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데르센의 슬픈 상상력
    [그림책]『외다리 병정의 모험』(안데르센 /요르크 뮐러 그림 /비룡소)
        2023년 05월 10일 09: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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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안데르센의 동화를 사랑했을까?

    제가 처음 안데르센의 동화를 접하게 된 것은 텔레비전에서 본 인어공주 덕분이었습니다. 마녀와의 거래로 사람이 되었으나 말을 못 하게 된 인어공주도 충격이었지만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리는 비극적인 결말은 더 충격이었습니다. 지금도 인어공주의 말 못 하는 슬픈 얼굴이 고스란히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얼굴을 보면서 살아있는 배우처럼 느꼈던 것도 처음이고 슬픈 결말도 처음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가 본 애니메이션의 결말은 안데르센 원작의 결말이 아니라 다양한 각색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사랑의 감동과 아름답고도 슬픈 선택이 어린이 이루리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았습니다.

    꿋꿋한 장난감 병정

    안데르센의 동화 『꿋꿋한 장난감 병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다리 병정은 낡은 주석 숟가락을 녹여 만든 25개의 장난감 병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지막에 만들다 보니 주석이 모자라서 외다리 병정이 되었습니다. 외다리 병정은 그 집에 사는 장난감 가운데 종이로 만든 무용수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담배통에 사는 도깨비의 저주로 창밖으로 떨어지고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무엇보다 『꿋꿋한 장난감 병정』은 인어공주만큼이나 슬프고 아름다운 결말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 『꿋꿋한 장난감 병정』을 원작으로 요크르 뮐러가 글 없는 그림책 『외다리 병정의 모험』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림책은 이야기를 창작하는 예술이 아닙니다. 그림책은 그림을 창작하는 예술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림책 『외다리 병정의 모험』은 그림책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외다리 병정의 모험

    안데르센의 『꿋꿋한 장난감 병정』은 요르크 뮐러의 상상 속에서 아주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우선 첫 장면부터 충격적입니다. 요르크 뮐러의 외다리 병정은 아주 오래된 집의 부서진 마룻바닥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외다리 병정을 처음 발견하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생쥐입니다. 그것도 아기 쥐를 입에 물고 있는 엄마 쥐인 것입니다. 아직 몸도 털도 나지 않은 아기 쥐는 외다리 병정 장난감을 보고 많이 놀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보는 독자들은 더 놀랐을 것입니다. 요르크 뮐러의 그림책 『외다리 병정의 모험』은 안데르센의 동화 『꿋꿋한 장난감 병정』과 달리 대단히 현대적이고 사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오래된 집에 새로 이사 온 가족이 있습니다. 새로 이사 온 가족의 아빠는 마루 밑에 있던 외다리 병정을 주워 아기에게 줍니다. 금세 아기는 꼬마가 되어서 외다리 병정과 바비 인형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합니다. 이제 소녀가 된 꼬마는 컴퓨터 게임을 하며 놉니다. 결국 외다리 병정과 바비 인형은 재활용 쓰레기봉투에 담겨 길가에 버려집니다.

    그런데 재활용 쓰레기 옆을 지나던 또 다른 꼬마가 신문으로 종이배를 만들고 외다리 병정을 배에 태웁니다. 마침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물청소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물청소하는 호스에서 쏟아지는 거센 물살에 밀려 바비 인형과 외다리 병정이 탄 종이배가 하수구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러다 종이배가 뒤집히고 외다리 병정은 배에서 떨어집니다. 그때 외다리 병정의 총칼이 마법처럼 바비 인형의 옷에 끼워집니다. 외다리 병정과 바비 인형이 다시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한 몸이 된 외다리 병정과 바비 인형은 이제 머나먼 여행을 시작합니다.

    영화인가, 그림책인가?

    요르크 뮐러의 작품을 보면 정말이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스펙터클한 구도와 시점, 평범한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스케일, 아주 긴박한 이야기 전개까지! 영화가 갖추고 있는 여러 가지 재미를 자신만의 그림책 예술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르크 뮐러 작품의 진짜 매력은 이런 기술적인 탁월함만이 아닙니다. 요르크 뮐러는 안데르센의 슬픈 상상력에 현대적인 해석과 깊은 통찰력을 더해 새로운 감동을 전해줍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그림책을 읽는 사람들 속에서 안데르센의 동화 『꿋꿋한 장난감 병정』은 잊혀지고 요르크 뮐러의 그림책 『외다리 병정의 모험』만이 기억될지도 모릅니다.

    외다리 병정과 안데르센의 부활

    요르크 뮐러는 자신의 그림책에서 죽었던 외다리 병정을 다시 살려냅니다. 안데르센이 살던 19세기에는 주석으로 만든 장난감 병정을 벽난로 속에 던지면 그만이었지만 21세기는 쓰레기를 만들고 버리는 것이 범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는 업사이클링의 시대이어야 합니다. 기업들은 더 이상 새로운 물건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물건을 재생하고 새로운 쓸모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제 대량 생산된 상품은 쓸모를 넘어 재앙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지금은 안데르센을 새로 읽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굳이 지느러미를 버리고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외다리 병정 또한 무용수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굳이 불길에 뛰어들어 하트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어를 인어 그대로 외다리를 외다리 그대로 존중하고 함께 살아간다면 다름이 장애가 되는 일도, 희생을 강요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안데르센의 슬픈 사랑은 모두 차별이 만들어낸 비극이었으니까요. 부디 인어공주를 인어공주로, 외다리 병정을 외다리 병정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안데르센의 동화의 감동은 안데르센의 인류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입니다. 요르크 뮐러에게 고맙습니다.

    * <이루리의 그림책 이야기> 칼럼 링크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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