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연금의 덫'에 빠진 정치권
        2007년 04월 11일 05: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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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 민주노동당 이치열 기자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선 이례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국민연금 개혁안을 놓고 정부-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민주노동당의 대치선이 그어진 것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공조

    정부는 국민연금 급여율을 현행 60%에서 내년부터 50%로 낮추고, 보험료율은 현행 9%에서 2018년 12.9%까지 단계적으로 높이는 국민연금 개혁안을 냈다. 국민연금 재정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방안이다. 열린우리당은 65세 이상 노인 60%를 대상으로 급여율 5%의 기초노령 연금을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법안을 제출했다.

    이에 맞서 한나라당-민주노동당은 수정안을 공동 발의했다. 수정안은 국민연금 재정안정화안과 기초연금 도입안을 하나로 묶었다. 재정안정화와 관련해선 국민연금 급여율을 현행 60%에서 08년 50%로 인하한 후 매년 1%씩 추가로 깎아 2018년 40%까지 낮추는 내용이다. 보험요율은 현행 9%가 유지된다. 정부안에 비해 덜 내고 덜 받는 방식이다.

    기초연금제 도입안은 08년부터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80%를 대상으로 급여율 5%의 기초연금을 지급하되, 이를 오는 2018년까지 10%(현재 기준 약 18만원)까지 단계적으로 높이는 내용이다. 결국 이 세 법안이 표결처리됐는데,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안, 한나라당-민주노동당의 수정안은 부결되고 열린우리당의 ‘기초노령연금법안’만 통과됐다.

    ‘연금정치’의 배경

    당초 국민연금의 재정 고갈을 막는 데 목적이 있었던 정부로서는 혹 떼려다 혹만 하나 더 붙인 꼴이 됐다. 당장 내년에 2조5,000억원을 쓰게 되는 노령연금을 신설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책임을 지고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사의를 표명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단 사의를 유보했지만 국민연금 관련 대국회 채널을 한덕수 총리로 바꿨다.

    국민연금 개정안을 둘러싼 정치지형은 흥미롭다. 무엇보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이 손을 잡은 게 이채롭다. 작년말 민주노동당이 ‘알뜰기초연금제’ 도입을 위해 열린우리당과의 공조를 추진했던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국민연금 개정을 둘러싼 정치권의 복잡한 합종연횡에는 곡절이 있다.

    당별로 국민연금 문제에 대한 입장이 갈리고, 입장이 같더라도 정치적 배경이 다르다. 또 어느 당도 단독으로 법안을 처리할만한 의석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2004년 이후 지속돼온 ‘연금정치’의 배경이다.

    ‘연금의 덫’에 빠진 정치권

    국민연금 문제를 보는 정부의 주요 관심사는 재정안정화다. 연금개혁 없이 지금처럼 가면 2047년이면 기금이 고갈된다. 또 하루에 무려 800억원씩, 연간 30조원의 부채가 쌓이게 된다는 것이 복지부의 설명이다.

    국민연금 재정안정화의 필요성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정부의 연금개혁 논리가 국민들에게 안 먹히는 것은 ‘국민연금’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정부 탓도 큰 것으로 지적된다.

    오건호 민주노동당 정책전문위원은 "정부는 연금개혁의 급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현 연금 재정의 문제점을 자극적으로 강조했다"며 "이것이 역설적으로 국민연금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오 전문위원은 이를 두고 "정부가 ‘연금덫’에 빠졌다"고 표현했다.

    물론 열린우리당이 국회 과반수 의석을 점하고 있다면 독자적인 법안 처리가 가능하나 그런 상황도 아니다. 법안을 처리하려면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

    지난해 유시민 장관이 정부의 계획에 없던 기초노령연금안을 들고 나온 것은 ‘기초연금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한나라당에 퇴로를 열어줌으로써 손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이런 시도가 가능했던 이유는 한나라당 역시 ‘연금덫’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표가 절실한 한나라당

    한나라당은 지난 대선의 패인 가운데 하나를 노인층의 표심을 얻지 못한 데서 찾았다. 노인층의 지지를 회복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한나라당은 2004년 총선 이후 ‘기초연금제’를 들고 나왔다. 보험요율을 현행 9%에서 7%로 깎고, 급여율도 60%에서 20%로 대폭 낮추는 대신 기초연금 급여율 20%로 높이는 급진적인 안이다. 급여율 15%인 민주노동당안과 비교하면 한나라당안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 수 있다.

    문제는 재원. 당초 한나라당은 부가세를 높여 필요재원을 충당한다는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기업과 당 내부의 반발에 밀려 없던 일이 됐고, 한나라당의 ‘기초연금안’에는 재정확보 방안이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재정확보방안을 제시하거나 급여율을 대폭 낮춰야 하는 상황인데도 한나라당은 기존의 기초연금제만을 대책없이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기존 기초연금안에서 발을 빼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한나라당이 민주노동당과의 공동발의로 기초연금 급여율 10%의 수정안을 내놓은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민주노동당과 손을 잡는 형태로 기존안에서 발을 빼되, 법안이 통과될 경우 ‘기초연금안’이라는 전리품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다. 물론 한나라당의 이런 시도가 가능한 것은 민주노동당 역시 ‘연금의 덫’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도 연금 덫에 빠지다

    국민연금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주요 관심사는 이 제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민주노동당은 2008년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소득의 5%(급여율 5%)에서 출발해 2028년 15%까지 기초연금 도입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기초연금안을 제시해놓은 상태다.

    원내 소수정당이고 독자적인 의제설정 능력이 없는 민주노동당은 ‘기초연금’ 도입을 목표로 보수정당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정부-열린우리당과 손 잡고 ‘알뜰기초연금제’ 도입을 추진했으나 상임위 법안처리를 앞두고 정부여당이 파트너를 갑자기 민주당으로 바꾸면서 무산됐다. 그리고 지난 2일 연 10% 급여율의 기초연금안이 포함된 국민연금 개정안을 한나라당과 공동발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복잡한 역학관계가 깔려 있어 앞으로 국민연금 개정안이 앞으로 어떻게 처리될지 전망하기 힘들다. 게다가 열린우리당이 쪼개지면서 구도가 더욱 복잡해졌다.

    일단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은 지난 2일 제출한 수정안을 중심으로 이번 주 중 개정안을 낼 예정이다. 열린우리당도 보험료율과 급여율을 다른 당과 조정한 개정안을 이번 주 안에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열린우리당 탈당 의원들의 모임인 통합신당모임은 재정 문제와 사각지대 해소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며 국회 국민연금개혁특별위원회 설치를 주장하고 있다.

    ‘기초노령연금법’은 모든 정파에 의해 정치적으로 거부된 상태

    민주당 김효석 원내대표는 9일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연금법 논의를 위한 각 당 원내대표.정책위의장 연석회담 제안 ▲청와대와 정부의 기초노령연금법 거부권 행사 자제 ▲정치적 공방 중단 등을 제안했다.

    한편 지난 2일 국회를 통과한 기초노령연금법에 대해 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개정안 가운데 기초노령연금법의 대체안인 기초연금안이 포함되어 있는 데서 보듯 이번 기초노령연금법은 모든 정파에 의해 이미 정치적으로는 거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부한 이유와 노림수는 각자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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