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 씨앗 품고 사는 페루의 ‘살바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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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10일 08: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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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약 1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살바도르’라는 마을이 있다. 리마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를 조금 달리다보면 바닷가가 시야를 벗어난 얼마 후에 구불거리는 콘크리트길로 들어선다. 그때부터 깔끔하게 단장된 도시는 사라지고 흙먼지 날리고 짓다만 벽돌집들이 늘어선 거리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바로 여기부터가 가난한 마을 ‘살바도르’다.

    살바도르의 극단 ‘비차마(Vichama)’

    이 마을은 원래 군부대 기지만 있던 사막이었다. 1971년에 리마에 도시개발이 진행되면서 쫓겨난 사람들이 이주해 온 땅이다. 페루 정부는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오로지 모래만 있는 이 땅만 달랑 내어주면서 알아서 살라고 했다.

    살바도르 주민들은 이곳에 흙과 벽돌로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우물도 파냈으며 어려운 조건 속에서 더불어 살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했고 학교도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생활 환경과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의 모임이 이루어졌고 이들의 기나긴 투쟁은 결국, 정부로부터 물과 전기를 따냈다.

    ‘부네굿’을 공연했던 장소 ‘Monumento Maria Elena Moyano’도 살바도르 공동체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하다 폭탄테러로 희생된 Maria Elena를 기념하는 곳이었다.

    흙바람 날리는 살바도르의 땅 한 복판에도 볼리비아의 COMPA와 같은 문화예술 공동체가 있다. ‘인생의 신(God of life)’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극단 ‘비차마(Vichama)’는 1983년에 세워져 지역주민들과 더불어 문화예술의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극단 ‘비차마’는 주로 연극, 아크로바티크, 요가, 악기연주 등 다양한 문화예술프로그램을 지역 청소년들에게 지원하고 있어 관심 있는 청소년들은 누구나 참가하여 배울 수 있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비차마’의 배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극단 비차마의 연극 ‘Memory for lost absents’라는 작품을 보았다.

    20년 동안 테러와 학살에 의해 고통받았던 아야쿠초 원주민들을 추모하는 제의연극이었다. 1824년, 볼리바르의 독립투쟁이 꽃을 피웠던 아야쿠초, 스페인어로 ‘죽음의 모퉁이’라는 뜻을 가진 아야쿠초는 1980년 마오쩌둥주의를 표방하며 무장봉기를 시작한 ‘빛나는 길’ 등의 반군조직과 군과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무수한 원주민들이 납치, 학살되었던 땅이다.

    학살에 의해 사라진 존재들을 위로하는 ‘비차마’ 배우들의 진지함과 깊은 연기력은 아야쿠초 원주민들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무대에 재현한다.

       
      ▲ ‘극단 ’비차마‘ 배우들의 연극 ’사라진 존재들을 위한 기억‘ (사진 제공 :극단 비차마)
     

    배우들은 마치 무고하게 죽어간 원혼들을 달래주기 위해 바쳐진 제물처럼 순결해 보였고 그들의 몸은 인류의 보편적인 꿈을 향해 언제나 바쳐질 준비가 되어있는 듯했다.

    우리는 이번 여름에, 배우의 순결함이 무엇인지, 민중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연극, 배우와 관객이 함께 정화되어지는 연극이 무엇인지를 공유하기 위해 비차마의 배우들과 그들의 연극 ‘사라진 존재들을 위한 기억’을 한국 땅에 초청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리고, 제주도, 광주, 거제도, 대구, 인천에서 학살의 기억을 되살리고 무고하게 사라진 존재들을 추모하는 제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문화연대 포럼 (Foro de la Cultrua Solidaria)

    살바도르에서 가장 큰 행사가 있는데 올해로 3년째 맞는 문화연대포럼 (Foro de la Cultrua Solidaria)이다. 이것은 음악 콘서트, 연극, 춤, 워크샵, 전시, 사회 정치에 관한 회의 등을 두루 아우르는 문화포럼으로 약 200여 명 가량 되는 페루의 아티스트들과 정치ㆍ문화 활동가들이 1주일 동안 살바도르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예술행위와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입장들을 공유한다.

    이 포럼은 단순히 예술가와 활동가들만의 행사가 아니다. 살바도르의 지역주민들은 포럼 참가자들의 숙박 장소와 식사를 저렴하게 제공하고, 연극이나 콘서트, 워크숍, 회의에도 참가하여 포럼의 내용들을 공유하는 등 지역 주민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이루어진다.

    초, 중, 고등학교 수업과도 연계되어 학생들이 공연을 보러오고, 배우들이 학교를 찾아가서 공연을 하며 대학생들은 자원봉사자들로 참가하여 학점을 얻는다. 즉, 문화연대포럼은 살바도르의 주민들의 자랑거리요, 그들의 사랑과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이다.

    한국에서 범람하고 있는 ‘포럼’ 문화를 떠올려봤다. 텅 빈 회의장에서 테이블 위에 이름표와 마이크를 올려놓고 전문가들만의 언어로 떠들다 끝나버리는 그 생기 없는 토론 문화들…로마의 ‘광장’이라는 말에서 온 ‘포럼’이라는 말이 무색한, 탁상공론들 투성이다.

    게다가 포럼이다, 여타 강연장이다 하는 장소에서 스스로 진보적 활동가라고 자부하며 발언하는 지식인들 중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활동의 뿌리를 내리고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그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예술가와 활동가들이 얼마나 있을까?

    낮은 자리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삶의 문제를 공유하기보다는 꼭대기로, 중심부로 올라가기 급급하여 상부는 요란한데, 우리네 지역 공동체와 하부는 나날이 빈약해져만 간다.

    살바도르에 도착한 날은 문화연대포럼이 시작되기 바로 전 날이었다. 비차마 배우들이나 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젊은 활동가들 모두가 분주하면서도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

    이날 가장 눈에 띈 것은 행사 홍보를 위해 벽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인쇄된 플레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마을 이곳 저곳에 배치된 행사장 건물 벽에 문화연대포럼을 알리는 벽화들을 그린다.

       
      ▲ 벽화를 그리며 문화연대포럼을 준비하고 있는 활동가들
     

    행사가 있기 1주일 전부터 이렇게 살바도르 곳곳의 건물에 포럼을 알리는 벽화를 그리고 있었단다. 비차마 극장 벽도 이전의 그림을 지우고 포럼을 알리는 그림이 다시 그려졌다. 고정되어있지 않고 행사 때마다 달라지는 벽,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행사 홍보를 넘어 하나의 살아있는 퍼포먼스였다.

    개막 행사가 있던 날 2006 문화포럼 참가자들의 행진이 있었다. 자신들이 직접 만든 플레카드와 깃발을 들고, 종이로 만든 옷을 입기도 하고, 재미있게 분장을 한 얼굴로 3시간 가량을 행진했다. 이들은 단순히 문화포럼만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페루가 처한 정치, 환경, 교육 문제 등에 대해서도 알렸다. 행진만이 아니라 짤막한 거리 공연도 하면서 살바도르를 순회했다.

    포럼이 진행되는 1주일 동안 매일 낮과 밤으로 워크샵, 콘서트, 연극, 춤 공연 등이 이어졌다. 극장, 학교, 거리, 스타디움, 공원, 시장, 방송국 등등… 31개의 행사 장소가 배치되어 있었다.

    밤낮으로 노래와 춤과 퍼포먼스의 향연과 페루의 희망을 위한 목소리들로 가득 울려 퍼지는 이 땅이 30년 전엔 오로지 모래사막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 거리행진을 하며 문화연대포럼을 알리고 있는 활동가들과 지역 청소년들
     

    포럼이 끝나기 이틀 전날 밤, 나는 길거리에서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큰소리로 떠들어대고 있는 거지 아저씨를 보았다. 새까만 얼굴에 산발을 한 채 뒤엉켜있는 머리, 갈기갈기 찢겨지고 때 자국으로 얼룩진 바지를 입고 있는 그 거지는 포럼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를 따라가서 보니 봄보를 연주하는 악사들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문화포럼에 참가한 배우 ‘페르난도’였다.

    그의 공연 역시 1인극이었고 ‘부네굿’처럼 밑바닥 인생을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반가웠다. 특히, 부네굿에 나오는 노숙자 ‘지렁이’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페르난도와의 만남은 한국의 ‘부네’와 페루의 ‘지렁이’의 만남이 되었고 문화포럼 마지막 날, 살바도르 시장 한 복판에서 한국 배우 장소익과 페루 배우 페르난도의 합작공연으로 이어졌다.

    굶주림에 떨고 있는 거지(지렁이)가 얼어 죽은 곳에 부네가 다가와 지렁이가 남겨놓은 옷을 어루만지고, 지렁이가 누웠던 땅에 물을 뿌리고 씨앗을 뿌리는 내용의 퍼포먼스…

    시장에서 일하던 사람들, 시장에 일보러 온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국 땅에서 온 배우와 자신들의 배우가 협연하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 문화연대포럼 폐막공연으로 페루 배우 ‘페르난도’와 협연한 ‘부네굿’
     

    학교에도 안가고 사탕을 팔기위해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땅, 흙먼지를 마시며 채소를 파는 할머니들의 땅, ‘뽈가’라는 벼룩이 개와 사람들에게 지독한 가려움을 옮겨대는 이 가난한 땅에서 나는, 민중연극은 결코 민중에게 ‘보여주기(Show)’가 아니라 민중의 살과 맞부딪히는 ’체험(Feeling)’임을 다시 깨달았다.

    살바도르에선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날씨가 바뀐다고 했는데 페르난도와 장소익의 공연이 지진과도 같은 공연이었을까? 이날, 늘 구름에 가려져 있던 해가 오랜만에 화창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페루에서의 마지막 밤, 사막위에 다닥다닥 세워진 집들과 그곳의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들을 바라보면서 민중의 승리요,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이 척박한 모래땅에 마을을 세우고 물과 전기를 끌어올린 그들의 힘과 생명력…. 혁명의 씨앗은 가난한 이들의 품속에 있고, 혁명은 가난한 이들의 우정 어린 연대로부터 싹트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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