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과 침대 고도 1m 차이의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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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28일 08: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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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비를 제외한 모든 것이 무료란 사실이 끝내 잘 믿기지 않았던 1주일이 지나고 아이와 함께 집에 돌아왔을 때, 침대 위에 때 아닌 무당벌레가 한 마리 올라왔다. 어쩌자고! 그 무당벌레와 빤히 눈을 맞추노라니, 희완이 들어와 이건 행운의 상징이라며 호들갑을 떨어준다. 그러나 그날부터 난 한동안 걷잡을 수 없는 우울과 싸워야 했다.

같은 집 다른 고도(高度)

그러저럭 지낼 만했던 집에 갑자기 정이 떨어졌던 것이다. 엄마로서의 본능인지, 한국여자의 본능인지, 새끼를 품고 몸을 누일 따뜻한 구들장이 사정없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침대 말곤 누울 데가 없고, 딱딱한 의자가 아니면 앉을 데가 없는, 차가운 돌바닥의 공간에서 아이를 과연 키울 수 있을지.

아쉬운 대로 쿠션 몇 개, 이웃이 안 쓰는 소파 하나를 끌어다 놓았으나 뜨끈한 바닥을 대신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집은 서향. 햇빛도 구경하기 힘들었고, 전기장판은 전자파 위험이 커 논외였다. 이사를 가지 않는 한 방법은 없었다.

갑작스런 내 불만은 하늘을 찔렀지만 희완은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25년 넘게 지내온 공간에 대한 모독을 곤혹스러워 했다. 지금은 파리의 팽창으로 중심가가 되었지만, 이사 올 당시만 해도 바스티유는 형편없는 빈민가였고, 이 집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주변에서 버린 쓰레기가 그득했고 천정은 뻥 뚫려 있고, 벽만 덜렁 있었단다. 그에겐 수년에 걸쳐 이 집을 자기 손으로 환골탈태시켜 놓은 것에 대한 자부심과 끈끈한 애정이 있었다.

지금도 내가 무릎을 끌며 방바닥을 걸레로 훔치고 있으면, 꼭 그렇게 해야 하냐며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는 완벽한 스탠딩 문화 속의 그가, 엉덩이가 ‘따땃한’ 바닥에 닿아야 비로소 몸의 평화를 누리는 날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평화를 느끼는 고도의 1m 정도의 차이는 두개의 이질적 문명이 처음으로 심각하게 충돌한 지점이었다.

길에서 한 산후조리

내가 강구해낸 해결책은 집 밖으로 나가는 것. 그해 봄, 이곳 사람들처럼 잠깐 일하고 긴 바캉스를 떠나버리곤 하는 봄날의 태양에게 아쉬운 대로 위로를 구하며 아이를 데리고 무수히 산책길에 나섰다. 그리고 그 산책길에서 뜻밖의 다른 위로를 만날 수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거리를 걸으면 무표정하게 마주오던 사람들(특히 여성들)이 우릴 향해 환하게 웃었다. 원님 덕에 나발부는 격이었지만, 한편으론 이건 내가 세상에 일찍이 할 수 없었던 매우 구체적인 기여였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함박웃음 선사하기” 그보다 더 구체적인 공동선을 행할 자신이 앞으로도 별로 없다. 엄마에게 아이는 사랑의 복잡한 줄다리기 없이 마음 닿는 대로 주어도 되는 사랑의 대상인 동시에 다른 이들에겐 무턱대고 호감을 드러내는 것이 허락되는 표정관리의 치외법권 지대였던 것이다.

우릴 향해 미소 짓고 때론 고개까지 길게 빼고 아이를 들여다보는 이들에게 미소로 화답하지 않을 수 없는 법. 그러다 보니 낯선 이들과의 수다가 슬슬 늘기 시작했다. 아이는 나에게 세상을 향한 또 다른 창이었다. 그 창으로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기웃거렸고, 난 아이가 살아갈 세상과 친해지고자 새침함을 떨궈내고 넉살좋은 사람으로 급속히 변신 중이었다.

전통적 산후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어차피 병원에서부터, 다른 산모들은 출산직후 샤워를 하는데, 난 1주일 동안 물을 묻히면 안 된다는 관습을 지키려다, 간호사의 호령에 못 이겨, 사흘째 날, 샤워를 감행한 터였다.

뜨끈한 방에 누워있기는커녕, 봄바람 부는 거리를 싸돌아다녔으니, 20년 후가 걱정스럽긴 하지만 방구석에 앉아 불만을 쌓는 대신 낯선 이들과 헤픈 웃음을 주고받으며 다른 세상을 발견한 것은 분명 나은 선택이었다.

바스티유의 3일 장(場)

구립도서관에서 빅토르 위고의 집이 있는 보쥬 광장으로 이어지는 산책코스 가운데 가장 역동적인 흥분의 지대는 바스티유의 장이었다. 두 개의 지하철 역 사이에 길게 늘어선 장은 목요일과 일요일에 열리는데 모든 장이 그렇듯 있을 건 다 있었다.

수백 가지 향신료를 파는 신비스런 분위기의 향신료장수, 직접 만든 어마어마한 치즈를 파는 치즈장수, 꽃장수, 책장수, 아프리카 공예품 장수,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각종 먹거리. 동전 몇 개만 들고도, 사흘 치 반찬은 너끈히 산다. 걸쭉한 구라와 시장 특유의 파닥거리는 어휘들 속에서 파리지앙의 우아함이 홱 달아나는 곳이기도 하다.

   
  ▲ 바스티유 장 (Marché de la Bastille)
   
   ▲ 바스티유 장의 유기농산품 매장
 

그중 가장 나의 흥미를 끄는 장사는 단연 신문장사였다. 그는 아사히신문 뉴욕타임즈, 프라우다지를 비롯, 가히 전 세계의 신문을 팔았다.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시사저널 등 한국의 일간지 주간지들도 넉넉히 구비되어 있다.

조선일보를 집어 들면 우, 한겨레를 집으면 좌, 시사저널은 중도좌파 이런 식으로 제법 성향에 대한 분석도 하는 신문장사는 신문을 집어 든 독자에게 주요기사에 대해서 묻기도 하면서 세상을 향한 그의 진지한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토요일이면 이 거리는 화가들이 작품을 직접 그려 파는 미술 장(場)으로 변한다. 갑자기 한산해지는 그 미술 장엔 사는 사람보다 구경꾼이, 구경꾼보다 화가들이 많다. 손님이 거의 없는 관계로 서로 다른 사람의 부스에 가서 평을 하기도 하고 싸온 도시락을 나눠먹기도 하는 풍경은 언제나 우릴 쓸쓸하게 했다.

희완은 토요일 오후의 이 산책에는 언제나 동행하였는데, 매주 예술가들의 장을 거닐며 실컷 눈의 호사를 누리던 우린, 어느 날 그들에 대한 동지애를 실천하기 위해 큰맘 먹고 눈여겨둔 그림을 사기도 했다. 45유로. 일주일치의 반찬 값이었지만, 한 예술가에게 적어도 공치는 하루가 아닌 것으로 충분히 기뻤다.

유럽헌법 국민투표와 아탁(ATTAC) : 반신자유주의 진영의 놀라운 승리

출산 후 1개월, 길 위에서, 한참 세상과 다시 사귀고 있을 그 때는 바야흐로, 유럽헌법을 위한 국민투표를 불과 한달 여 남긴 숨가쁜 시점이기도 했다. 사회당의 당내 선거가 찬성으로 결론나면서, 결과에 불복종한 사회당의 2인자, 로항 파비우스가 독자적으로 반대를 위한 운동에 나선 것을 기화로 논쟁은 더욱 가열되고 있었다.

찬성의 승리를 낙관하던 정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좁혀드는 찬성과 반대 지지율의 격차에 당황하면서 선전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유럽통합의 중심적 역할을 해왔을 뿐 아니라, 헌법의 기초를 작성한 프랑스에서의 유럽헌법 부결은 현 정권에 대한 크나큰 정치적 타격이기도 했다.

사람이 집중적으로 모여드는 장터는 찬성측이나 반대측 모두에게 놓칠 수 없는 선전장이었다. 4월부터는 매번, 바스티유 장에서 아탁(ATTAC: 반세계화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반대진영을 대표하는 거의 유일한 운동가들이었다.

   
  ▲ 아탁의 로고와 아탁 활동가 시위
 

아탁의 활동가들은 단순히 전단을 나눠주는 데 그치지 않고, 웬만하면 토론을 했다. 특별히 준비된 멘트가 있기보단,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 위주로 설명하며 보통 10~15분 정도 걸린다. 물론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한 사람에게 내가 가진 신념을 마음으로 전달하게 하는데 드는 최소한의 시간이고 한 사람의 마음속에 형성된 신념은 전염의 효과를 낳을 터였다.

448개조에 달하는 유럽헌법은 신자유주의를 영원히(한 번 통과되면, 만장일치로 원할 때만 한 글자라도 고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음) 유럽사회를 움직이는 유일한 법칙으로 성문화 시키려는 영악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아탁은 바로 이러한 유럽헌법이 담고 있는 덫을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이 작성한 21개 조항의 새 유럽헌법 안을 제안하고 있었다.

바스티유 장에서 만난 스위스 출신의 한 아탁 활동가. 전혀 운동가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 ‘댄디’한 분위기의 교사인 그는 투표권은 없지만 열띤 관심을 보이는 나에게 열성적인 설명으로 화답하며, 내 관심의 진앙을 궁금해 했다.

당시 <진보정치>에 유럽헌법의 소식을 전하기로 되어있던 나는 민주노동당을 소개하고 거기에 글을 써야한다고 하자, 이번엔 본업을 잊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질문을 또 이어가는 천진한 운동원…

대화는 옆의 활동가까지 가세, 족히 반시간 동안 이어졌다. 이토록 인간적인 개미군단이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약간의 우려를 품으며, 투표를 일주일 앞둔 당시, 아탁이 예측하는 승리에 대한 확률을 물었을 때, 그들은 승리를 전혀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 정부를 비롯해서 무늬만 좌파인 사회당, 거대 노조연합들까지 가세하여 오로지 찬성만이 답임을 강요했고 모든 미디어들은 거의 반이성적으로 정부를 위한 대국민 협박의 도구를 자처했으므로 객관적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비판적 시사주간지 마리안느(Marianne)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부분 언론들이 전한 메시지는 북한식의 선명한 이분법이었다 : 배우고 지성 있는 사람들은 찬성표를 던질 것이고 멍청한 인간들과 파시스트들만이 반대표를 던질 것이다.” 마리안느는 또한 이번 투표전을 “병사과 장교들의 싸움, 목소리가 없는 자와 목소리를 가진 자의 싸움”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투표일이 가까워 올수록 강도를 더해갔던 미디어의 협박에도 불구, 이 사회의 55%에 해당하는 졸병들은 과감하게 반대에 표를 던졌다. 반대의 승리. 그러나 어떤 언론도 이날의 결과를 승리로 기록하지 않았다.

   
  ▲ 유럽헌법 부결을 외치는 시민들
 

거의 모든 프랑스의 언론과 더불어 모든 외신은 실패로 이날의 투표결과를 알렸다. 혹은 극우파의 반동적 목소리가 크게 반영된 것처럼 호도하려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79%, 직장인의 67%, 농부의 70%가 반대표를 던진 반면, 기업 고위 간부의 65%가 찬성에 표를 던진 것에서 드러나듯 투표결과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고통당하는 자들의 분명한 의지 표명이었다. 프랑스에 이어 네델란드에서도 이 사이비 헌법은 반대를 당함으로서 사실상 폐기되었다.

갑자기 산소호흡기로 막혔던 숨통이 탁 트인 것 같은 통쾌한 승리였다. 지난 대선 이후, 우경화와 신자유주의화를 멈추지 않던 프랑스에 갑자기 서광이 비쳐오는 것처럼 보였다.

정론지 르몽드 디플로마티끄는 반대진영의 승리의 진정한 일등공신을 아탁의 개미군단에 돌렸다. 십분 공감하는 바다. 지하철역에서, 시장에서, 거리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98년에 결성, 경제적인 문맹퇴치 운동을 전 세계에 확산시켜 온 이 시민단체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세계화”라는 공식적인 담론에 딴지를 거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세계금융, 무역협상, 환율투기와 같은 이른바 전문가들만이 접근할 수 있던 영역에서 무엇이 행해지고 있는지를 시민들에게 알게 하면서, ‘적’들이 운명이라고 말하는 흐름의 방향을 틀어놓는데 성공했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프랑스 대선.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무늬만 좌파인 사회당의 루아얄과, 극우를 무색케 하는 우파 대중운동연합의 사르코지, 이 둘 사이에 서 있다는 프랑스민주동맹의 바이루.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이 세 명의 우파 가운데 다시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농민, 가장 용기 있는 반신자유주의 활동가 조제 보베의 선전을 빌어본다. 여기 한국에 확실한 한 표를 이미 확보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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