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레 좌파와 콜롬비아 좌파
    [L/A칼럼l 신중하고 전략적 실용성
        2023년 05월 30일 12: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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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나라 모두 우리나라와 친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좌파의 정치 참여 방식, 우파와의 사회관계의 맥락이 서로 달랐다.

    칠레는 1973년 극우세력이 헤게모니를 가져간 뒤에 좌파, 중도좌파, 중도파는 모두 민주연합정부(Concertacion)라는 이름으로 1990년부터 제도권 정치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녹아 들어갔다. 하지만 콜롬비아는 달랐다. 좌파는 한참 제도권 바깥에 있었다. 무장 게릴라 투쟁을 하던 극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폭력 좌파는 사회운동의 저변도 강했고 대통령선거의 권력 경쟁에서도 우파에게 패배하면서도 끈질기게 도전하고 있었다. 작년에 콜롬비아 역사상 최초로 구스타보 페트로가 집권에 성공했다.

    보리치 칠레 대통령(왼쪽)과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여러 유명한 학자들(보아벤투라 데 소우사 산토스, 쟈크 랑시에르 등)이 강조하는 것처럼, 최근 우리는 민주주의를 하면서 오히려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어지는 역설을 마주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가 엘리트 위주로 만들어진 구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칠레 좌파의 경우, 1990년대부터 오랫동안 “야성이 순치된 것”(신자유주의화)이 아닐지도 모른다.

    거칠게나마 몇몇 나라의 사회, 정치적 맥락을 단순화시키면 그 차이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칠레는 2022년 신헌법안의 국민투표가 부결된 바 있다. 그런데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는 각각 2008년과 2009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을 만들었고 원주민의 가치관을 반영한 좌파적 유토피아인 “복수국민국가“ 개념을 새 헌법에 넣었다. 하지만 에콰도르에서 원주민 운동단체와 집권세력의 사회관계는 에보 모랄레스 스스로가 원주민 운동단체의 수장이었던 볼리비아와 당연히 달랐다. 사실 에콰도르는 원주민 운동과 꼬레아와의 관계가 안 좋았다. 최근 에콰도르의 정치사회적 지리멸렬한 상황은 복수국민국가의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

    이에 비해 칠레의 경우, 빠블로 아르타사 바리오스(칠레국립대 역사학과 교수)에 의하면,

    우리 정치체계(시스템)는 사회에 대해 거리감을 가지고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2019년 10월의 대규모 시위는 칠레라는 국가 전체가 21세기의 거대한 전환의 시기에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를 더 이상 칠레 사회가 견딜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이 역사적 도전의 과제를 해결할 능력이 너무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 독재이후의 질서 속에서 사회적 평화를 위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긴장이 가득한 축적 체제를 계속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전면적 변혁 대신에 기존에 있던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리라는 19세기 이후의 칠레의 전통을 더욱 강화시켜왔다. …….더군다나 그 분리는 아옌데(사회주의) 실패의 경험과 연결된 아래로부터의 사회운동에 대한 두려움에서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위 인용문의 핵심은 칠레 정치권이 2019년부터 터진 칠레 사회의 폭발적 분노에 응답할 능력이 되지 못해 제헌의회의 ’긍정적 가능성’이 ‘절망적 가능성’으로 변했고 이로 인해 ‘보수의 가능성’이 커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2022년의 국민투표의 부결이 보리치 정부에 타격을 주었고 오른쪽으로의 선회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는 지나치게 표면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제헌의회 추진 과정에서 정치권의 엘리트들이 일반시민들과 소통이 잘 안되었던 것이다. 원주민 운동세력(마푸체(Mapuche) 종족)보다는 제헌의회의 구성원인 진보적 엘리트들이 적극적으로 ‘복수국민국가’를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한편, 콜롬비아는 2021년에 칠레와 비슷한 “사회적 소요”를 보였지만 칠레보다 덜 강력했고 대신 더 지속적이었다. 정당정치보다 사회운동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칠레의 경우에는 좌파가 들어가 있는 ‘민주연합’ 통치세력이 시민 사회의 변혁의 열망을 채워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항의의 에너지를 정치적 변혁의 진정한 기획으로 연결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즉, 좌파까지 포함한 ‘민주연합’세력은 너무 제도화되고 경직되어 강력한 사회적 항의를 지도하여 새로운 단절적 또는 도전적 비전으로 이끌 수 없었고 일부 진보 엘리트들의 “극단적 정체성” 중시(예를 들어, 여성, 청년 등 체제 변혁을 주장하는 젊은 층에 호응하여 a) 원주민 종족주의 정치, b) 페미니즘을 통한 젠더 정치, c) 모든 것을 부수고 새로 만들자는 극단적, 유아적인 좌파 정치를 들고 나온)의 흐름을 제어할 수도 없었다.

    우리나라나 라틴아메리카나 여성과 청년이 이미 사회변혁의 견인차 역할을 맡는 것은 맞다. 다만 그것이 극단적 정체성 정치로 나아가는 이미지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칠레 정치권은 새 헌법을 제정하여 종이 위에 새로운 변혁의 언어를 적어놓으면 자동적으로 현실의 권력관계가 변화하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보다 변화를 싫어하는 정치, 사회적 힘은 어느 사회나 더 강한 법이다.

    이런 점은 우리 진보정당에도 어떤 시사점을 주는 것 같다. ‘극단적 정체성’ 중시의 흐름은 다양한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들의 사회적 부문들을 인공적으로 분절시켜 오히려 정체성 형성의 에너지(동력)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각 부문들이 전체 사회의 변혁의 기운 그 위에 놓이게 되어 일반시민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를 추진한 엘리트 정치인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더 받을 수도 있다(이런 맥락에서 보리치 좌파 정부의 출현도 바라볼 수 있다). 더구나 현재의 세계체제 또는 우리 사회의 변혁의 전망도 여태까지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던 더 넓고 깊은 통찰력과 전략을 진보세력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각 국면 또는 맥락에서의 신중하고도 전략적인 실용성이 중요하다. 필연적, 구조적으로 미리 정해진 정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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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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