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파의 현대적 '재구성'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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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23일 02: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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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운동 진영에서 정파에 대한 논의들이 많다. ‘정파명부제’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나는 민주노동당이나 노동운동 내부의 정파와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어서 다소 ‘객관적’으로 요즘 정파문제를 생각할 수 있고, 자유롭게 정파 문제에 대해서 비판적 문제제기를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소그룹 뛰어넘는 ‘단결과 희생의 범주’

       
      ▲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
     

    정파가 무엇인가. 내 소견으로는, 70년대의 ‘민중주의’적 운동의 단계를 거쳐서 한국의 사회운동이 변혁운동으로 재정립되고 급진적・혁명적 운동의 단계로 이행하면서 나타난 ‘단결의 범주’였다. 그것은 조직적 측면에서 소그룹이나 개인 수준을 뛰어넘는 더 높은 수준에서 집단적 결속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더 철저하게 싸우기 위한 희생의 범주이자 위험을 무릅쓰기 위한 상호확인의 범주였다.

    콘덴츠라는 측면에서 보면, 민족해방파 혹은 반미자주파로 불리우는 NL은 반제반봉건 혁명을 기초로 한 중국혁명 모델과 그것을 계승한 반제(反帝)중심주의적・ 민족모순 중심주의적 전략노선에 출발점을 두고 있다.

    민중민주파 혹은 평등파로 불리우는 PD는 레닌주의적 혁명노선 및 동유럽의 민중민주주의혁명의 모델과 그것을 계승하는 계급모순 중심주의적・반(反)자본주의 중심주의적 전략노선에 출발점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정파는 한국사회운동의 정치노선적・투쟁노선적 인식을 심화시키면서, 소그룹적 수준의 운동단계를 뛰어넘어 정치적인 집단운동의 단계로 발전하는 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계급적 운동의 더 높은 단계로 지양되어가고 변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고착의 부정적 측면들을 가져가고 있다.

    정파가 원래 탄생했던 맥락과 달라진 변화에 조응하여, 또한 정파 탄생 이후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는 방향에서 현대적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정파운동의 한 사이클’이 바뀌고 있는 시점에 놓여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떠한 혁신이 필요한가

    드브레이는 언젠가 “혁명은 반(反)혁명을 혁명화한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이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고 하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 또한 포스트-독재 혹은 민주화, 포스트-민주화의 조건 속에서 대안적인 NLPD적 전략노선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파운동의 긍정성을 넘어 부정성의 질곡을 넘어서고자 할 때, 과연 어떤 혁신이 필요한가. 이러한 혁신을 사고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정파를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서 ‘역사적 구성물’로 보는 인식이 필요하다.

    모든 사물은 변화・발전한다. 현재도 ‘제국주의적’ 존재로서의 미국이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NL의 합리적 핵심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또한 레닌주의적 급진성의 정신이 여전히 유효하지만, 변화된 조건을 반영하는 새로운 역사적・민중적 지혜가 첨가되어야 한다.

    많은 정파‘주의’자들의 경우 NL과 PD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사실 현실은 복합적인 것이다. 하나의 복합적・총체적 현실만이 존재하고, 인식적・실천적 주체들은 그 복합적 현실의 한 측면을 ‘주요모순’이라고 하거나 ‘지배적 층위(層位)’라는 식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주체들이 강조하고자 했던 한 측면(예컨대 민족모순)과 다른 측면(예컨대 계급모순)의 ‘경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한 측면의 역사적 지위는 변화하고, 그 측면과 다른 측면의 관계도 변화한다.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포착하지 못했던 다른 측면들(예컨대 생태주의)도 복합적 현실의 더욱 중요한 측면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또한 개인이 집단화될 때 거기에는 집단 고유의 자폐성과 정체성도 동반된다.

    NL과 PD의 상호침투

    나는 이런 점에서 몇가지 정파의 재구성을 위한 혁신의 지점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첫째, 정파가 주목하고자 했던 현실의 주요모순들 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인식을 정파 내부에 끌어들여야 한다. 본시 NL적 쟁점과 PD적 쟁점은 복합적 현실을 당면 국면의 주요한 실천방향을 도출하기 위해서 부각시킨 것이지 그 쟁점들 자체가 현실 속에서 분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NL은 PD적 쟁점을 내포화하기 위해서-NL적 방식으로라고 표현해도 좋다-노력해야 하며, PD는 NL적 쟁점을 내포화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물론 이러한 상호침투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호침투가 이루어지지 않고 정파 자체가 복합적 인식을 자기 내부에 갖지 않게 됨으로써, 각각의 쟁점들이 부각되는 국면(예컨대 북한문제나 미국문제 등)에서는 그 정파의 동원력이나 목소리가 높아지나 그렇지 않으면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얼마전 <레디앙>에서 전개된 진보논쟁에서 진보진영 내부에서 ‘헤게모니의 정치’와 ‘진보적 민중주의’에 대해서 고민해보자는 논지의 글을 썼다. 내 식으로 이야기하면 전자는 NL적 문제의식의 PD적 수용이며, 후자는 PD적 문제의식의 NL적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옳다 그르다를 넘어서서 서로의 고민을 자기식으로 내재화하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한자본주의의 치열한 대결의식이 NL적 인식에 결합되어야 한다. PD적 인식이 지적하는 북한체제의 정체성과 억압성에 대한 고민이 NL적 인식에 결합되어야 한다. 그래야 ‘북한적 NL’과 독립된 ‘남한적 NL’이 정초될 수 있다.

    ‘반(反)봉건적 NL’과 다른 ‘반자본주의적 NL’이 가능할 수 있다. 또한 ‘무장한 지구화’ 속에서 관철되는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에 대해서 PD가 눈을 감을 필요는 없다. 북한의 정체성과 억압성을 가능하게 한 외적 변수로서의 미국의 지위에 대해서 PD가 굳이 눈을 감을 필요는 없다.

    ‘정파가 출현한 80년대 이후 20년이 흐르면서’ NL적 쟁점과 PD적 쟁점의 현실적 구성과 양자 간의 상호관계가 달라졌다는 인식을 새롭게 획득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들이 각각의 정파적 인식에 최소한 반영되어야 한다.

    NL적 프레임과 PD적 프레임 너머

    둘째, 20년 전에 정형화된 NL적 프레임과 PD적 프레임에서 담아내지 못하는 새로운 현실이 각각의 프레임 속에 담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파가 출현한 80년대 이후 20년이 흐르면서’ NL적 프레임과 PD적 프레임 너머의 쟁점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NL적 투쟁과 PD적 투쟁을 일부로 하는 민중투쟁을 통해서 획득된 민주화는 한국자본주의의 작동양식과 지배의 작동양식을 변화시켰으며, 이와 함께 민중들의 생활세계도 변화시켰다. 기층민중만이 아니라 중간층, 젊은 세대, 지식인들의 감수성도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는 학생운동이 주변화되어가고 있는 것도 이런 점에서 반면교사의 사례이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고 하는 새로운 현실은 NL적・PD적 프레임이 지구적 차원의 고민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민족국가적 프레임이 될 위험성을 높이고 있다. 이미 이루어지고 있지만 정파적 프레임에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새로운 조건에 대한 고민이 결합되어야 한다.

    20세기 초반의 혁명전략만으로 환원될 수 없을 정도로 반혁명은 혁명화되어 있고, 제2의 보수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지배의 혁신을 통하여 새로운 정세를 조성하고 있다.

    이런 상황 앞에서, NL과 PD가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전제 하에서 새로운 조건에 응전하여 스스로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할 것인가하는 고민을 해야 한다. 나아가 생태주의와 여성주의와 같은 새로운 프레임과 기존의 정파적 프레임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생태주의와 여성주의가 대면하지 않는 현대적 진보는 있을 수 없음은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점에 정파에도 각인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NL적 PD, PD적 NL이 더 많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생태주의적 NLPD, 페미니스트 NLPD, ‘정파를 넘어선 정파’가 나타나야 한다. 나아가 기존의 정파적 프레임 속에서 지역은 없었으며 자율적 개인은 없었고 다양한 하위주체들은 없었다고 하는 비판에 대해서 현대적 언어로 정파들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정파의 정체성과 자폐성

    셋째, 정파의 조직적 정체성과 자폐성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정파는 민중운동의 역사적 발전단계에서의 긍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새로운 변화발전의 전망 속에서 보면 ‘부정적 고착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개인들이 고립된 존재로 있지 않고 집단화되었을 때 거기에는 집단 고유의 기득권 질서와 자폐성의 함정이 존재함을 인식해야 한다. 이 점은 우리가 상대 쪽에 대해서 비판했던 지점이다. 조직적 특성이라는 점에서는 우리 쪽의 조직들에도 예외가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때 헌신과 희생의 범주였던 정파가 선거국면에서는 이해관계 실현의 통로와 네트워크로 작동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한 대선후보의 글에서도 “현재 민주노동당의 정파는 지나치게 중앙당 정치에 경도되어 있고 선거조직으로 전락하고 있다. 정파가 당내 선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당내 정치활동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주로 컨텐츠와 노선에 따른 것이 아니라, 거래에 의한 퇴행적 담합구조에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또한 정파조직이 선거 공천권을 독과점하여 자신을 ‘과잉대표’하고 당원을 의사결정과정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일상적 국면에서는 비(非)정파적 주체들을 배제하기 위한 ‘은밀한 소통의 통로’로 작동하기도 한다. 물론 정파와 같은 의견그룹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에서 민정계, 민주계 등 다양한 정파들이 존재한다.

    단지 민주노동당 내부로만 보면, 정파는 당적 통일성의 하위분파로-앞서와 같은 재구성의 과제를 논외로 하더라도-위치지워져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논어맹자에 나오는 ‘대동소이(大同小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좌파적 집단 내부에도 ‘대동소이’의 미덕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점은 20년 전의 정파의 ‘경계’를 고집해서는 않된다는 점이다. 나는 87년 6월 항쟁 이후 진보운동과 민중운동이 투쟁을 통해서 추동한 ‘대중의 변화’를 정작 진보운동과 민중운동, 그 구성적 일부로서의 정파가 담아내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다고 본다.

    대중의 변화는 추동했지만 특정한 이념적 형태를 띠는 대중만을 주목하고 담아내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NL정파 외부에 ‘NL적 대중’이 많이 존재한다고, 또한 PD정파 외부에 ‘PD적 대중’이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들을 과연 경계를 허물고 폭넓게 내부화했는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운동 내부의 ‘정파’가 고착된 배제의 범주이자 안주의 범주가 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변화된 상황은 새로운 지혜와 새로운 주체편제를 요구하고 있다.

    ‘자기 확인’ 정파를 뛰어넘어야

    넷째, 현시기 우리가 구체화내어야 하는 대안적 비전은 NL과 PD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더욱 복합적인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정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현실은 복합적인 것이고, NL이 추구하고자 했고 추구하는 민족모순은 분명 극복해야 할 현실의 한 측면이라는 걸 의미한다.

    PD가 추구하는 반(反)자본주의적 지향은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현실의 한 측면이다. 이것들을 견지하면서도 ‘복합적 해방의 대안프로젝트’를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에 현단계 진보주의자들이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엄혹한 시기 한국 사회운동에 변혁적 전통을 확립한 정파의 긍정적 유산-현시기 진보에 민족 간의 지배종속과 계급계층집단 간의 지배종속에 대한 변혁적 시각은 견결히 견지되어야 한다-을 계승하면서도 대안을 둘러싼 비젼에서도 혁신과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진보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이 한국사회의 다각적인 모순을 관통하는 핵심의제 및 담론을 생산”해 가는데 있어서 정파가 오히려 촉진제가 되는 구조로 전환되어야 한다. 정파가 순기능을 하려면 ‘자기확인 정파’에서 탈피하여 미래지향적으로 논쟁을 주도하면서 당원들을 대안적 의제논쟁에 불러들이고 고민케 하는 역할을 가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당의 노선과 정책을 풍부하게 하거나 혹은 견제하면서 대안담론과 정책을 제시하는 콘텐츠 경쟁에 나서야 한다”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파 내부의 성찰성

    모든 경우에 경계의 고착화는 인식과 실천의 질곡으로 나타난다. 내부집단과 외부집단의 인식이 크게 괴리되는 ‘자폐성’이 존재하게 될 때 그 경계는 반성적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런 점에서 인식과 실천의 과감한 ‘경계허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이 점을 나는 사실 정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예컨대 지식인 운동 등 많은 다른 진보적 조직현상에도 적용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파 내부에 성찰성의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편에서 정파 내부에 이념적 성찰성의 공간이 마련되어야 하며, 다른 한편에서 조직적 자폐성에 대한 성찰성의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신에 있어서 이념과 실천에 대한 성찰성은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미덕을 쉽게 폐기했는지도 모른다. 이념적・실천적 불철저성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성찰성이 확장될 때, NL과 PD의 경계, 외연과 내포는 재구성될 것이다.

    현재의 역사적・구조적・대중주체적 변화를 담아내지 않는 ‘자폐적 집단범주’를 넘어, 또한 새로운 진보주의자, 정파 외부의 동반자를 배제하는 범주를 넘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시대의 정파의 개방화와 현재적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 이 글은 필자가 주간 <진보정치> 316호에 기고한 내용으로 필자와 진보정치의 양해를 얻어 싣습니다. 이 원고는 매수 제한으로 신문에 다 싣지 못한 내용까지 포함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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