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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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06일 09: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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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 한 번 타지 못한 터라 다른 나라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두 가지 오해

    첫 번째 오해는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는 이른바 영적인 신앙인들은 결국 보수적(친미적이든 친한나라적이든) 입장을 가지게 되고, 기도도 하지 않고 룻이 여자인지 롯이 여자인지도 모르는 신앙인들은 결국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곧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색과 구도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세상만사에 대해 ‘감사’하게 되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황희처럼 네 말이 옳구나, 네 말도 옳다, 허허, 당신 말도 옳소, 라는 식으로 모든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맞장구칠 수 있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투캅스의 안성기처럼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돌아다니다가 일요일, 수요일에 예배당에 앉아서 눈물 찔끔 흘리고 십일조 봉투를 내미는 사람을 예수께서 장하다고 하실까? 전두환을 앞에 두고 하늘이 내린 영도자라고 칭송했던 목사들을 예수께서 충성했다고 칭찬하실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는 까닭은 성경 자체를 제대로 모르고, 스스로 고민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모범으로 삼을만한 신앙인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블룸하르트의 성장 배경, 영적 경험

       
      ▲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1842~1919)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 1842~1919)의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는 대단히 유명한 목회자였으며 치유자였다.

    아버지 블룸하르트가 1844년 카타리나라는 여자 교인의 병을 고치고 난 후, 참회운동이 온 마을을 휩쓸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모여 죄를 고백하고, 알콜중독자들이 술을 끊고,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왔으며, 병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되었다. 예배를 마친 후에도 아버지 블룸하르트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열려져 있는 서재 창문을 통해서 병이 낫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1852년 목사직을 사임하고 괴핑겐 근처로 이사했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도움받길 원했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자기 자신의 부족한 면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양친과 그들을 늘 가득 채우고 있던 영적 온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나는 늘 소외감을 느꼈고 그러한 생활은 나와는 거리가 먼 뭔가 거룩한 것이었고 내 영혼을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기의 내적 확신보다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유명한 신앙인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과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1872년 고트리빈 디투스(카타리나의 언니)의 영면을 지켜보면서 당시 30세이던 블룸하르트는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 사도들이 어떻게 설교했는지 이해할 정도로 “이상스러운 탄생”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후 블룸하르트에겐 모든 의심과 불확실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블룸하르트는 아버지에게 오는 엄청난 양의 편지를 맡아 썼고, 목회일도 대리했다. 1880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블룸하르트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회의감

    더 많은 사람들이 블룸하르트를 찾아오는데, 정작 블룸하르트는 회의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블룸하르트는 병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더럽혀 놓은 온갖 것을 다시 깨끗하게 해 놓아야 한다는 식으로,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갈취하는 방법으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면 거기엔 허위가 남게 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늘 이기적 성향이 깃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향한 구걸을 그만두고 어떻게 죄를 인식할 것인지,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하느님의 정의를 따라 노력하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에게 용납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으시오.”

    개개인의 고난을 중요시하지 말고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기적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하느님 나라와 그 의에 봉사하는 것을 원했다. 블룸하르트는 개인 뿐 아니라 교회의 이기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교회를 향해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라고 했다.

    보다 넓어진 시각과 공개적인 ‘편들기’ 

    이후 블룸하르트는 보다 넓은 시각으로 사회운동을 벌였다. “예수는 많은 대중, 프롤레타리아 등 자기를 주장할 수 없는 자의 편이었다. 기쁜 소식이란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얻어야 할 내용이다.”

    블룸하르트는,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주님과 함께 사회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당시 교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블룸하르트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거룩한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운동을 반교회적인 태도, 무신론적인 태도라고 몰아붙였다.

    밧볼에서 조용히 지내던 블룸하르트가 공개적으로 사회 문제를 거론하게 된 계기는 이른바 ‘교도소 법률안’이었다. 이는 ‘기업의 노동관계 보호를 위한 법’의 초안인데 1899년부터 작성된 것이었다.

    당시 교회는 파업을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했다. 문제가 있으면 기업주의 양심에 호소하거나 최악의 경우 자선 사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블룸하르트는 자본이 갖는 악마적 속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 법안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노동자들 편에 서기로 했다.

    그는 1899년 9월 19일, 괴핑겐에서 열린 항거대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나는 지금 알려진 법안이 제국의회에 상정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정된 후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공중 앞에 나서서 거기에 대한 반대입장을 천명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의에 반하는 범죄입니다.”

    그의 등장은 위축되어 있던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블룸하르트는 1899년 10월 2일 두 번째 집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오늘날 노동계급의 편에 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지극히 적은 자들에게 속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리와 죄인들을 자기의 친구로 선언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편이 되고 내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한다고 비난할 사람이 있습니까? …… 1900년 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제 우리가 다시 실천하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우리가 그것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되어야 합니까?”

    민주주의적 신문인 「호펜스타우펜」은 그의 연설을 “사회민주주의의 신봉자 블룸하르트”란 제목으로 뽑아 호외로 발간했다.

    이때까지 블룸하르트는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그가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사람들은 블룸하르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블룸하르트는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특별한 해명없이 공식적으로 입당했다. 그러자 교계와 정치계의 신문들이 본노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블룸하르트는 천대받는 개개인을 돕는 것보다 멸시받는 계급의 편에 서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 때문에 그때까지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그렇게 됐다.

    비템베르그주교회는 그에게 목사직과 그 외 다른 직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해왔고 그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라고 했으나 블룸하르트는 교회와 싸우지 않았다. 이후 블룸하르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종교적, 정치적 강연들을 했다. 비템베르그 지방의회에 사회민주당 후보로 추천되고 당선되기도 했다.

    여전히 깊은 영성을 지녔던 블룸하르트

    블룸하르트는 1906년 지방의회 의원 임기를 마치자 재출마 권유를 물리치고 팔레스틴(이스라엘) 여행길에 오른다.

    그는 1888년까지 대전도운동을 전개하고 병자들을 고쳤으며 그후 약 10년 동안 명상과 피정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하느님 나라’를 강조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블룸하르트의 여정이 왔다갔다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정작 블룸하르트의 생각은 초지일관 ‘하느님 나라를 기다림’이었다.

    그에게 기다림의 공동체는 곧 이 세상에서 실현될 하느님 나라의 교두보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예수가 승리한다!’는 확신 가운데 살았다. 여동생 안나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주름살 투성이의 손을 가슴에 얹고 조용히 누워 있거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하고 속삭였다.”
    1919년 8월 2일 영면한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예수가 승리했다는 것은
    영원히 남으리라.
    온 세계는 그의 것이 되리라.

    ※ 이 글은 『혁명적 신앙인들』(1987년, 손규태 편저, 한국신학연구소 펴냄)을 주교재로 블룸하르트의 삶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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