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언제나 너무 쉽거나 또는 어렵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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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07일 08: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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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렵다. 너무 쉬운 것은 섹스를 육체를 다루는 하나의 테크닉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며, 너무 어려운 것은 섹스를 인간적인 거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그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섹스와 공포』는 아주 어렵고도 낯선 책이다. 처음 듣는 낯선 이름들과 벽화들, 라틴어와 그 라틴어에 기반한 말놀이들이 횡행하고, 게다가 밑줄 그으며 읽기에 전혀 모자라지 않은 시적인 사유들의 행렬들…. 다른 말로 하자면 『섹스와 공포』는, 아주 느리게 읽어야만 할, 아주 프랑스적인 책인 셈이다. 도대체 섹스(이야기)는 그 어떤 중도 혹은 타협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 『섹스와 공포』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파스칼 키냐르의 입론은 얼핏보면 소박해 보인다. 그리스의 자유롭고도 분방한 성이 로마시대 초기에 이르러 변질 혹은 달라졌으며 그 이유는 이른바 현제(賢帝)라고 불리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마인드 탓이라는 것이다.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점, 즉 그리스의 에로티시즘이 로마 제국에서 변화된 사실을 이해하고자 애쓴다. 변화의 문제가 지금까지 고찰되지 않은 이유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로마 사회를 제국의 형태로 재정비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재위 56년 동안, 그리스인들의 즐겁고 명백한 에로티시즘은 공포에 질린 우수로 변모했다. 이런 뒤바뀜이 제자리를 잡기까지는 겨우 30여 년(BC18~AD14)이 걸렸을 뿐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의 열정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변모의 한 결과일 뿐이었다.”(p.17)

그러나 키냐르의 이같은 입론은 사실 무척이나 도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와 로마-우리들의 인식 속에서는 항상 그리스와 로마는 하나의 나라이다!-는 섹스에 대해 자유분방했다는 일반적인 상식에 크게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키냐르는,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엄격한 청교도정신이라는 진앙에서 비롯된 그리스와 로마의 단절,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문명의 지진”을 말하고자 하는 셈이다. 짧은 시간에 걸친 큰 단절을 말하기 위해 그가 택한 분석과 논평 방식의 일종의 예각화이다. 당시의 이야기와 그림들을 치밀하고도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게 바로 그것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이같은 입론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가장 큰 반론은 아마도 이른바 정치경제학적인 분석의 차원의 몫일 것이다. 가령 지금 이곳의 예를 들면, 인터넷 미디어의 득세와 그로 인한 언론 지형의 변화를 노무현(정권)의 마인드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섹스/커뮤니케이션은 아우구스투스/노무현의 법령/마인드에 의해서 그 성격이 급작스레 바뀌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징후를 말하기에는 충분하지만 결코 완전한 설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섹스/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렵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섹스와 공포』에 대한 이같은 ‘트집’은 사실 부질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섹스와 공포』를 읽는다는 것은 아우구스투스 혹은 정치를 읽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섹스와 공포』에는 ‘키냐르의 문장’이 있다. 보라, 이 아름다운 문장 혹은 우리들의 슬픈 육체와 운명을.

“밤은 하나의 세계이다. 행복에 속했던 무엇이 성교 중에 사라진다. 가장 완벽한 사랑, 행복 자체에도 갑자기 모든 것을 죽음 속으로 전복시키는 욕망이 들어 있다. 쾌락의 와중에 난폭하게 범람하는 무엇은 심리적이지 않은 슬픔으로, 그리고 두려움을 주는 무기력으로 극복된다.

물기 없는 눈물들이 서로 뒤섞인다. 쾌락에는 궤멸하는 무엇이 존재한다. 그것은 가슴을 저미는 타인에 대한 연민이다. 우리에게 불가능한 순간에 대한 느낌이다. 과거에 느꼈으나 무엇에 대해서인지 모르며 다시 불러들일 수도 없는 질투이다.

기쁨으로 충만했던 음경의 수축은 갱신 불가능의 느낌과 겹쳐지면서 울고 싶은 욕망과 비슷해진다. 우리는 많은 동물이 산란을 하거나 짝짓기를 하는 순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무엇이 끝난 것이다. 가장 강렬하게 사랑할 때 무엇이 끝난다.(p.224~225)

당신들에게 섹스를 권할 수는 없고 책을 권해야 하는 노릇이니, 읽다가 뭉클해진 대목을 다시 인용하나니, 부디 천천히 느껴보시길.

“…자신의 책을 벤치 위에 놓는다. 그리고 무화과나무 아래로 가서 눕는다. 정원 담장 너머에서 어린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집어들고 읽으라. 집어들고 읽으라." 그러자 곁눈질로 벤치 위의 책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p.250~251)

추신. 나는 왜 이 대목에서 울컥했을까? 위 인용이 실린 장의 제목은 <리베르>이다. 옮긴이의 주에 따르면 라틴어 Liber는 리베를 신을 가리키고, 소문자로 쓰면 ‘자유로운(형용사)’ 혹은 ‘책(명사)’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과 자유와 책이 하나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그 안에 섹스가 있지 않은가. 그 황홀경! 그 황홀경을 애써 잃고 사는 나태한 삶에, "집어들고 읽으라Tolle, lege"라는 정언명령이 죽비처럼 내리쳤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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