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중도정치’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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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10일 05: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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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심상정 의원실
     

    요즘 ‘중도’라는 말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실 요즘이랄 것도 없이 선거철만 되면 우리 정치권은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듯 ‘중도’의 스펙트럼으로 자신을 치장하기에 바쁘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도 중도를 자임했고, 정운찬 전 총장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중도로 규정했다. 손학규 전 지사 역시 마찬가지다. 아울러 실패한 정치세력인 범여권은 ‘중도개혁세력 대통합’을 명분으로 패자부활전을 모색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을 빼고는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자신을 중도로 포장하지 않는 이를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중도정치의 역사적 기원

    중도정치란 역사적으로 좌파정치세력의 노선변화를 가리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근래의 대표적 사례로는 영국노동당의 ‘신노동당’ 선언의 이념적 근간이었던 ‘제3의 길’(the third way), 독일사민당의 ‘새로운 중도’(Neue Mitte)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중도노선은 좌우세력의 비판 속에서도 최소한 당대의 논쟁을 담고 있었다. 서구 복지국가의 한계, 사민주의냐-신자유주의냐,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혁신, 근대와 탈근대 즉 노동 대 자본의 근대적 정치구도에서 탈피해 성찰적 탈근대 정치로 이동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에서 ‘중도’는 철학도, 실체도 없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한국정치에서 중도는 좌파가 아닌 우파가 제기하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사실 이는 ‘중산층과 서민을 지지기반으로 한다’고 떠벌이는 보수야당의 선거전략에 불가하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집권 냉전세력의 ‘좌익용공’ 공세를 피하기 위해, 최근엔 실정의 면피용으로 중도가 이용되고 있다.

    평화개혁, 중도실용, 중도개혁 등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쓰는 ‘중도’는 그 자체로 완결적일 수 없는 불구의 개념이다. ‘무엇에 대한 중도인지’가 분명해야 하는데 그와 관련한 차별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사이비 개혁세력이 그냥 좋은 개념, 절충적 개념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 실패자, 정치적으로 방황하는 미아들의 정치노선, 그것이 한국정치에서 중도의 실체다.

    “무엇을 하겠다는 중도인지” 답하라

    책임정치, 정치철학, 정치노선 차원에서 중도를 들먹이려면 적어도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논리적 전제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무엇을 하겠다는 중도냐’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의 핵심의제인 ‘IMF 경제위기 10년의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대안’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중도를 부르짖는 정치세력은 바로 그 이름으로 ‘양극화 강화정책’과 ‘신자유주의’에 순응하거나 밀어붙여왔다. 그것이 바로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실패한 근본원인이다.

    눈여겨 볼 것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실패한 정책에서 둘 사이에 어떠한 긴장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정책에서는 같은 방향을 지향하면서도 정작 서로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유지된 것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관계다. 이런 상황에서 제기되는 중도론은 이러한 허구적 긴장관계마저 해소해 보자는 것이다.

    범여권에서 나오는 중도론은 한마디로 말해 ‘우익편승론’일 뿐이다. 장사 되는 곳에 좌판을 벌이겠다는 발상, 나는 이것을 ‘떠돌이 약장사 정치’로 규정한 바 있다. 국민이 개혁을 요구할 때는 개혁장터에 좌판을 벌이고, 국민이 잇따른 실정에 절망하고 한나라당 쪽으로 옮겨가자 이제는 재빨리 중도란 이름으로 좌판을 벌이고 우익편승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한미FTA와 원포인트 개헌 등의 의제는 “나도 괜찮은 보수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한나라당, 보수언론 등 우파 헤게모니에 편승하기 위한 적극적 구애행위인 것이다.

    실체없는 말의 성찬이자 정략적 알리바이

    한국의 중도주의는 전통적인 좌표를 수정한 게 결코 아니다. 무엇에 대한 중도란 말인가. 평화개혁, 중도개혁, 중도실용은 말의 성찬일 뿐 개념도 아니고,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지난 반세기의 한국정치에서 끊임없이 중도론이 제기되었지만 현실정치에서 그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 실체가 없으니 당연히 좌표에도 없다.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점을 찾아가다 보면 길 잃은 부랑아가 될 수밖에 없다. 한미FTA 추진, 비정규직 개악법안 강행통과, 부동산정책 실패 등 정치와 정책에서 실패한 세력이 선거승리라는 정략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알리바이가 곧 중도론이다.

    중도정치가 성립하려면 좌우의 균형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한국정치는 보수독점 구조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 ‘극우-중도-극좌’로 재편될 가능성은 없다. 이 점에서 ‘보수-중도-진보’는 추상적 이념 속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구도다. 오로지 선거공학적 레토릭으로서 기능할 뿐이다.

    참여정부의 실정을 경험한 국민은 이제 레토릭을 넘어 정치의 실질적 내용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말뿐인 중도주의는 더 이상 한국에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사이비 개혁세력의 우익투항, 정치개혁 실패를 고백하는 과정일 뿐이다.

    “한미FTA 찬성이냐 반대냐” 대선 핵심 쟁점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무현-한나라당-보수언론의 3각동맹 체제는 우익편승론을 본질로 하는 중도의 귀결점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미FTA는 올해 대선의 핵심쟁점이 될 것이고, 따라서 나는 FTA를 둘러싼 정치구도 재편에 주목한다. 개혁세력이니 평화개혁이니 하는 지난날의 어정쩡한 정치 슬로건은 한미FTA 전선에서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고, 오직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분명한 태도를 요구받게 될 것이다.

    나는 한미FTA를 일관되게 반대해왔고, 무효화해야 함을 역설해왔다. 그것은 졸속으로 시작해 미국 퍼주기로 끝난 협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동차 세제개편이라든가 투자자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보장하는 독소조항에서 볼 수 있듯 서민의 삶을 희생양으로 대기업과 소수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한미FTA는 결코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는 3각동맹체 내부의 자리바꿈일 뿐인 정권교체를 뛰어 넘어야 한다. 부자들의 시대에서 서민의 시대로, 냉전의 시대에서 평화와 통일의 시대로, 신자유주의 약육강식 시대에서 호혜협력의 시대로, 보수정치시대에서 진보정치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좌표이자 대안이다.

    * 이글은 4월 10일 오후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에서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주최로 열린 ‘대선예비주자 특강’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레디앙>에 보내온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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