든 제도가 그렇듯, 그 제도를 활용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확실한 것은 국민투표를 잘 사용한 나라들에서는 신자유주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소수자에 대한 보호나 저소득 계층의 주거지역에 대한 국가적 지원체계 등과 같은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흐름”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 언명에서 유의할 대목은 국민투표를 시행한 모든 나라들이 아니라, “잘 사용한 나라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국민투표의 잠재적 가치가 국민투표 그 자체로써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황진태 연구원은 “만약 유권자의 의견을 고대 그리스처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면 선거 및 투표제도의 각종 형태들을 둘러싼 기간의 “논쟁들은 의미 없이 증발해버린다”고 말하면서, 국민투표의 제도적 보장 및 시행이 곧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본래의 민주주의 이상에 다가서려 한다는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국민투표가 히틀러나 피노체트 등에 의해서 남용된 사실이 있지만 ‘역사는 진보한다’는 테제를 긍정할 때”, 그러한 일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나는 하나의 제도가 가지는 구체적 의미에 대해 그것이 존립하는 ‘조건들’을 도외시한 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와 “본래의 민주주의 이상”, “역사는 진보한다는 테제” 등등을 운위하는 것을 보면, 황진태 연구원은 그 타당성 여하를 떠나 나의 논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않고 있다.

    황진태 연구원은 국민투표를 통해 민주주의의 확대, 심화를 이룬 모범으로서 차베스 정권의 경우를 꼽는다. 나는 차베스 정권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책임 있게’ 평가할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형편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황진태 연구원의 차베스 정권 평가가 설사 대체로 적절한 것이라 하더라도, 한국의 현 정세 속에서 국민투표에 대하여 좀 더 신중하게 사고하고 국민투표의 이행 여부와 직접 연동되지 않는 방식들을 포함한 다층적 실천들에 더 많은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차베스 정권이 국민투표를 실시한 정황과 ‘우리’가 국민투표를 촉구하는 정황이 어떤 수준에서도 전혀 비교, 분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진태 연구원은 내게 묻는다. “이렇게 국민을 보호해야 할 최후의 바이블인 헌법조차 무효화되는 (한미FTA)체결에 대해서 두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보아야 할까?” 내가 과연 그렇게 하자 했던가? 비판을 하려면 비판 상대가 어떤 말들을 하는지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노무현이 국민투표 실시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적다

    박정희 정권기와 대비되는 한국정치의 현실을 염두에 두면 노무현이 국민투표를 실시하자는 요구를 앞으로도 계속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그랬을 때 국민투표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활동들은 ‘우리의 힘’을 강화하기보다 소진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 사진=청와대
     

    현행 헌법은 국민투표 실시를 오로지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서만 허용한다. 그런데 노무현은 과거의 박정희와 달리 국민투표에서 ‘승리를 자신할만한 정치적 조건들’을 향유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여론조사들에 의하면 타결된 한미FTA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수가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하여 다소 많기는 하다.

    그러나 노무현은 타결 내용의 전면 공개 및 세세한 분석, (만약 한다면) 국민투표 실시의 결정 등이 동반할 제도 내외를 불문한 정치의 활성화와 사태 전개가 어찌되어갈지 예측하기 어려울뿐더러 반전(反轉)의 확률마저 상당정도 점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강조한 바이지만 노무현의 염려와 독단의 저변에는, 현 시기가 (대통령직 인물이 아니라 그들이 놓여 있는) 정치적 컨텍스트 면에서 박정희 정권기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정세의 유동성과 불확실성을 충분히 감안하자

    박정희 정권기와 대비되는 정치지형이 함축하는 사태전개의 유동성과 불확실성은 분명히 노무현이 크게 우려하는 지점이나, 아울러 ‘우리’가 유리하게만 생각할 측면도 아니다. ‘유동성’과 ‘불확실성’은 대립의 상대진영 못지않게 ‘우리’에게도 지금보다 더욱 나쁜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특정한 공식적(formal) 제도에 대한 원리주의적 이해나 민중들에 대한 종교적 신념 등에 입각하여 그것의 이행 여부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경향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다.

    황진태 연구원은 국민투표에 대한 나의 견해가 “민중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데서 연유하며, “민중의 판단”이 사태를 “파국”에 이르게 할지 모른다는 나의 “두려움”이 결국 “작금의 엘리트 정치를 공고화”해준다고 본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그러한 회의는 일정 정도 필요하다. 심지어 나는 나 자신의 판단력조차 회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는다면 ‘더 나은’ 정치와 운동, 연구는 불가능하다. 최소한의 성찰도 없는 맹동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내가 강조한 것은 민중의 낮은 판단력이 아니라, ‘민중의 판단력이 제대로 발휘될 조건들의 조성’이었다.

    국민투표, 민주주의의 유일한 실현 경로가 아니다

    우석훈 교수가 중요시하는 민주주의의 내용을, ‘사회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계된 중대 사안에 대하여 스스로 직접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내용의 구체적 현실화가 꼭 국민투표라는 형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할 이유도, 규범적으로 반드시 국민투표라는 형식을 고집해야할 까닭도 없다.

    ‘자기 결정성(self-determination)’이란 이념은 다양한 경로들을 통해, 더욱이 하나의 제도로 환원되지 않는 복합적 과정들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촛불집회(와 이것이 동반했던 공론장들) 같은 각별한 경험을 한 바 있다. 또한 그 구체적 현황(민주노동당의 목소리와 범여권 내부의 긴장 및 균열 등)을 보건대 국회를 완전히 외면해버릴 필요도 없다.

    우석훈 교수는 “매번 독재가 등장할 때마다 시민들이 직접 ‘정권타도’를 외치고 길거리에 나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 가부는 국민투표와 같은 형식의 제도를 이행하느냐의 여부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물론 특정 제도가 주어진 문제상황을 일정하게 조절하는 기능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그 제도가 해당 문제상황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이른바 ‘가두 정치’는 언제고 자발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 것이다.

    국민투표는 자칫 소수견해의 합법적 배제 통로가 될 수 있다

    국민투표제는 단순한 다수결의 원칙에 의거하며 그런 만큼 사회적 소수자들/약자들의 목소리들을 도리어 억압하는 절차가 될 수 있다. 현재 강행되는 한미FTA가 효력을 발휘하면서 초래할 고통과 희생이 어떤 당사자들에게만큼은 그저 견딜만한 것들이 아니라 너무나 치명적인 것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들의 숫자가 국민투표를 통해 확인된바 전체 사회구성원들 중 다수를 점하지 않는다면(한미FTA는 결코 ‘국민경제 전체’의 파탄을 낳을 재앙이 아니다), ‘다수의 의사’에 의해서 그들이 직면한 고통과 희생을 승인하여도 좋은 걸까? 국민투표는 사회적 소수자들/약자들의 고통과 희생을 ‘국민’과 ‘국가’의 이름으로 묵과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하는 제도이다.

    우석훈 교수는 “단순히 한미FTA라는 국제조약 하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뛰어넘어, 미래를 위한 진화의 열쇠가 바로 국민투표에 있다”고 말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중장기적 비전과 관련해서 국민투표를 고민하고 제안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더욱이 제도로서 국민투표가 가지는 가치를 상대화하여 사고하고 논해야 한다.

    황진태 연구원은 “스탈린 시스템”을 평가하면서 “전체가 선택하고 일단 선택한 것은 모두가 따른다는 두 가지 원칙이 결합되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는지 인류는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그 비극을 낳을 수 있는 잠재성을 갖춘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국민투표제이다.

    우리는 패배의 경우마저 생각해야 한다

    반FTA투쟁은 패배할지도 모른다. 낙관적 의지가 중요하겠지만 패배의 경우도 한편으로 예정해놓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신자유주의적 사회편성에 반대하고 ‘새로운 삶’의 조건들과 관계들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노력들은 지속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최악의 경우 패배할 때 어떻게 패배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둘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가 지는 경우 절대로 국민투표의 방식으로 패배를 확인 받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국민투표라는 제도에 내재한 이데올로기는, 그것의 이행을 거부하던 사람들이나 촉구하던 사람들이나 일단 국민투표가 실시된다면 모두가 그 결과를 내용 여하에 상관없이 ‘국민적 합의’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당위, 다시 말하면 ‘국민 주권’의 구현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윤리이다. 국민투표를 통한 패배의 확인은 이후 실천의 전망과 관련해서 볼 때 가장 안 좋은 경우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국민투표의 길을 ‘우리’의 가능한 선택지들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반FTA 진영 내에 국민투표의 가치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실재함을 느끼고 있고 그 경향이 초래할 부정적 귀결들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정치(운동)는 추상적 원리의 무매개적 구현이어서도 종교적 신념의 결단적 이행이어서도 안 된다. 특정한 제도의 물신화는 당초의 의도와 별개로 민주주의를 오히려 형식화하고 그 확대와 심화를 지체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국민투표를 ‘전부’로 생각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나 “국민투표에라도 목매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으니 정말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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