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틴아메리카의 대도시 이주
    [L/A칼럼] '집단적 주거권' 형성의 배경과 맥락
        2023년 05월 15일 03: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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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와 라틴아메리카를 비교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는 짧은 기간에 경제 성장에 성공하면서 대부분의 국민이 자본주의 근대성의 체계에 편입되어왔던 것에 비해 라틴아메리카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우 비정규 노동자의 문제가 심각하다면 라틴아메리카는 공식적인 노동체계에 아예 소속되지 못한 가난한 비공식 노동자가 많다(예를 들어, 자본주의 체제에서 배제되어, 길거리에서 사과상자 같은 것 위에 빨래비누 서너 개를 올려놓고 파는 할머니, 또는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중인 차의 본네트 위에 올라가 앞 유리창을 비눗물과 수건으로 닦고 동전을 요구하는 일등).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어느 나라를 가든지 흔히 대도시의 변두리 산등성이(대부분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도중에 볼 수 있다)에 불법건축 주택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여기 사는 사람들은 농촌에서 집단적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의 경우, 산업이라고는 석유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외국으로부터 식품을 수입하는 것이 작물을 국내에서 경작하는 경우보다 더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국내의 농업은 망하게 되고 농촌이 피폐해져 이미 1930-40년대부터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고 1960년대에 대량이주가 일어난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1970년대 말에 아래에서 언급하는 불법적인 가난한 동네에 사는 인구가 이미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2011년 현재 도시화율이 약 89%에 달한다.

    이런 극단적 도시화는 베네수엘라에서 강하게 드러나지만 다른 나라들도 대동소이하다. 도시가 산업이 발달하여 노동력을 필요로 하여, 즉 농촌인구를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있어 농촌을 떠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연히 돈이 없어 시장에서 판매하는 제대로 된 주택을 구입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국유지 또는 남의 땅(사유지)에 불법으로 침입하여 동네를 형성하여(스페인어로 barrios de ranchos), 돈이 조금 생길 때마다 시멘트 포대를 조금씩 사서 가족과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자기 스스로 집을 짓는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의 변두리에는 짓다가 만 집들이 굉장히 많다. 그리고 수도가 안 나오는 등 기본적 주거 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이들 가난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당국에 대해 그들의 집단적 주거권(인권)을 강하게 요구하고 실제로 보장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들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강한 동질성 덕분에 일종의 영토성을 가지고 있어 서로 뭉쳐 투쟁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가난하여 갈 데까지 간 사람들이라 두려울 것이 없다는 심리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강한 연대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집단적으로 이주했지만 친척, 또는 친지 위주로 연결되었을 뿐 연대가 느슨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대부분 나라에 경제위기가 찾아오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면서(시장논리가 강화)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이들 가난한 동네에 변화가 일어난다. 비상시국에 동네 총회가 생기고 동네공동체(베네수엘라의 경우 “도시토지위원회”로 불리는)구성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움직임이 차베스 정권 아래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는 주택 매입이 철저히 시장 논리에 따르므로, 파편화된 일부 도시 빈민의 경우, 주거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강제퇴거를 당하든지 최근에는 전세사기의 피해도 아주 심각한 상황이다. 정말 큰일이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각 나라마다 상황과 맥락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주로 유럽에서 생산된 사회과학 이론으로 우리 현실을 설명하고 해석하려니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경우, 이런 주장을 한 바 있다.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갑자기 들이닥친 산업운동을 통해 갑자기 생성되었다….인위적으로 빈곤해진 자들이다. 농촌사회의 중간계층의 급격한 해체에서 비롯된 대중이다……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사적 소유의 부정을 요구한다면, ……….사유의 섬광이 이 순수한 대중의 대지에 내리꽂히는 순간, 독일인의 인간으로의 해방은 일어날 것이다.

    위의 인용(라클라우, “정체성과 헤게모니”, in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2009, 74 재인용)을 보면 앞부분은 마르크스가 객관적으로 현실을 해석한 반면 뒷부분은 어떤 주관적 상념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마르크스의 지적은 비유럽의 다양한 나라의 산업화와 이로 인한 도시 이주의 맥락이 각각 다르므로 유럽에서 생산된 이론으로 전부 이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경우는 1960년대부터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가치 사슬에서 저임금 노동력의 희생을 통해 경쟁력 있는 공업제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지만 민주주의는 정체된다. 특히 각자 개인화된 방식으로 농촌인력이 도시(물론 대부분의 경우 가족을 생각해서)로 오도록 새마을 운동이 전개된다. 즉 농민을 돈을 욕망하는 주체로 변화시킨 것이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런 해석의 글의 제목은 “‘돈의 맛’, 욕망하는 농민의 생산” 등이다.

    이 짧은 글에서 필자는 무조건 라틴아메리카사람들이 우리보다 집단적으로 잘 조직된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불평등하고 배제적인 경제 사회적 시스템을 최대한도로 이용하는 것뿐이다. 가난의 동질성을 가지는 사람들이 뭉치면 이익이라는 오래전부터의 기억을 되살려 어느 의미에서 생생한 삶의 재분배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그동안 ‘생산’해왔다면 그들은 열심히 자원을 수집해서 외국에 판 것이다. 우리와 매우 다르지만 무언가 공감되는 ‘슬픈’ 부분이 있다.

    필자소개
    성공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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