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베스는 부시와 닮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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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30일 01: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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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차 카이로 국제 반전회의에 참가하러 가는 길에 두바이 공항에서 10시간 대기하는 동안 이 글을 쓰면서 맨 먼저 든 생각은, 채진원씨가 자신의 글을 비평한(<맞불> 36호 관련 기사 참조) 나에게 고마움을 나타낸 것을 보며 동지적 우의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이 차베스의 성과를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밝힌 점도 반갑다. 차베스의 ‘연임제 제한 폐지’가 아직 실행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정정한 지적 정직성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물론 이 글에서 나는 채 실장의 주장에 여전히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을 짚어 보며, 이런 우호적 토론과 논쟁을 통해 우리 진보진영이 더한층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글 제목에서 그는 차베스가 부시를 닮아간다고 주장했다. 그가 댄 근거는 차베스가 미국을 ‘악의 근본’이라고 주장하고, 지난해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부시를 ‘악마’라고 부르고, 올해 2월 “미국 사람들(gringos)은 지옥으로나 가라.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하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부시가 이른바 불량국가들을 “악의 축”이라고 부른 것을 차베스가 흉내내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gringo’는 스페인어로 사전상의 정의는 외국인이라는 뜻인데, 라틴아메리카의 실제 용어법에서는 미국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아 미국식 가치관과 세계관, 정치경제 체제를 숭상할 뿐 아니라 이를 자국에도 적용하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국의 한미FTA 반대 운동 진영에서 “검은 머리 미국인”이라고 비난하는 통상교섭본부장 김현종 같은 자들을 일컫는 라틴아메리카식 용어법인 것이다. 예컨대, 2003년 볼리비아에서 천연가스 사유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추구하다 민중항쟁으로 쫓겨나 미국으로 망명한 당시 대통령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의 별명이 바로 “엘 그링고”(El Gringo)였다.

    따라서 차베스가 “지옥으로나 가라”라고 말한 미국 사람들은 실제 미국인들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특히 베네수엘라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며 차베스를 제거하려고 애쓰는 친미 우익 기득권 세력을 가리킨 말이다.

    그리고 부시가 말한 “악의 축”은, 채진원도 인정하듯이, “없는 적도 만들어” 내려는 딱지 붙이기였다. 반면에, 미국 대통령 부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지옥처럼 만들어버려 많은 사람들에게 “악의 화신”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 아닌가?

    무엇보다, 그가 인용한 <맞불> 기사에서도 밝혔듯이, 차베스의 ‘반미’는 자신의 주장과 달리 “미국 전체에 대한 획일적 반대”가 아니다. 채진원도 인용한 차베스의 유엔 총회 연설을 자세히 읽어 보면, 차베스가 미국의 부시 정부와 부시 정부의 정책 때문에 고통받는 평범한 미국인들을 분명히 구분하며 전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후자는 지지와 연대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 흑인과 빈민들에게 겨울철 난방유를 싸게 공급하는 차베스의 정책도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차베스가 “미국이 자신을 전복하려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며 마치 차베스가 근거 없는 오해를 하는 양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이 차베스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다는 것, 그래서 2002년 4월 베네수엘라 우익들의 군사 쿠데타를 사주, 지원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부시 정부와 각별한 관계인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 목사 팻 로버트슨은 차베스를 암살해야 한다고 선동하기도 했다.

    미국이 지금 당장은 이라크 수렁에 빠져서 군사적 여력이 없지만 언제라도 기회만 되면 차베스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할 태세가 돼 있음은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개입 역사와 현재 미국 지배자들의 이런저런 언행을 통해 “실증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사실이다.

    채진원은 차베스 지지자들이 “차베스를 절대화-신격화하기를 좋아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함께’는 차베스 ‘신드롬’이나 그의 개혁의 성과와 의의를 공감하고 지지하면서도 그 한계 또한 꾸준히 지적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1998년 집권 당시 차베스의 모호한 정치 노선(자본주의도 사회주의 아닌 모종의 ‘제3의 길’), 2002년 4월 군사 쿠데타 직후 기득권층과의 타협 시도, 노동자 공동경영을 주창하면서도 정작 베네수엘라 핵심 산업인 석유공사(PDVSA)에서는 공동경영을 미적거리는 것,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 무역 체제로 ‘미주 대륙을 위한 볼리바르 식 대안’(ALBA)을 주창하면서도 주요 동맹 세력인 브라질 룰라 정부나 아르헨티나 키르치네르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에는 침묵하는 것, 무엇보다 베네수엘라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와 기존 국가 기구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혁명의 핵심 문제”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 등을 계속해서 지적했다.

    우리뿐 아니라 마이클 레보위츠 등 다양한 급진 좌파들이 차베스를 지지하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하는 비열광적 태도를 취하고 있고, 베네수엘라 국내에서도 인터넷 웹사이트venezuelanalysis.com의 운영자인 그레고리 윌퍼트(미국인이다)나 신생 민주노총 UNT의 다수파 지도부도 차베스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는 차베스의 “반미-반자본-반세계화적 21세기 사회주의”가 단지 미사여구가 아니라 실제라면 “미국과의 교역 의존도가 줄어들거나 축소됐을 것”이라며, 따라서 차베스의 구호는 “레토릭”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미국과의 교역 의존도 심화가 반드시 차베스에게만 불리하지는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베네수엘라 경제의 핵심 축이 대미 석유 수출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때문에 미국의 부시 정부도 베네수엘라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래서 2002년 12월부터 2003년 2월까지 베네수엘라 자본가들과 우익들이 차베스를 제거하려고 경제적 사보타주를 감행했을 때 부시 정부는 그보다 8개월 전의 군사 쿠데타 때와 달리 베네수엘라 우익들을 선뜻 지원하지 못했다. 2003년 3월의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국제 유가와 미국내 원활한 석유 공급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베네수엘라의 대미 교역 의존도 심화는 미국에게도 불리한 조건일 수 있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세계체제였고, 맑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을 때보다 세계화가 엄청나게 진전한 오늘날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는커녕 자본주의라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몽상이다. 그러므로 차베스가 몽상을 추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그의 ‘반미’가 진정성이 없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아울러, 몇몇 다른 쟁점들도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다. 채진원은 ‘서로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속담의 실증 사례로 북한 지도부와 미국 네오콘의 관계를 든다. “북한 지도부가 네오콘의 극단성을 키워 주었는지 거꾸로 네오콘이 북한 지도부의 극단성을 키웠는지 알 수 없다”며 사실상 양비론을 편다.

    그러나 북한 핵실험이 미국의 오랜 대북 적대 정책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어지간한 좌파들뿐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조차 시인했을 만큼 한국 국민 다수의 “공통 감각”(common sense), 즉 ‘상식’이다. 미국의 패권주의적 횡포와 만행은 한국의 대다수 “생활세계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도, 채진원과 완고한 포스트맑시스트, 포스트모더니스트들만 애써 외면하거나 모르는 듯해 안타깝다.

    채진원은 또 중세의 교황 정치, 자코뱅 독재 정치,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령 정치를 모두 한 묶음으로 취급한다. 프랑스 대혁명 때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한 자코뱅과 중세의 교황 정치가 비슷하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형식주의적 사고 방식의 전형이다. 어느 재치 있는 맑스주의자가 말했듯이, 자코뱅이 나중에 자신들이 수도원 토지를 몰수할 줄 알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당파 이름을 자코뱅이라는 수도원 이름에서 따오지 않았을 것이다.

    채 실장은 “이데아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진보-보수의 이념 논쟁으로 진보의 이미지는 보수와 다를 바 없이 신선하지 못하다”며 “김종철 서울시장 후보의 사회주의 독트린”이 그런 사례라고 제3의 길 정치인처럼 주장했다. “보수 대 진보의 대립 구도는 다양한 가치들을 배제하거나 부정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 환경, 생태, 여성, 인권, 개성, 문화다양성, 지방 등등의 다양한 가치를 보장하고 추구하는 “진보” 정당이 바로 민주노동당이고, 그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대안 사회의 상(像)이 “국가 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당 강령)이고, 김종철 전 서울시장 후보는 이를 지방선거라는 “정치적 공론장”에서 다수의 “생활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고 “소통”하려 노력했다.

    물론 김 후보의 사회주의 개념이 법률적 공공성 개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원론적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사유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반대한다는 구체적 맥락 속에서 이런 비판은 추상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저런 우여곡절 때문에 그마저도 제대로 선전, 선동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고 비판한다면 그건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김 후보의 “사회주의 독트린”이 채진원의 논거를 바탕으로 비판받을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보수 대 진보의 대립 구도를 추구하는 “정파적 편가르기는 이념 경쟁에 지친 생활세계의 사람들을 더욱 피곤하게 할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생활세계의 사람들”이 살면서 경험한 바, 즉 “생활세계” 자체에 물질적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생애 말년에 포스트맑시즘으로의 길을 열어 준 맑스주의자 알튀세르도 지적한 바다.

    그는 민주주의가 “‘시민의 지배’라는 개념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실질적 참여(양적 측면)와 토의(숙의)를 통한 합의적 공동체(질적 측면)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지배할 수 없는 비지배(non-domination)적인 상태를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실 사회는 사회 성원들이 서로 적대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하고 충돌하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채 실장이 꿈꾸는 “합의적 공동체”는 불가능하고, 민주주의의 핵심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느냐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은 소수의 자본가 지배계급이 다수의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려고 만든 지배 장치로서, 겉보기에 소수가 다수의 견제와 통제를 받는 듯한 형식적 선출 과정을 거치지만, 진정한 권력자들(재벌총수들과 군대, 경찰, 감옥, 법원 등의 수뇌부)은 다수의 견제와 통제를 받지 않는다.

    물론 피억압 대중 운동의 활동가들은 활동 공간을 더 넓히고자 활동 공간을 권위주의적 공세에 맞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자유권들(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방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채진원은 PD가 민족주의를 반대하다가도 국가 대 국가의 대결 국면에서는 민족주의 흐름에 휩쓸리고 말기 때문에 PD는 결코 NL을 넘어설 수 없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운동에 대한 인식이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PD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돼 식민지 지배의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겪은 한반도 주민들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불안정과 무력 충돌 위협 속에서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정치 경향이 등장하고 성장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사실을 보아넘기는 경향이 있다.

    채진원과 대다수 PD 동지들은 이런 제국주의 열강의 횡포와 협박을 이에 맞서는 저항과 동등하게 비판하기 때문에 반제국주의 운동에서 항상 NL보다 뒤처지게 되는 것이다. 아베의 위안부 망언과 그 망언에 울분을 터뜨리는 할머니들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동으로 서로를 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남을 탓할 뿐”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요컨대, 차베스가 박정희와 닮았을 뿐 아니라 부시와도 닮아간다는 채진원의 주장은 대다수 “생활세계 사람들”의 경험과도 맞지 않고 오직 고도로 추상적인 사고에만 탐닉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형식주의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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