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화 통한 민주화 vs 중앙집중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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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23일 02: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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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문명의 산물인 자본주의의 막바지 공세로 보이는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엄청나게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 같은 삶의 방식에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대안적 삶의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용기 있는 소리를 들려주는 곳이 중남미이다.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모여 사는 목적은 필요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소수를 부유하게 만들면서 다수를 약탈하기 위해 생산합니다 ….자, 다른 세계를 위해, 우리의 지구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의 파괴가 아닌 대안을 위해 싸웁시다. 이 지구가 망한다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닙니다. 이 지구상의 삶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파괴 아닌 대안을 위해 싸우자

    위의 언급은 차베스가 한 말이다. 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이분법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자본주의의 파괴가 아닌 대안을 위해 싸웁시다”라고 했다. 그는 인간을 중심에 놓는 새로운 형식의 사회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 핵심 사상은 더불어 사는 ‘대안세계의 추구’, ‘개발시대 이후의 대안’, ‘저성장’의 철학이다.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서 “어느 한 기간을 정해놓고서 그 안에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우리를 서두르게 만들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요구에 따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과제이다”라고 썼다.

    저성장의 철학은 비영리와 연대에 기반을 둔다. 이런 의미에서 베네수엘라가 역점을 두고 실천하는 중남미 각국의 민중, 대중의 이익을 위한 연대(ALBA)와 중남미 통합의 노력은 바로 저성장의 철학을 구체화시켜 나가는 전략의 하나라고 인식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이달고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맥락에서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근대성’ 과 ‘진보’의 담론에 익숙한 식자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의 다른 ‘이성’에 대해 이해하고 설명하고 접근하려는 노력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성장의 철학을 사회과학의 시각에서 이야기하자면 알레한드로 오초아 아리아스의 지속가능한 내발적 발전( Desarrollo Endogeno Sustentable )이라는 개념과 만나게 된다.

    비영리와 연대를 바탕으로 한 저성장의 철학

    우리는 오랫동안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말을 들어왔다. 그러나 그 뿐이다. 계속해서 성장과 발전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히려 ‘지속적인 발전’을 추구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시각에서는 당연히 추구해야 할 목표 즉 발전을 이루기 위해 기술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이지 그 목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 이렇게 된 이유는 주류 경제학 자체가 사회과학으로서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성격을 저버리고 오직 수학적, 기술적 가정의 조합으로 타락한 데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개인으로 간주되고 집합적으로 보더라도 합리적 인간 즉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만 가정한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우리는 헐리우드 영화 등에서 소위 ‘미국식 삶의 방식’으로 쉽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개인의 노력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 공세는 지난 김영삼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오랜 시간 동안 마치 믹서기에 들어있는 것과 같은 무한 긴장의 삶의 방식을 우리가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발적 발전’의 철학은, 알레한드로 오초아 아리아스에 의하면 인간을 생존에 급급한 개인의 시각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발전’을 구현하기 위한 집단적 시각을 통해서 ‘시민’과 ‘사회적 과제’와 ‘사회적 자본’의 문제를 재정의하고 재구성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아직은 문제의식 수준인 ‘지속가능한 내발적 발전’

    ‘지속가능한 내발적 발전’ 은 어떤 전제를 포함한 완결된 경제 이론적 틀이 아니다. 하나의 문제의식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둘러싼 구체적, 현실적 동기를 중시하는 학습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작은 지역을 중요시한다. 그렇다고 김영삼 정부시절 우리가 많이 들었던 ‘지구화’의 개념과 같이 지역의 발전을 세계화의 흐름에 연결시키고자 애를 쓰는 것도 아니다.

    지역의 총체적 삶의 질의 발전을 중시하고 그 성과가 해당 공동체 내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시골의 가난한 동네에 의사가 가서 봉사하고 마을의 공동 위생을 위해 청소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된다

    이제는 계획이 아닌 비전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때이다. 누가 그런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가 ? 엘리트가 아니라 일반 대중, 시민들이 가지고 있다.

    알레한드로 오초아 아리아스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여태까지의 방식과 정반대의 접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발전은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회가 기능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측면들부터 집합적 정체성의 핵에 이르기까지.

    여기서 ‘사회적 과제’가 도출된다. 사회적 과제란 시스템적 활동을 통해 인간이 의미를 형성하고 타자와 함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과제란 존엄성 있는 삶을 찾는 것이고 공공적 행복의 실현에 근거한다. 사회적 과제를 정부나 엘리트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가 결정한다 는 것이다.

       
    ▲ 지난 1월 18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정상회담에 참가한 정상들. 왼쪽부터 에보 모랄레스(볼리비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브라질), 미첼 바첼렛(칠레), 우고 차베스(베네수엘라), 니카노르 두아르테(파라과이) 대통령.
     

    세계화 시대, 주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내발적 발전’은 대안적 비전이다. 따라서 기존의 ‘경제 발전’ 모델과는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후자의 경우, 시민, 토지, 국가는 시장에 의해 지배되는 질서 안에서 경제 활동에 기여함의 시각에서만 고려될 뿐이다.

    전자의 경우는 시장의 개방으로 선도된 세계화의 통합 과정과 국가 사이의 통상 장벽의 제거에 의해 희미해진 안쪽과 바깥 쪽 사이의 구별을 재조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점점 거대한 시장으로 이해되는 세계 안에서 주권의 행사에 대해 토론을 펼칠 것을 제안한다.

    쉽게 말해 ‘대의제 민주주의’와 ‘시장’에 기대는 신자유주의를 깨트리기 위해 지역적 차원에서 ‘참여,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발적 발전’은 구체적인 작은 지역을 중시하고 엔지오 즉 시민단체, 사회운동단체가 중심이다. 그 단체가 해당 지역에 기반하건 아니건 간에.

    그러므로 베네수엘라의 ‘내발적 발전’의 전략에서도 관료체제를 비켜가는 ‘주민위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주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미션’ 사업들과 주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조합운동’이 연계되고 있다. 그리고 지역 활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대안적 공동체 대중매체’(예를 들어, Vive TV)가 지원하고 있다.

    지역적 의제를 ‘아래로부터’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압박은 사회 운동의 집단적 형성을 막고 시민과 대중을 개인화, 파편화시키는 데 있다. 이와 반대로 ‘내발적 발전’은 반신자유주의의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가치, 능력, 태도를 강조하고 보존하기 위해 서로 다른 다양한 입장과 지역적 의제 또는 계획을 ‘아래로부터’ 모아가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고 알레한드로는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직접 체험하는 주민들로부터 대안적 제안이 나올 수 있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연대와 문화적 체험을 중시한다. 이런 자극과 대안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력이 커질 수 있는 것이다.

    알레한드로 사엔스에 의하면, 중남미도 오랫동안 지역 균형 발전과 경제 통합을 위해 중앙정부에 의한 ‘국가 발전 계획’이 있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프로그램들은 모두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진정한 지역의 발전보다는 국가의 거시적 경제 지표 성장이 목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신 자유주의가 진행되면서 ‘국가기능의 변혁과 위기’가 진행되고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추진되고 중앙정부의 권능이 축소되면서 영토적, 정치적 기능이 ‘지방화’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남미에게 80년대가 신자유주의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민주주의의 재정의의 시대’였다

    다시 말해 ‘국가기능의 축소’, ‘지방화’와 맞물려 시민사회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 권능을 축적, 표현,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시민사회의 저변으로부터 정책제안이 지방정부에 영향을 끼치고 주민들의 구체적인 활동공간인 지역의 문제와 요구들이 그 정치적 경로를 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부에 의해 다루어지지 않는 공간을 시민단체, 사회운동단체들이 활발하게 점유하게 된 것이다.

    중남미와 한국을 가르는 기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마르가리타 로뻬스 마야에 의하면, 베네수엘라 경제에서 석유 수익에만 의존하는 보호주의적인 수입대체 전략은 70년대 후반부터 이 나라를 위기상황에 빠뜨렸으며, 이후 1983년의 외채 위기를 거쳐 1989년에 본격화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시민들이 과격한 거리 시위를 하게 되는 1989년 2월의 ‘카라카소’(카라카스 대중 소요)를 만나게 된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집권정당과 정부는 정통성을 잃게 되고 통치 위기를 겪게 된다.

    그런데 ‘국가의 정치, 행정기능의 지방화’를 주 내용으로 하는 정치 개혁은 이미 전임정부 시절인 1984년에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시작된다. ‘카라카소’ 이후 대통령인 까를로스 안드레스 뻬레스는 상기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1989년에 ‘주지사 직선을 위한 법률’, ‘시 정부에 관한 법률’, ‘공권력의 분권화, 경계 및 이전에 관한 법률’ 등을 제정한다.

    이로써 새롭게 주지사, 시장의 직선이 이루어져 여태까지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했던 진보성향의 정치 행위자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고 건강, 교육, 문화 등의 행정이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이전되어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 민주주의에 활력을 주게 된다. 이전에는 시장, 주지사를 대통령이 임명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지점(지방화)이 중남미와 우리 사회를 가르는 분기점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거칠게 추진하면서도 지방화는 제대로 추진하지 않았고 중앙정부의 권능은 오히려 커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재정의’는 고사하고 오히려 민주주의의 후퇴를 불러오는 지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70년대의 군부독재를 겪고 난 중남미는 80년대에 경제적으로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적으로 국가기능의 축소와 지방화를 밀고 나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90년대에 들어와 다양한 시민단체, 인권단체, 원주민 단체 등이 지방화된 거점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재정의’하는 활력을 보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중남미의 신자유주의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반쯤은 담보하는 기능을 보인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비해 우리는 군부독재가 정치적, 문화적으로 청산되지 않은 채 ‘중앙통제적 신자유주의’ 정치 문화를 지속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다. 반면 중남미는 ‘지방화와 병행한 신자유주의’로서 같은 신자유주의라도 우리와 정치적인 성격이 달랐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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