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는 부시를 닮아가고 있다
    2007년 03월 26일 03:10 오후

Print Friendly

필자는 지난 2월 27일 <레디앙>에 베네수엘라 차베스 노선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었다. 날로 심화되는 베네수엘라의 미국 교역의존도와 그것의 실증지표가 의미하는 것을 볼 때, 차베스 이념과 정치노선의 핵심인 ‘반미-반자본-반세계화적 21세기 사회주의’가 실제와는 다른 과장된 국내정치용 ‘레토릭’일 가능성이 크며, 석유자원 외에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대안적 성장동력 체제가 부재하다는 점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다수독재’와 ‘1인 독재’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박정희 노선과 유사하다는 의견도 제시한 바 있다.

다행히도, 필자의 의견에 대해 민주노동당의 정파 가운데 하나인 ‘다함께’의 기관지 <맞불>36호는 「차베스는 어떻게 좌파의 아이콘이 됐는가?」라는 비평을 해주었다. 비평을 해준 이수현 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맞불>은 “국민 다수의 의사를 거스른 채 민주주의를 억압한 박정희와 집권 이후 8년 동안 11차례 크고 작은 선거에서 국민 다수의 지지를 거듭 거듭 확인한 차베스가 어떻게 비슷한가?”라고 문제제기하였다.

아울러 “차베스는 무상의료-무상교육-토지개혁-빈민주거권 보장 등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는 진정한 사회개혁 조처들을 시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빈곤을 끝장내는 방법은 빈민에게 권력을 돌려주려는 것이라고 역설하며 민중권력과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주창하고 있다”고 하였다.

<맞불>의 비평을 보면서 공감이 되는 부분도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공감이 되었던 이유는 현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 때문이다. 필자가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은, 차베스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면 부정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베스의 레토릭이 얼마만큼 실제인가 여부였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참고로, 필자는 (장기독재를 노린) 박정희가 개헌을 통해 ‘연임제 제한’을 폐지한 것과 유사하게 차베스도 ‘연임제 제한’을 폐지한 것처럼 기술했는데, <맞불>은 ‘연임제 제한 폐지’는 차베스의 2006년 대선공약으로, 2007년에 아직 실행되지 않은 것으로 정정해 주었다.

그렇지만, <맞불>은 필자가 논거로 제기한 “날로 증가하는 베네수엘라의 미국 교역의존도와 그것의 실증지표”에 대해서, 이러한 지표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근본적인 답변을 회피하였다. 적어도 차베스 이념과 정치노선의 핵심인 ‘반미-반자본-반세계화적 21세기 사회주의’가 레토릭이 아니라 ‘실제’라면, 그 경제지표는 미국과의 교역의존도가 줄어들거나 축소되는 경향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반미(반자본/반세계화)라면 적어도 미국과 어떤 부분에서 반미인지 실증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차베스의 주장이 ‘실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예를 들면, 새사연, 임승수씨 등), 우선 필자가 제기한 ‘실증지표’에 대해서 반증하는 논거를 갖고 필자를 설득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번 데이터에 이어 관련된 데이터 하나를 더 추가하며, 아울러 <맞불>이 비평해준 사실(fact)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반론하기보다는 ‘해석의 차이’를 가져오는 ‘그 연원’에 대해 좀 더 포괄적으로 강조하고자 한다.

1.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개념 중에 ‘귀인착인식(attribution theory)의 오류’라는 게 있다. 한마디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처럼 보이는 인식구조다. 쉽게 말해서, 어떤 상황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원인 찾기’를 하는 데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실패’에 대해서는 ‘자기 탓’보다는 ‘상황 탓’을 더 크게 과장함에도, ‘타인의 실패’에 대해서는 그 반대로 과장하는 현상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는 ‘상황 탓’보다는 ‘자기 자신의 능력 탓’으로 크게 과장해서 보면서도, 타인의 성공에 대해서는 ‘타인의 능력 탓’보다는 ‘상황의 탓’을 크게 과장함으로써, 타인의 능력을 축소하려는 경향이다.

이러한 인식의 오류들은 박정희와 차베스 그리고 미국과 북한을 바라보는 데에도 그리고 자유주의, 민족주의(배타적, 적극적, 방어적),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주체사상, 트로츠키이즘, NL, PD) 등 수많은 독트린을 바라보는 데에도 나타날 수 있다.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박정희의 좋은 쪽을 과장해서 절대화-신격화하기를 좋아한다. 차베스를 좋아하는 사람들 역시 차베스를 절대화-신격화한다. 맑스주의도, 사회주의도, 트로츠키주의도, 주체사상도 절대화-신격화될 수 있다. 일본의 천황주의도, 중국의 중화주의도 절대화될 수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오류의 실례는 한반도의 운명을 쥔 ‘북핵 위기’의 원인과 책임 논쟁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핵실험의 원인과 책임에 대해 북한 지도부는 미국 탓을, 미국의 네오콘들은 북한 탓을 한다. 북한은 미국의 선제공격과 레짐체인지에 대한 자기방어라고 한다. 미국은 북의 핵무기제조는 ‘악의 축’임이 드러난 실례로, 신의 이름으로 이를 응징하고 민주주의라는 진리를 전파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 테러조직들도 마찬가지로 미국 탓을 한다. 그들은 미국에 맞서는 것은 자신의 신인 알라의 이름을 걸고 하는 ‘적’을 타도하는 ‘성전’으로 이해한다. 차베스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자신을 전복하려고 한다고 이해하고 있으며, 미국을 ‘악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이같은 인식의 오류는 사회과학방법론에서도 나타난다. 미국의 정책들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미국 전체에 대한 획일적인 반대를 의미하는 ‘반미주의’(anti-americanism)가 바로 그것이다. 복잡한 국제 현상을 ‘하나의 원인’으로 돌리는 ‘환원주의’와 ‘동어반복’, 그리고 국제 정책의 인과성에 입각해 상황을 보기보다는 국가와 국가, ‘나쁜 북한’, ‘나쁜 미국’이라는 식의 상관성으로만 상황을 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둘의 인식의 오류가 서로를 매개하고 상호작용, 의존하는 가운데, ‘적’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가 되기 때문에, 누가 적대의 원인 제공자인지, 설명변수인지는 계량적으로 입증하기 힘들다. 결국 북한 지도부가 네오콘의 극단성을 키워주었는지, 거꾸로 네오콘이 북한 지도부의 극단성을 키웠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9.11 테러를 통해 네오콘의 극단주의를 키워주었는지, 아니면, 네오콘의 극단주의를 포함하는 미국주의가 그 반대를 먼저 키웠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공동으로 서로를 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남을 탓할 뿐이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적대적 인식관계와 태도가 한반도와 전세계에 테러전쟁과 핵폭탄의 위협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지구촌 공론은 사라지고 친미와 반미로 끼리끼리 양극화하는 ‘정치적 분단’의 비극적 참상들을 보여줄 뿐이다.

부시의 일방주의가 전 세계에 ‘반미주의’를 자극하고, 거꾸로 ‘반미주의’가 강화되면, 미국은 ‘미국주의’로 단결하고 동질화하면서, 더욱 이념적으로 정파적으로 극단화된다. 이것은 다시 반미주의를 강화시키는 선순환구조(!)를 갖는다.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현재의 세계화다. 누구의 잘못이며, 누구의 책임인가?

   
  ▲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
 

2. 귀막고 눈감기

그리고 심리학에는 ‘인식의 일관성(cognitive consistency theory)의 오류’라는 개념이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과 독트린에 반대되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합리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인식과 태도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인식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무시하고 회피하고 사실을 허위-축소-왜곡하려는 현상이다.

한마디로, 현실 정보의 합리적 해석보다는 자신의 도그마적인 믿음과 이념적 신념체계에 의존하여 판단할 때 발생하는 오류를 말한다.

이런 오류의 대표적인 예는 세계를 적과 친구, 선과 악으로 이분화하는 네오콘들과 그 유사집단들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의 이념적 독트린을 절대화하기 위해, 없는 ‘적’도 만들어 낸다. 이들은 ‘적’을 만들기 위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허위정보를 조작, 왜곡, 과장하였다.

네오콘들은 미국의 애국주의(배타적 민족주의), 종교적 도덕주의, 예외주의를 기초로 대외적 ‘일방주의’를 신의 명령이자 진리로 이해한다. 미국의 일방주의가 세계 여론을 반미주의로 몰아갈수록 네오콘들은 일관성을 위해 더 결집하여, 미국주의를 선동한다.

이념적 일관성의 오류는 현실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현실 정보와의 대화 및 소통을 가로막으면서, 이념적 일관성을 더욱 극단화시킨다. 이들은 세상을 거시적 차원과 미시적 차원 그리고 중범위 차원에서 이해하려기보다는 자신의 이념적 독트린만으로 보려 한다.

이념적 독트린이 강한 집단일수록 ‘그룹착각현상(group thinking)의 오류’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룹착각현상’은 종교집단의 히스테리 증상처럼 집단의 의사결정이 매우 비합리적으로 되는 ‘극단적 획일화-동질화 추구현상’을 말한다.

3. 정치 영역과 이념 영역의 비극적 만남

인간의 삶의 형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따라, ‘활동적 삶’과 ‘정신적 삶’으로 구분한다면, 활동적 삶 중에서 praxis(프락시스)의 영역을 정치영역(public realm/sphere/forum)으로, 그리고 정신적 삶인 theoria(테오리아) 영역을 이념영역(idea/철학)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렇게 구분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프락시스와 테오리아의 관계가 어떤 관계에 놓이느냐에 있다. 테오리아와 프락시스의 관계가 수평적이냐 아니면 위계적이냐에 따라 문제의 발생 정도가 다르다. 역사는 대체로 테오리아가 프락시스를 지배해왔다. 신과 종교가 인간과 지상을, 계몽이 감성과 자연을, 각종의 이념 독트린(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이 현실의 인간을 지배해왔다.

소크라테스가 이 둘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소통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사고하여, 변증술과 산파술을 통해 진리(이념)에 접근하는 ‘공론의 정치’를 생각했다면, 플라톤은 이념(idea)의 진리성과 절대성을 기준으로 프락시스의 영역을 지배하고자 하는 ‘철인정치’를 꿈꾸었다.

물론 이후 플라톤과 유사한 타입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중세의 교황정치, 자코뱅 독재정치, 프롤레타리아 독재정치, 수령정치 등등이 그 예들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공론정치’를 불신하고 자신의 ‘이데아’와 ‘철인정치’를 고안했던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포퓰리즘에 의해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이것은 9.11 테러리즘에 충격을 받은 미국주의 시민들의 충격과 같았을 것이다).

플라톤은 포퓰리즘이 우중(愚衆)정치를 동원해 소크라테스 같은 현자를 죽였다는 판단으로 그것을 혐오했으며, 그것의 극단적 반정립으로 진리의 절대성을 찾고, 그것을 위해 세계를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세계로 이분화하여 진리를 아는 철학자만이 현실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데아의 영역은 환상적인 영역이며, 공산주의적 영역이다. 그래서 인간이 다가설 수 없는 초월적 세계이며, 신과 같은 절대자의 세계이다. 그래서 초월적 세계에서 만들어진 독트린들은 순수하며, 완벽하다. 하지만, 독트린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결론이 너무나 완벽하다.

이 때문에, 이러한 독트린이 현실 정치영역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수많은 독트린이 서로를 마주하며 충돌할 때, 서로가 자기 독트린의 한계와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절대성과 완벽함을 일관적으로 주장하고 관철하려고 한다. 서로에게 비타협적이다. 그리고 독트린 간에는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의 독트린 내에 가상의 적을 상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는 대상을 적으로 상정하고 ‘우리’와 적(타자)을 구분하고 있으며, 사회주의는 자본가와 자본주의를 적(타자)으로 삼고 있으며, 민족주의(국가주의)는 국가(주권)를 부정하는 제국주의나 타국가를 적(타자)으로 상정하고 있다.

서로 다른 국가주의와 국가주의가 강하게 충돌할 때, 발생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인간의 공동체를 우리와 적으로 이분화한다. 적과의 관계에서는 대화와 협력, 상호신뢰와 상호공감은 필요 없다. 오직 적대적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한국 6.25의 비극은 공산주의 적과 자유주의 적이 투쟁했던 사례이다.

하지만, 정치영역인 프락시스의 세계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경험의 세계, 현실의 세계, 생활 세계로, 절대적인 독트린보다는 사람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 드러나면서 형성되는 공통감각(common sense)의 세계라는 점에서 소통이 생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이며, 유동적이다. 공론장을 제도화한 것이 민주주이다.

민주주의는 귀족‘정’, 군주‘정’, 참주‘정’ 등에 비교해 민주‘정’이라는 개념으로 ‘시민’의 ‘지배’라고 번역되지만, 시민의 ‘지배’라는 개념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실질적인 참여(양적인 측면)와 토의(숙의)를 통한 합의적 공동체(질적인 측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지배할 수 없는 비지배(non-domination)적인 상태를 지향한다. ‘엘리티즘’과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두 측면이 조화롭게 지향되지 못할 때 생기는 편향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간의 유한성으로부터 오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고통과 두려움을 공론장의 활성화를 통해 극복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포기하고, 절대적이고 완벽한 신을 찾거나, 이념에 기대기도 한다. 정치영역과 이념영역 간에 비극적 만남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적절한 거리와 균형이 필요할 것이다.

4. 미국주의와 반미주의 선전선동의 결과

적절한 균형과 거리 대신에 극단적 이념이 ‘정치적 영역’을 도구적으로 지배한다면, 극단적 이념이 정치적 공론장을 자신의 독트린을 선전선동하는 도구적 공간으로 사용한다면, 사람들의 다양한 개성이 드러나는 말과 행위의 공간은 파괴되고 말 것이며, 토론과 설득을 기본으로 하는 공론의 정치는 타살될 것이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이념만이 옳다는 ‘진리의 독재정’과 철인정치, 선동정치가 들어설 것이다.

이념적-정파적 편향성이 구조화되는 조건하에서, 철인 정치가들과 선전선동가들은 공론장의 부활을 통한 설득과 합의의 정치보다는 이념적-정파적 편향성를 더욱 부추기는 방식으로 시민들을 양극화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을 동원할 것이다. 이 같은 철인 정치가와 선동 정치가의 대표가 바로 미국의 부시이다. 부시는 네오콘의 극단적 이념주의를 슬로건으로 보수층을 흥분시켜 집권에 성공하였다.

부시와 네오콘의 이념적 독트린에 대해 세계의 여론은 저항적 민족주의, 또는 방어적 민족주의, 또는 극단적 자유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등의 이념적 독트린으로 맞섰으며, 이것은 ‘반미주의’ 독트린으로 드러났다. 반미주의 또는 반미 감정을 이용해 집권에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한국의 노무현, 베네수엘라 차베스, 남미의 일부 대통령들이 그렇다. 한궁의 정치가들은 다가오는 대선에서도 이념적-정파적 편향성을 선전선동할 것이다.

반미주의 선전선동의 결과는 국제적으로 미국의 ‘미국주의’를 더 강고하게 만들 것이며, 국내적으로는 친미와 반미의 여론이 극단화되면서, 정파적-이념적 편향성에 싫증난 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적 공론장을 떠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반미주의의 선전선동은 미국 내외의 다양한 합리적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가로막을 것이다.

5. 차베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부시와 네오콘을 닮아가고 있다

자본가와 싸워 본 사람들은 자본가를 닮아가고, 독재자와 싸워본 사람은 독재자를 닮아가고, 제국주의와 싸워본 사람들은 제국주의를 닮아간다. 부시와 네오콘의 이념적 독트린과 싸워본 사람들 역시 그들을 닮아갈 수 있다.

차베스도 부시와 네오콘을 반대하면서도 그들을 닮아가는 사람들 중에 하나일 수 있다. 차베스가 주장하는 ‘반미-반자본-반세계적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독트린과 정치적 수사는 부시와 네오콘의 것과 반대이다.

차베스는 부시가 미국의 적성 국가들에게 ‘악의 축’이라고 비난한 것을 흉내 내어 미국을 ‘악의 근본’이라고 주장했다. 또 차베스는 지난해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부시를 ‘악마’라고 불렀으며, 지난 2월에는 “미국 사람들(gringos)은 지옥으로나 가라.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도 하였다.

한국에도 부시와 네오콘을 반대하면서, 이들을 흉내 내거나 닮아가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이런 경향은 미국의 국가주의(애국주의)와 세계 각국의 국가주의(민족주의)가 충돌할 때 드러나게 되는데, 모든 가치가 국가주의(민족주의) 앞에서 적과 친구로 단순화되고 환원된다.

따라서 국가주의(민족주의) 앞에서 그 하위 범주의 가치들인 노동, 환경, 생태, 여성, 인권, 개성, 역사, 문화다양성, 지방 그리고 그 상위범주인 동아시아지역정체성, 세계정체성, 그 밖의 다양성은 표현되지 못하고 드러나지 못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한국사회의 주류운동이 NL(민족해방)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NL은 국가주의이며, 민족주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하고 있다. 이에 반해 노동과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PD(민중민주)들은 민족주의를 반대하다가도 국가와 국가가 부딪힐 땐 민족주의 흐름에 휩쓸린다. PD는 NL을 넘어설 수 없다. 왜냐하면, 구조적으로 PD는 NL의 하위 단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운동이 NL과 PD 경향의 이념적-정파적 독트린을 벗어나는 길은 영토 중심적인 국가 단위(민족주의)의 패러다임 대신에,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고통스럽게 만들어 내고 있는 긍정적인 흐름인 글로벌 지구시민사회(global civil society)의 정체성 형성과 그것의 공적인 힘(public power)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국가 단위 중심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그동안 국가 단위에 억눌렸던 다양한 행위자와 이슈 그리고 다자주의적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로벌 지구시민사회로 가기 위해, 1국가 차원의 패러다임에서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의 세계, 동아시아 거버넌스의 세계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거버넌스는 추상적이지만 1국가 단위가 아닌 다양한 행위자들에 의한 다자주의적-다층적 수준이 다양한 개성들을 드러내면서 형성되는 지구적 성격의 정치적 공론장을 말한다.

지구적 성격의 정치적 공론장이 형성될 때, 국가주의(민족주의)는 실제적으로 약화될 수 있으며, 인간의 자유로운 개성을 억압하는 ‘국가(민족) 환원주의’, ‘계급 환원주의’ 등 다양한 편견도 약화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출현할 때만 하여도 획일적인 보수정치에 저항하여,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정당도 필요하다는 ‘진보의 의미’는 매우 신선하였고, 다양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이데아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진보-보수의 이념 논쟁으로, 진보의 이미지는 보수와 다를 바 없이 신선하지 못하다. 예컨대, 김종철 서울시장 후보의 사회주의 독트린이 그런 것이다. 진보 대 보수의 구도 역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진보의 개성이 이데아 영역이 아닌 생활 세계의 영역에서 시민들과 소통되거나 합의되는 가운데 드러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보수 대 진보의 대립구도는 또 다른 다양한 가치들을 배제하거나 부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내부 정파 갈등의 양극화 현상은 진보의 이미지가 진부해지고 신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따라서 정치적 공론영역에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대립 구도를 또다시 끌어들이는 것은 더 이상 ‘진보적 행위’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극단적인 수사와 언사, 그리고 정파적 편가르기는 이념 경쟁에 지친 생활 세계의 사람들을 더욱 피곤하게 할 뿐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와 개성의 드러냄을 통해 구성되는 ‘생활 세계’와 ‘정치적 공론장’을 파괴할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이념적-정파적 편향성을 줄이고, 생활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진심으로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독트린을 성찰해야 하며, 시민들을 표 찍는 기계나 표에 단순 반응하는 동원의 대상이 아닌 ‘정치적 인간’으로 대우하고, 함께 행동해야 한다.

1국가 단위 차원의 근대적 산업복지국가에서 횡행했던 정치모델과 관념들을 성찰하고, ‘탈냉전-탈주권-탈산업’이라는 거시적 시대 변화에 따른 글로벌거버넌스, 동아시아거버넌스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치모델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