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몰라서 '찬양축가' 부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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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04일 12: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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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연주 KBS 사장(사진왼쪽)과 최문순 MBC 사장 (사진=미디어오늘)
     

    1. “이제 선배라고 부르겠습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cbs가 장장 9개월에 걸친 방송 사상 최장의 파업을 했던 사실 말입니다. 석달이나 지났을까, 한 기자가 술자리에서 저에게 이제 선배라고 부르겠다고 하더군요. 나중에야 언론계에서 상대방을 인정하는 최고의 ‘존칭’이 선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난 날, 힘들던 시절 얘기를 굳이 꺼낸 것은 앞으로 두 분을 선배라고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제가 아직도 두 분을 존경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조폭 언론’이라는 말을 내세워 곡필 언론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정선배나, MBC의 노조 위원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기자로서 정론 보도란 무엇인지 보여 준 최선배를 저는 기억합니다.

    물론 사장이란 직업은 기자와 다르겠죠. 해 보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직업의 고충을 제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또 실제로 정규 방송 노동자로서 일해 보지도 않았으니 저에게는 두 방송사에서 흘러 나오는 갖가지 아름답지 못한 얘기를 두고 시비할 자격이 없습니다. 단지 방송사 사장은 돈도 벌어야 되지만 동시에 정론직필에도 책임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에 기대어 이 글을 씁니다.

    2. 지금 두 방송사의 보도는 정론직필일까요?

    어제 한미 FTA에 관한 여론조사가 일제히 발표됐습니다. 대체로 “한미 FTA가 미국 뜻대로 흘러 간 건 사실이지만 이왕 타결된 것, 이제 그대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의 흐름이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타결’이라고 하는, 하나의 매듭이 주는 효과가 가장 컸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별 의미도 없는 새해 첫날, 온갖 결심을 다 하는 것처럼, 한미 FTA도 타결로 일단락 됐으니 이제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한미 FTA의 내용을 알게 되면 국민 대다수가 반대할 수 밖에 없다고 굳게 믿는 저로서는 현재의 결과에 별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진실은 알려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그 진실이 언제 알려지는가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미 FTA가 먼 훗날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프로그램을 만드는 후배들은 서민들이 ‘그 때’ 겪은 어마어마한 고통의 원인을 다루면서 한탄에 한탄을 거듭할 겁니다. 터무니없는 정책 결정 과정, 일방적으로 밀린 협상 과정, 그리고 그 실체를 파헤치지 못한 언론을 낱낱이 밝히는 과정이 그리 속 시원한 일이기만 하겠습니까?

    KBS 스페셜-피디수첩-W-시사투나잇-쌈 그리고 뉴스들

    그러나 그 후배들은 당시에도 정론직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희열에 찬 흥분을 맛보기도 할 겁니다. 한미 FTA 전 과정을 통해서 반대 여론이 찬성 여론을 압도한 기간은 딱 한번 있었습니다. 작년 7~8월입니다. 바로 KBS 스페셜 두편, 피디 수첩 두편,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약값 문제를 다룬 W, 또 시사투나잇이 여러 각도에서 한미 FTA를 파헤쳤을 때입니다.

    놀란 청와대가 오히려 시청율을 부추기는 ‘오버’를 하고 급기야 ‘한미 FTA 체결 지원 추진위원회’라는, 우리 어법에도 어색한 이름의 조직을 급조해서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을 정도였죠.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물론 그 뒤로도 발군의 이강택 KBS 피디가 광우병을 취재해서 또 한번 국면을 흔들었고 ‘쌈’도 방송됐습니다만). 금년 초에도 분명히 여러 프로그램에서 취재를 하고 그림을 만들었지만 제가 기억할만한 ‘작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위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피디들이 만든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짧은 스트레이트 기사가 본령인 기자들이 한미 FTA와 같은 큰 덩치를 다루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또 특집 프로그램에 비해 자료의 수집, 분석 기간이 짧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정부 쪽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할 수 밖에 없을 법 합니다.

    한미 FTA타결 직후의 보도특집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타결 직후의 보도특집들, 그리고 작금의 뉴스들입니다. 저는 ‘고3때 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해서’ 이제 한미 FTA를 웬만큼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런 저까지도 TV만 켜면 바야흐로 ‘멋진 신세계’의 입구에 와 있다는 환각에 빠집니다. 과연 TV의 힘은 놀랍습니다.

    물론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 시청률도 나오지 않는 찬반 토론을 집중 편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루종일 반복된 뉴스에 등장해서 한미 FTA를 설명해주는 전문가는 전부 국책연구원 박사들, 재벌 연구소의 연구원들, 그리고 찬성으로 유명한 교수들이었습니다.

    단지 자유무역의 초보적 논리만 되뇌는 이들의 말을 일반 시청자들은 듣고 또 들어야 했습니다. 이 쯤 되면 저같은 사람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은, 반대자가 없으면 안되는 찬반토론의 형식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깔끔하게 만든 도표들의 수치는 여전히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시한 수치들이었습니다. 지난 해, MBC와 KBS의 특집 프로그램들이 허구성을 폭로한 그 수치들이 같은 방송사 뉴스 화면에서 버젓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반면에 민주노동당이 힘들여 작업한 새로운 수치는 보도조차 되지 않았습니다(저는 이 수치가 더 객관적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게 과연 ‘정론직필’일까요?

    3. 언론의 힘, 그리고 역사적 책임

    언론은 힘이 셉니다. 한 때 여론을 급반전시켰을 정도로 여전히 힘이 있습니다. 작년 7~8월의 그 피디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그동안 생각이 바뀐 걸까요? 또 제가 자문에 응해 인터뷰를 했던 프로그램들은 방송사 어느 구석에서 잠자고 있을까요?

    요즘 한미 FTA에 관한 보도나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순수’ 상업방송인 SBS가 오히려 더 낫다(반대하는 제 처지에서 볼 때)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KBS나 MBC가 상대적으로 더 정부의 입김에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설마 정선배나 최선배가 정부의 이런 저런 알량한 압력에 고개를 숙인 건 아니겠지요. 청와대 홍보수석실의, 천박하기 그지 없어 실로 희한하기 까지 한 역사 의식에 휘둘릴 리 만무하겠지요. 또는 자율 편성을 구실로 보수적인 간부들이 프로그램의 방향을 결정하는 걸 묵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 어마어마한 현재의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일에 사장이 아무런 권한도, 심지어 책임도 없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요?

    잘 아시다시피 우리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조중동이 노비어천가를 부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선배와 최선배가 앞장 서서 맞서 싸운 그들의 세상이 한미 FTA로 활짝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면에서 조중동과 대립해야 옳은 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한미 FTA는 대립해야 마땅한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런데 왜 침묵을 넘어 그들과 함께 한미 FTA를 찬양의 축가를 부르고 있는 걸까요? 정말 진실을 모르십니까?

    방송사가 반대를 해야 옳다는 게 아닙니다. 사실보도를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최소한 균형은 이뤄야 된다는 겁니다.

    현재의 상황이 연말까지 지속된다면 우리의 후배들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또 ‘KBS 역사 스페셜’에서 한미 FTA를 추진한 정부, 무기력하게 방관한 국회 뿐 아니라, 정선배와 최선배를 지목하면서 방송에도 책임을 묻게 될 겁니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겁니다. 정말 두렵지 않으신가요? “도대체 뭐가 문제야?” 이런 식으로 현재의 방송을 옹호한다면 이미 두 분은 우리의 선배가 아닙니다.

    한미 FTA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우리의 책임을 다 했을 때, 비로소 만들어질 그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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