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화된 체 게바라 추모행사의 쓸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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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02일 05: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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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츠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앨 알토’라는 마을 이 나온다. 이곳은 해발 4,000m 가까이 되는 고산지대이다. 볼리비아의 코디네이터였던 도리스는 사흘 동안 많이 아플 거라며 우리가 남미에 가기도 전에 고산병을 예고했다.

문화예술공간 COMPA와의 만남

그 아픔이 어떤 것인지 전혀 예감할 수 없었던 나는 어떤 대책도 없이 앨 알토에 도착했다. 물론, 고산병이 어떤 현상임을 미리 안다고 해도 낮은 분지에 익숙해 있는 나의 심장을 갑자기 고산지대의 심장으로 길들이기 위한 뾰족한 대책이란 게 없다. 그저 앨 알토에 발을 내딛은 이상 피해갈 수 없는 통과의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 거주권을 빼앗긴 사람들이 일구어낸 마을 ‘앨 알토’
 

앨 알토에 도착하자 피곤이 몰려왔던 우리는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 잠은 피곤을 다독여준 잠이 아니라 고산병의 입구로 인도하는 잠이었다.

잠들기 전까지 멀쩡했던 머리가 잠에서 깨어나자 깨질 듯 아프고 속이 매스꺼웠다. 아스피린이나 두통약은 물로 현지인들이 치료용으로 씹는 코카 잎도 소용없었다. 구토와 설사를 동반한 고산병에 시달리면서 3일 내내 침대에 누워서 끙끙 앓았다.

도리스와 COMPA 회원들이 안타까워하면서 코카차를 끓여주고 죽도 끓여주었지만 4,000m의 고지대를 처음 경험하여 정신 못 차리고 있던 나의 내장은 먹을 것을 전혀 받아들이질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 안나오지만 옆 침대에서 끙끙 앓던 선배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는 개미 같은 목소리로 ‘더 무서운 건 고산병으로 죽는 사람도 있다는 거야’라고 하자 마치 죽음의 문턱에 와있는 기분이었다.

앨 알토는 수도 라파츠에서 거주권을 빼앗긴 사람들이 올라와서 모여사는 마을이다.

모래먼지 날리는 척박한 땅, 지리적으로 물이 부족한 이 땅의 주민들은 2년 전, 볼리비아 정부가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여, 수도사업권을 초국적 수도회사인 일리마니사에 넘겨 수도공급 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동맹파업과 단식투쟁으로 일리마니 수도 회사를 몰아낸 저력을 갖고 있다.

이 가난한 마을 앨 알토 한 가운데에 문화예술 공간 COMPA가 우뚝 서있다. 이 곳은 20년 전에 독일인 ‘이반’이 창단한 극단으로 당시 이반은 볼리비아 앨 알토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는 고아들을 모아서 연극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전사했는데 그 역시 아버지의 피와 살이 묻혀 있는 볼리비아 땅의 민중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 문화예술공간
 

COMPA의 대표 이반과 회원들은 5층으로 된 문화공간을 직접 디자인하고 지었다. 쓰임이 다양하도록 칸칸이 나누어진 방들과 아담한 실내극장, 폐차된 버스 문짝들로 달아 놓은 화장실 문, 원형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어있는 이 곳은 놀이터 같은 느낌이 든다.

앨 알토의 주민들은 COMPA를 중심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하며 가난과 더불어 삶을 즐기고 있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에도 전통악기 ‘케냐’를 배우는 아이들, 지역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교사들과 주민들의 차분한 목소리, COMPA 배우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늘 활기차 있었다.

COMPA회원들과의 탈 워크숍

아직 고산병에서 해방되지 못해 어지럽고 메스꺼운 상태로 탈 워크숍을 시작했다. 고등학생, 대학생, COMPA를 방문한 프랑스, 아르헨티나 문화활동가들, 주방에서 일하시는 마리 아주머니도 열의와 호기심을 갖고 탈 워크숍에 참여했다.

볼리비아 참가자들 대부분이 말수가 적고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머물러 있었으며 차분했고 유난히 손재주가 좋았다. 이들이 만든 탈들은 하나 같이 아름다워서 보기만 해도 깊은 사연이 느껴지고 극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탈 제작을 모두 마친 참가자들이 각자의 탈을 착용하고 탈의 이미지에 이끌리어 걷기 시작했는데 두 팔을 활짝 펴고 움직이는 이들의 탈에서 자본과 문명이 결코 거세할 수 없는 원초적이고도 신화적인 꿈, 깊고 깊은 무의식의 에너지로부터 꿈틀대며 살아나는 영혼을 만날 수 있었다.

   
▲ 볼리비아 COMPA 회원들의 탈 워크숍 모습. 왼쪽은 자신이 만든 탈을 소개하고 오른쪽은 탈의 이미지에 이끌려 걷고 있는 모습이다.
 

워크숍을 하는 볼리비아 사람들의 몸을 보면서 남녀 모두 가슴이 넓다는 걸 발견했다. 고산지대에서도 가뿐히 뛰어다닐 수 있도록 적응된 큰 심장을 담고 있어서 그렇다는데, 지구상에서 심장이 가장 큰 동물, 기린이 떠올랐다.

머리 꼭대기까지 피를 돌게 할 수 있는 커다란 심장을 가진 초식동물 기린은 평화의 존재로 칭송받는다. 기린은 발아래의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멀리 내다볼 줄 알며, 무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달려들면 그 굵직하고 강한 발굽으로 단숨에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곳, 앨 알토의 사람들이 바로 기린을 닮았다. 이들의 투쟁을 담은 영상 <물을 향한 투쟁-바리케이트를 치며>를 보면 초국적 수도회사 일리마니사를 몰아냈지만 앨 알토 주민들은 그 핑크빛 결과에 도취하지 않았다.

모랄레스가 첫번째 원주민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그의 권력에 과도한 기대를 품고 있지 않다.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이나 명망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직면한 문제들을 직시하면서 공동체의 삶을 묵묵히 지켜나가고 있다. 

체 게바라 추모행사를 보며

체 게바라의 마지막 전투지였던 볼리비아는 그와 함께 게릴라 전투에 참가한 광부들, 농민들이 체와 함께 뼈를 묻은 곳이기에 볼리비아 사람들은 체 게바라를 자신들의 영웅으로 기억하고 추모한다.

체 게바라 39주기 추모행사가 있었던 라파츠 대학으로 갔다. ‘부네굿’도 추모행사의 일환으로 공연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취소되는 바람에 관람석에서 이 행사를 지켜보았다.

좌파성향의 대통령 모랄레스가 당선되자 체 게바라 추모행사가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진행되었다. 쿠바에서 의사로 살아가는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다도 연사로 초청되었다. 행사장 객석이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문밖에 서서 행사를 보았다.

원주민 전통의상을 입은 볼리비아 사람들은 물론, 베네주엘라의 젊은 활동가들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서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국경을 넘어왔다. 백인, 흑인, 황갈색의 피부 빛깔을 가진 사람들, 머리 희끗한 노인에서 10대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깃발과 피켓을 들고 참석했다.

볼리비아 국가와 쿠바의 국가를 나란히 부르는 것으로 행사가 시작되었고, 볼리비아 가수들의 추모 송가, 추모시 낭독, 추모 연설 등이 이어졌다.

쿠바에서 온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다는 눈매가 아버지와 꼭 닮았다. 부릅뜬 눈으로 늘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체 게바라의 눈매. 알레이다는 30분 가까이 연설을 했다. 에스파냐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녀가 미국의 전쟁 도발과 경제 침탈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 그녀의 아버지가 바랐던 혁명, 쿠바 볼리비아를 비롯한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힘주어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체 게바라 39주기 추모행사, 오른쪽은 추모 연설하는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다’
 

볼리비아에서 아주 유명하다는 어느 한 음악가는 전통악기를 들고 나와 조명의 암전과 녹음된 음향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안데스 음악을 연주했다. 옆에 앉아있던 COMPA 회원 오스카가 그의 연주가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COMPA 사람들의 구수한 노래와 음악 연주만 못하다고 했다.

좁고 높은 무대에서 몇몇 명망가들의 연설이 이어지고 몇 사람의 노래 공연만 양념처럼 곁들여지고 있는 추모 행사는 객석의 한계로 배제 당하는 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극장에 갇혀버렸다.

대통령과 함께 빅토르 하라 기념행사를 치렀던 칠레가 그러했듯이 국가 주도의 관변 행사에서는 혁명가의 정신이 오늘날 이 땅에서 어떻게 되살아나고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40여 년 전, 체 게바라가 만났던 볼리비아의 라파스, 헐벗은 대지, 이익은 언제나 수탈자들의 것이었고 진폐증만 남았던 광부들, 게바라가 사랑했던 그 대지의 아들 딸들을 이 행사장에선 만나볼 수 없었다. 그저 박제된, 형식화된 체 게바라의 이미지만 존재할 뿐이었다.

쿠바 혁명 직후,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며 고민했던 지점을 되짚어본다. 그는 러시아 국제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제국주의 근성을 보았다. 모택동 역시 제 몫 챙기기에 바빴다. 모스크바도, 모택동도 아니라며, 그들이 어떻게 나오든 그는 새 길을 닦고 싶어 했다.

자국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나에게 빵 한 조각이 있으면 내가 배고프더라도 굶고 있는 형제에게 나누어줄 줄 아는 하나의 남아메리카 대륙, 경제적인 동기가 아닌 형제애의 동기에서 완성되는 연대, 이것이 체 게바라가 꿈꾸었던 혁명이었으리라.

지금 남미의 여러 국가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대안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있는데, 나는 이들의 연대가 기린의 심장을 갖고 살아가는 앨 알토의 사람들과도 온전히 만나지는 연대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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