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버려진 장소에는 이야기가 있다
    [책소개] 『지도로 보는 인류의 흑역사』(트래비스 엘버러. 성소희(옮긴이)/ 한겨레출판)
        2023년 06월 10일 09:16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한때 화려한 영광을 누렸으나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장소, 폐허. 이런 폐허들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폐허에는 ‘쓸모 있는’ 교훈이 가득하다. 어리석음과 오만, 차별과 편견 등 인류가 저지른 수많은 흑역사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탈옥하지 못한 것으로 악명 높은 앨커트래즈 교도소에는 가혹한 형벌의 폐해가, 소금사막으로 유명한 우유니의 기차 폐기장에는 세상의 변화를 미리 읽지 못한 어리석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디언(The Guardian)》이 선정한 ‘영국 최고의 대중문화역사가 중 한 명’이자 《사라져가는 장소들의 지도》 《별난 장소들의 지도(Atlas of Improbable Places)》 등을 집필한 ‘이색 명소 전문가’ 트래비스 엘버러는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인 폐허” 40곳을 통해 우리를 크고 작은 흑역사의 세계로 이끈다. 폐허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전에 미처 몰랐던 절반의 세계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오직 죽음만이 현실이다”…예정된 파국을 피하지 못한 장소들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예정된 운명이 이루어진 곳〉은 쓸쓸한 최후를 암시하는 징조가 있었지만 끝내 파국을 맞은 장소들을 다룬다.

    포르투갈의 도나시카성은 파우메이라의 지주였던 주앙 주제 페헤이라 헤구가 자기 부부의 결혼을 기념하려고 지은 건축물이다. 하지만 이 부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깨지면서 건축이 중단됐다. 건축가는 처음부터 이들의 운명을 예견한 듯 고딕, 아라베스크, 낭만주의 등 다양한 양식이 충돌하는 성을 지었고, 끝내 완공되지 못한 성은 황폐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덴마크의 루비에르크누드 등대는 인간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자연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크누트 대왕의 경고가 현실이 된 곳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크누트 대왕은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칭송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왕좌를 바닷가로 옮긴 뒤 바닷물에 ‘멈추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바닷물은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아첨꾼들은 몸을 흠뻑 적신 후에야 잘못을 뉘우쳤다. 루비에르크누드 등대 또한 바다가 해안선을 계속 갉아먹으면서 쌓여 드는 모래더미를 감당하지 못해 1968년 폐쇄됐다. 2019년 내륙 쪽으로 옮겨졌지만, 이 등대의 운명이 얼마나 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세상의 변화에서 끝내 도태되다〉에서는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지 못해 폐허가 된 공간들을 기록한다.

    미국의 케니컷은 ‘에디슨의 꿈이 묻혀 있던 곳’이었다. 그가 발명한 전구와 전기 제품에 전력을 공급하려면 구리가 필요했고, 케니컷은 당시까지 발견된 구리 매장지 가운데 구리가 가장 풍부한 곳이었다. 수백 명의 광부가 구리 광산 붐을 타고 케니컷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구리 매장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1938년 광산 다섯 곳과 철도가 폐쇄됐다.

    스웨덴의 그렌게스베리는 유럽 전역에서 생산되는 철의 1/4이 나는 베리슬라겐 지방에서도 가장 풍부한 철광석층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1990년 광산이 문을 닫은 뒤로 300년 넘게 그렌게스베리를 지탱한 광산업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고, 다 허물어진 주택이 더 자주 눈에 띈다. 그렌게스베리는 이후 ‘감록켄’ 음악 축제를 주최하며 헤비메탈을 기반으로 한 산업을 육성하려 했으나, 감록켄 주최 측이 “오직 죽음만이 현실이다”라는 자료를 발표할 정도로 심각한 재정난을 겪으면서 그마저 실패했다.

    소금사막의 땅에 세워진 ‘열차들의 무덤’…찬란한 영광의 잔해들

    〈시간의 무게에 잠식되다〉는 한때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광지였지만, 지금은 누구도 찾지 않는 곳들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의 샌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철을 강조한 휴양지로 1950년대에 크게 번성했다. 마을 우체국은 “발신인: 산타클로스”라는 소인이 찍힌 편지를 보내주는 서비스로 인기를 끌었고, 여관에서 파는 ‘산타할아버지 럼파이’도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를 연결하던 66번 국도가 다른 도로에 대체되다가 1985년에 공식 폐쇄되면서 마을도 함께 몰락했다. ‘크리스마스의 수호성인’을 연상시키던 이곳은 이제 ‘크리스마스 유령’을 떠올리게 한다.

    아서왕의 전설을 모티브로 만든 영국의 카멜롯 테마파크도 한때는 한 해에 100만 명이 방문하는 명소였다. 관광객들은 테마파크 정문을 통과한 후 멀린의 마법사 학교에 입학하거나, 마상 창 시합을 구경했다. 하지만 관광객 수가 점점 줄더니 런던 하계올림픽과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 60주년 행사가 열린 2012년에 결국 문을 닫았다.

    〈찬란한 영광의 잔해〉는 과거 눈부신 번영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쇠락한 장소들을 다룬다.

    소금사막으로 유명한 볼리비아의 우유니 근처에는 ‘열차들의 무덤’이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영국은 초석 등의 천연자원을 운송할 목적으로 철도를 세우고, 주요 환승역을 우유니에 건설했다. 하지만 인공 질산염의 등장으로 볼리비아 초석에 대한 수요가 줄면서 철도 사업도 쇠퇴했다. 한때 신흥 철도 도시였던 우유니 근처에는 녹슨 증기기관과 객차가 줄지어 앉은 우유니 기차 폐기장이 생겼다.

    시청 지하철역에서는 ‘성공의 역설’을 읽을 수 있다. 뉴욕 최초의 지하철망 IRT에서 가장 유명한 역이었던 시청 지하철역은 샹들리에와 스테인드글라스 천창 등의 화려한 건축 덕분에 ‘지하의 대성당’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시청 지하철역이 이끈 지하철의 성공이 역설적으로 폐쇄를 불러왔다. 철도망이 확장되고, 신규 노선이 추가되자 구조상 승객이 더 많이 탈 수 있는 긴 열차를 도입할 수 없던 시청 지하철역은 1945년 문을 닫았다.

    폐허, 그 쓸모없음의 쓸모

    〈오래된 이야기의 마침표〉는 차별과 혐오 등 시대의 어둠을 증언하는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간다의 아캄펜섬은 과거 이 지역 여성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보여준다. 처녀성을 잃지 않은 딸은 비싼 결혼 지참금을 받을 수 있는 값비싼 ‘상품’이었지만, 결혼 전에 임신한 여성은 가족의 잠재적 수입을 빼앗은 데다가 먹여 살릴 입을 늘린 ‘죄인’이었다. 그들은 먹을 것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이 외딴섬에 유배되어 굶어 죽거나,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랫동안 젊은 여성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던 아캄펜섬은 분요니호수의 수위가 계속 높아짐에 따라 머지않아 물 아래로 ‘사라질’ 예정이다.

    이탈리아의 볼테라 정신병원은 정신병자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의 증거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정신병원 중 하나였던 이곳은 많은 환자를 관리하기 위해 병원보다는 감옥에 가깝게 운영됐다. 인슐린으로 유도한 코마 상태, 전기 충격 요법 등의 끔찍한 치료가 수시로 행해졌고, 환자들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일을 막기 위해 가족들이 쓴 편지를 전하지 않았다. ‘결코 전달되지 않는 편지들의 보관소’였던 이곳은 1978년 폐쇄됐다.

    이처럼 ‘쓸모없는’ 장소들, 끝내 소용없어진 장소들은 “덧없음과 소진, 흥망성쇠, 산업화와 환경, 인류의 오만, 신뢰할 수 없는 기억과 기념”에 관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폐허는 미래를 읽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자연 앞에 한없이 무력하면서도 자연을 파괴하는 오만, 여성‧정신병자‧흑인 등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혹한 차별을 묵묵히 증언한다. 그것이 폐허의 쓸모이자, 폐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