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마디만, 애정 어린 북한 비판 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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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09일 06: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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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순천은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의 안개가 자욱한 갯가의 작은 도시로 다가온다. 나보다 열세 살이 많은 김승옥의 그 소설은 우리 세대에게 날카로운 칼날처럼 깊은 생채기를 남긴 것이다. 그러나 벚꽃이 만발한 죽도봉 공원에서 바라본 순천의 구시가지는 상상했던 것보다는 아름답고 언덕마다 옛집들이 단아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된 다음날 2007년 4월 3일, 전라남도 순천시를 찾았을 때 나는 최소한의 술렁거림이나 웅성거림을 기대했다. 그러나 순천시민들은 차분하게 ‘제3의 개국(開國)’, 또는 ‘미국의 51번째 주로의 편입’이라는 사태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신중함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오랜 옛날부터 지극히 실리적인 백성은 조용히 주판알을 굴리고 있는 듯하다. 농업에 대한 대책 마련을 외치는 목소리는 클수록 좋다. 그러나 수출 산업의 공장이 돌아가는 것 또한 필요하다. 그래서 무역의 득실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다. 공공 서비스와 정부 정책이 붕괴, 무력화될 우려에 대해선 “설마”라고 생각한다.

    여수 순천 시민들은 한미 FTA를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협상 타결 이후 찬성의 여론이 높아져 애초에 비슷하던 찬반의 비율이 찬성 쪽으로 크게 기울고 있다는 소식이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미국화’, 사회 양극화의 큰 걱정을 하는데 백성들은 순순히 협상 타결을 현실로 받아들이니 이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무지(無知)에서 오는가, 아니면 백성들의 또 다른 지혜에서 오는가?

    한미 FTA 협상 타결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애매한 여수, 순천, 광양 시민들의 표정은 새삼스럽게 일깨워 주었다. 백성들은 지극히 이기적으로, 그래서 이중적으로 반응하고 선택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함부로 짐작할 수 없다. 그래서 알 수 없는 그 마음, 백성의 마음(民心)을 천심(天心)이라 했던 것인가?

    하물며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한 여수 순천 사람들의 마음을 공부가 모자란 내가 어찌 감히 접근, 인식, 파악할 수 있겠는가? 1948년의 ‘여순사건’으로 이들은 동족상잔의 아픈 경험을 곱절로 하였다. 그러므로 쉽게 그들의 신뢰를 얻으려 덤비거나 거창한 이론으로 윽박지르거나 설득할 생각은 아예 하질 말아야한다.

    1954년 4월 5일이라면 내가 태어나기 두 달 전이다. 그 날 백운산에서 서른일곱 한창 나이로 생을 마감한 한 사나이가 있었다. 남로당 전남도당 위원장 김선우, 미국 정부가 얼마 전 공개한 역사 자료에는 그가 친필로 쓰고 선명한 글씨로 서명한 문서들이 많다. 당시에 아직 10대였던 그의 막내 동생 김결이 벌써 72세 노인이다.

       
     ▲ 벌써 72세 노인이 되어버린 김선우의 막내 동생 김결씨. 
     

    김선우 남로당 전남도당 위원장과 소년 빨치산들

    4월 5일 보성군 웅치면 용발리 입추산 김선우의 묘 앞에는 그의 후배 동지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 해마다 수가 줄어 올해는 몇 되질 않는다. 정귀남(81세), 손영심(77세), 김영승(73세) 등, 해마다 빠지지 않던 이복순, 조성삼 등은 몸이 편치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4월 5일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추정한 그의 사망 날짜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이 거의 궤멸되고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전남도당 유격대 최후의 세력은 백운산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그러나 이미 전쟁이 끝난 지 오래 되어 대규모 군대가 후방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김선우는 마침내 1954년 4월 5일, 백운산 비트가 발각, 포위되어 자결하고 말았다.

    토벌대장 김재명은 백운산의 한 봉우리에 정중하게 묻어주었다. 삼십여 년이 흐른 후에 고향으로 이장하였다. 그의 당직은 전남도당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오갔지만 군사조직에서는 항상 전남 유격대장이었다. 그래서인지 살아남은 소년 빨치산들은 그를 ‘사령관님’이라고 불렀다. 사령관에 대한 변치 않는 충심(忠心)은 감동적이다.

    특히 김선우가 소년 시절 회천면의 고무신 가게에 점원 생활을 하면서 고학할 때, 그 고무신 가게 집 딸이었으며, 훗날 교사를 하다가 입산하여 전남도당 당적부 비서를 하였고, 붙잡혀 징역을 10년이나 산 이복순 여사는 지금도 “사령관님처럼 잘 생기고 지혜 있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사령관님은 항상 웃었다.”고 말한다.

    김결이 감히 노혁명가들에게 한 마디 하다

    김결의 큰 형님에 대한 기억도 존경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율포 가까이 냇물에 수차(水車)를 돌려 방앗간을 하던 삼촌 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형님, 율포 중앙초등학교에서 6년 내내 1등을 하였다. 그리고 회천면 사무소 옆 고무신 가게에 점원으로 취직, 일하면서 공부하여 보통고시에 합격하고 전남도청 공무원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공무원을 그만두고 평양으로 가서 노동자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좌익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마 일제 시대부터 좌익운동을 시작한 걸로 동생 김결은 짐작한다. 그 영향으로 셋째 형님도 좌익 활동하다가 스물여덟 나이에 토벌대와 교전 중에 전사했다.

    둘째 형님 역시 고생을 많이 했지만 요행히 살아남아 근년에 별세했다. 이제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막내 김결만 남았다. 1992년 민중당 국회의원 후보로 광주 서구에서 출마하고, 아들 김창훈도 작년 민주노동당 후보로 광주 남구청장 후보로 출마했으니 큰 형님 김선우의 그림자는 그의 가계(家系)에 길게 드리우고 있는 셈이다.

    김결이 작심한 듯 무덤에서 한 마디 한다. “형님, 누님들은 굶어 죽을 각오, 맞아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를 하고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영웅적 혁명투쟁을 하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투쟁을 하신 목적은 평등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북조선은 불평등과 인민의 고통이 극심하여 탈북자가 1만 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 빨치산 전사들인 정귀남(81세), 손영심(77세) 할머니.
     

    북한에 대하여 애정 어린 비판 한 마디 정도는…

    “형님들이 북조선 당국에 대하여 애정 어린 비판 한마디 정도는 이 시점에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역사적 의무이고 숭고한 정신으로 죽은 동지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약간의 설전 후에 모두들 바쁘다며 산을 내려가 버린다. 김결은 진작부터 별렸지만 감히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처음이다.

    하긴 김결의 주문은 그 분들에게 너무 가혹하고 잔인한 요구인지도 모른다. 북한의 현실이 어떠하든 무슨 상관인가? 공화국은 그 분들의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고 마음의 고향이고 모든 고통을 감내한 이유였다. 그걸 상대화하여 이성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그러나 그 날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독립노선의 추억’을 되살렸다.

    재일교포 작가 이회성이 소설 <금단의 땅>에서 정확하게 묘사했던 독립노선과 의존노선의 대립, 나는 그것만이 남한의 사회주의자들을 갈라놓을 유일한 현실적 구도라고 생각했다. 레닌이나 트로츠키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아직도 “혁명이냐 개량이냐”를 논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그건 무의미하고 허구적인 대립구도다.

    지금도 전파상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김결 선생이 80년대 초중반에는 광주에서 많은 단파 라디오를 만들어 주었다지만, 나도 80년대 초에는 단파 라디오를 제법 들었다. 마산에 단파 라디오를 듣고 자생적으로 ‘김일성주의자’가 된 한 후배가 있었는데 그와 함께 라디오를 듣고 논쟁하면서 나의 독립노선을 정립했다.

    독립노선과 의존노선의 대립만이 현실적 구도

    그래서 1986년 봄에 이른바 ‘주사파’가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권우철, 양우진 등의 직간접 도움으로 즉시 독립노선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노선은 ‘인민노련’의 강령으로 문자화되었다. 그리고 후에 이태의 <남부군>을 읽으면서 그 연원이 전쟁 전까지 이어짐을 알았다.

    의존노선의 타락은 필연이다. 그건 힘에 대한 굴종이고 현실 권력에 대한 변호론이고 무수한 부정의에 대한 눈감음이며 역사적 사실 왜곡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과 대중을 속여야 한다. 독립노선만이 진보적이며 미래지향적이며 인민대중의 생활을 향하며 창조적이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며 유연하며 현실적이고 정직하다.

    의존노선의 모순은 김대중 지지의 역설에서도 드러난다. 노골적인 친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이며 누구보다도 북한 체체를 붕괴시킬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 이른바 햇볕 정책을 창안하여 추진했던 사람, 김대중에 대한 그들의 짝사랑과 집착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 햇볕정책은 진보가 용인할 합리적 보수의 입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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