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야, 예수처럼 말해봐”
        2007년 03월 23일 10: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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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개 싱크탱크의 네 번째 토론회가 열렸다.
     

    3월 22일, 10개 싱크탱크의 네 번째 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진보적 대안, 어떻게 대중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갈 것인가?’

    이번 토론회는 약정 발표자들이 짧은 메모를 발표하고 참석자 전체가 아이디어를 내놓는 브레인스토밍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왜, 진보 진영의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지에 대한 여러 진단과 개선방법이 제시되었고, 더러는 진보대안 자체나 조직활동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기도 했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의 발표 「한국사회를 새롭게 선도할 ‘진보적 희망의 콘텐츠’와 ‘진보적 희망의 언어들’을 토론하자」는, 그의 글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진보적 희망의 콘텐츠’, ‘과거 회귀적 사이비 희망’과 같이 작은 따옴표로 정의된 신조어가 많아 청객 입장으로서는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희연의 이번 발표에는 ‘신뢰의 무게’라는 것이 새로 등장한다. ‘말의 문제’를 넘어 말하는 사람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레토릭이나 제스처나 언변이나 상징만으로는 그러한 신뢰의 무게를 대중들에게 줄 수 없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참여정부의 언술을 믿지 않게 된 참담한 현실은 진보개혁세력에게 확고한 일관성과 말과 행동의 무게를 담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조희연 교수는 30개의 ‘희망의 언어’ 시안을 내놓기도 했는데, 그 중 몇 개만 들어 보자. “민주주의의 민주화”, “민주주의의 사회화”, “더 평등한 한국을”, “더 공정한 한국을”, “한국의 천민적 자본과 기득권층을 때려 엎자” …….

    진보정치연구소 장석준 국장은 “말이 어려워서 안 받아들이고, 말이 쉬워서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라며 대중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에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주로 이야기했다.

    “사실 ‘선진화’라는 말도 그렇게 구체적이거나 매력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의 담론들에 비해 ‘선진화 담론’이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서는 것은 결국 역사적 경험의 문제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말이고, 경부고속도로라든가 구체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될 수 있어 성공적이라는 설명이었다.

    장석준은,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은 그 나라 국부(國父)인 볼리바르를 환기시킴으로써,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로를 전국으로’라는 표현은 유럽 복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모범적 지자체를 보여줌으써 성공할 수 있었다고 평했다.

    진보정치연구소는 ‘모두를 위한 성장’, ‘미래를 위한 나눔’, ‘당신의 민주주의’라는 슬로건 시안을 내놓았다.

       
      ▲ 사진 왼쪽부터 진보정치 연구소의 장석준 국장, 조희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손우정 연구원은 ‘진보적 대안을 대중의 언어로 구현’하는 단계적 방법을 제시했다.

    “첫 번째 단계는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핵심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명박의 ‘경부운하’, 손학규의 ‘광개토 프로젝트’ …두 번째 단계는 이 이름이 추구하는 바를 10단어 내외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을 확정짓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름과 개념의 세부적 내용, 실현 방안 등 구체적인 정책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이다.”

    성공회대 조현연 교수는 담론을 “언어를 통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 집합행동을 유발하는 것”으로 정의한 후, 담론의 생산과 전달 과정을 훨씬 세분화하여 살핀다. 조현연 교수가 명시적인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얼개에 따른 진단과 평가를 해야 할 것 같다.

    “단순히 용어의 문제(운동권 사투리, 식자층의 고담준론)인가? 소통 통로의 문제인가? 수용층의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면 현실적 힘과 관련한 실현 가능성의 문제인가? …대안담론이 대중들의 정서가 가지고 있는 핵심 요소를 포섭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대안담론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나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중들은 진보진영의 대안담론을 기꺼이 수용할까?”

    조현연 교수는 지배담론이 “현실에 대한 의미 구성 …다른 대안을 선택의 범위에서 배제하는 것 …상상적 사회로서 대안사회의 구성”이라는 세 차원을 거친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자면 진보담론 역시, 현황 폭로, 보수 대안 비판, 미래상 제시라는 세 틀로 구성될 수 있겠다.

    새사연의 손석춘 원장은 “진보담론이 대중에게 익숙해지는 문제가 있으므로, 진보담론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소개하지 않는 보수언론의 문제를 꼭 짚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평화만들기의 김승국 대표는 “예수님처럼 편하고 쉬운 말로 진리를 말한 사람을 찾을 수 없다. 운동권은 ‘반신자유주의’라 외치는데, 보통 사람들 눈높이에서는 자유도 새로운 것도 좋은 것 아닌가. 평화만들기는 ‘전쟁반대’라는 네거티브보다는 ‘피스메이킹’이라는 포지티브한 표현을 즐겨 쓴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날 토론회에서는 ‘담론’ 또는 ‘담론 전달’에 관련한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의견이 정리되거나 집중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말하기에 대해 문제 제기를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토론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이 날 토론회에서 나오지 않았거나 부족하게 다루어진 몇 가지만 사족처럼 덧붙여 보자.

    진보담론의 수용자인 국민 입장에서 보자면, ‘진보’는 뭔가 과격한 것 같기는 한데 그 실내용이 무엇인지는 막상 알기 어렵다. 그 메시지의 노출 빈도가 너무 적은 것이다. 무언가를 선택하려면, 그것이 좋은지를 살펴야 하고, 좋고 나쁨을 판단하려면 먼저 알아야 하는데, 진보가 주장하는 것이 자세히 무엇인지가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된 적이 있는가를 반문해야 한다.

    인지 – 수용 – 선택 – 행동이라는 과정 중에 진보는 첫 단계를 갓 지났거나, 아예 첫 단계에 진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운동권은 집회도 많이 하고 구호도 많이 외친다. 유인물도 많이 뿌린다. 그런데 그 집회, 그 구호, 그 유인물 과연 보통 사람들이 같이 외치거나 납득할만한 것인가? 내게 참석 의무가 있지 않은 집회장 근처를 지나가다 보면 “아이구 고생들 하네” 하는 마음과 “무서워라”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다.

    운동권이 이처럼 고립적 문화를 만든 것은 “우리는 정당하다. 고로 우리가 말하면 이루어질 것이다”는 선언적 정의 의식에 젖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운동권의 조직 논리가 외부로의 확산보다는 조직 내부를 견고히 굳히는 데로만 모아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설득보다는 전달에, 전달보다는 선언에 만족한다.

    네가티브적 표현 방식이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군부 퇴진”이라거나 “군부독재 타도”를 애용하고도 집권에 성공했다. 물론 “민주 쟁취”가 뒤에 따라붙긴 했지만, 어느모로 보아도 그들의 주장은 전형적 네거티브 방식이었다.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뒷부분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 보는 건 아니다. 이 슬로건의 수용자들은 대부분 “부자 놈들에게 세금 때려야 한다”는 보복 심리에서 이 슬로건에 찬성한다. 앞으로도 상당 시간 동안에는 네가티브가 주를 이룬다 하여 근본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레디앙>에 자주 글을 쓰는 한 교수는 “제 글이 너무 어렵죠”라고 우스개처럼 말하곤 한다. 글을 쉽고 이해하기 좋게 쓴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복잡한 세계를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을 직업 삼는 학자가 꼭 쉽게 말하고, 쉽게 써야 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쉽게 말하여 대중을 설득하고 움직여야 하는 사회운동가, 정치 활동가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짧은 경험에서 진단해 보자면,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목표가 분명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정당성과 주장을 쉽게 설명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된다. 짧은 경험에서 추측해보자면,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 진보정당의 말이 어려울 것은 대부분 권력에 대한 의지, 실제로 사회 변화를 목표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듯 하다. 그저 그 안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밖으로 나가 남을 설득하기 쉬운 말이 아니라, 자기 확인의 혼잣말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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