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빛, 삶의 치명적인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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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24일 12: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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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대녕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에는 죽음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그 죽음은 대개 혈연의 죽음이거나 벗의 죽음이다. 그래서 윤대녕의 이번 소설들은 시종일관 어둡고 차분하며 곡선적이다. 하드보일드는 윤대녕의 반대말에 가깝다. 소설가 윤대녕은 차라리 여성 고유명사이다.

    사실 윤대녕의 작품들은, 비단 이번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아니어도, 직선이라기보다는 잘 그리고 예쁘게 휘어지는 나뭇가지 같은 곡선을 줄곧 그려왔다. 그럼에도 유독 이번 작품들이 곡선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그 곡선이 인위적이지 않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애써 신비나 상징 등의 작가 특유의 작의(作意)와 수사(修辭)를 통하지 않고서도 충분한 여유로움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비를 기르다』에서 작가는 시종일관 늘 어떤 이들의 삶을 되풀이해서 들려준다. 그 삶은 현재진행형이라기보다 신난한 과거를 거쳐 이제 막 그 끝이 들여다보이는 그 어떤 삶이다. <제비를 기르다>의 어머니가 그렇고, <탱자>의 고모가 그렇고, <편백나무 숲으로>와<고래등>의 아버지의 삶이 그렇고 나머지 작품들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는 이 삶들 곁에서 늘 지켜보는, 곧 개입하지 않는 혹은 개입을 할 수 없는 화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작가/화자는 그들이 삶을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해 몸을 의도적으로 낮추고 있음이리라. 그렇다면 왜 작가/화자는 그토록 많은 삶이 필요한 것일까? 아들의 입을 빌어 아비의 삶을 회고하는 작품 <고래등>의 한 대목이다.

    “생에는 화해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도 엄연히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그토록 악마처럼 굴던 삶이 오히려 나에게 관대한 점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삶을 완수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다는 건 얼마나 기특하고도 오묘한 사실인가. 어쩌면 이렇게 각자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유지되면서 피돌기가 그만큼 원활해지고 종국엔 하나로 속속들이 귀속되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몸만 해도 각기 쓰임새가 다른 삼천개의 뼈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발을 한번 내디딜 때가 되면 그 많은 뼈들은 각자 균형을 이뤄 놀랍도록 통일된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마침내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들은 하나의 점을 행해 맹렬한 속도로 몰려든다.”(<고래등> p.188)

    위 대목을 쪼개서 정리해보면, ①생에는 화해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러니 삶은 냉혹한 현실이다 ②그 현실 속에서 삶은 다 제각각이다 ③그러나 모든 삶의 끝은 죽음이다, 정도가 될 터이다. 그리고 위 인용에서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한가지 가장 중요한 의미를 덧붙이자면 ④죽음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을 화해하게끔 만든다, 이리라.

    <제비를 기르다>에서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늘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 <고래등>에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아버지, <편백나무 숲으로>에서 자식을 버린 아버지 등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마지막 삶의 내기를 펼친다.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 혹은 미처 이해받지 못했던 자신의 삶의 패를 던지는 셈이다.

    그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이르러 자신의 모든 것을 “맹렬한 속도”로 내던지는 것이다. 살아남을 자들은 그 패와 속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치명적으로 발견한다. 그것은 일종의 삶의 재발견이기도 하다. 그 삶의 재발견은 다른 말로 하자면 삶에 대한 보다 더 큰 긍정이자 화해인 셈이다.

    그러고보면 윤대녕 소설 속에서의 죽음은 삶의 지극한 빛이다. 삶을 마지막으로 비추는 마지막 빛인 셈이다. 아니 삶이 마지막으로 빛내는 발화이자 불꽃인 셈이다. 그것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슬픈 것은 그 불꽃이 두 번 타오르지 않기 때문이며 아름다운 것은 삶을 새롭게 살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좀 박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제 윤대녕 소설은 젊고 발랄한 청춘들에게 더 이상 브랜드로서의 위력을 지닐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삶을 말하기는 바야흐로 삶이 터지기 직전인 청춘들과는 아무래도 다른 길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무래도 박민규와 그 아류들 정도가 어울리리라. 나로서는 윤대녕이 같이 늙어가는 동료가 됐다는 게 조금은 기쁘다.

    추신. <낙타 주머니>의 젊은 화가의 느닷없는 죽음과 그에 따른 화자의 반응이 나에게는 오랫동안 남는다. 친구 화가의 죽음 이후 주인공은 갑작스런 천식발작을 경험한다. 죽음의 고비를 몇차례 넘기며 주인공은 여러 해에 걸쳐 병원을 전전한다.

    주인공은 죽음 쪽으로 안달하지만, 결국 병명은 기관지염으로 판명난다. 하나의 해프닝이거나 코미디? 아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은 살아있는 자들은 차마 죽지는 못하고 그 대신 죽음의 생채기나마 온몸으로 겪고자 한다. 그것을 코미디라고 말하면, 살아있는 자들은 후한무치를 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도 지금 아프다. 아내여, 그곳에서 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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