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상의 유일한 신 그리고 남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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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22일 08: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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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3월 7일 아침 9시. 예정일을 닷새 지나, 수십년을 들어오던 그 공포스런 고통과 고통의 터널 끝에 발 딛게 될 경이의 그 순간을 암시하는 첫 진통이 찾아왔다.

    경험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선험적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계시처럼 강렬한 순간이었다. 환희와 두려움이 순간 교차하였다. 규칙적으로 찾아오며 차분히 그 강도를 더해가는 이 선명한 고통을 잘 쓰다듬으며 가볍게 아침식사를 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병원으로 출발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자궁이 3cm쯤 열렸고 아이의 머리카락이 조금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가 12시. 그 때부터 병원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아이가 좀 더 아래로 내려오도록 교신을 보내다가 고통이 더 과격해지자, 오후 3시쯤 넓은 욕조 속에 몸을 담갔다.

    여신의 탄생 그리고 고통과 경이로움의 사이

       
      ▲ 생후 1주일된 칼리와 엄마.
     

    가능한 한 최대한 자연스런 출산을 유도하는 이 병원에서는 산모가 원하는 모든 방식으로 자연스런 출산을 돕고 있었다. 물속에 들어가자 고통의 강도는 갑자기 둔화되고 몸은 잠시 평화를 누렸다. 옆에서는 커다란 고무공 위에 앉아서 고통을 달래는 산모도 있었다.

    릴라 병원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산파와 간호사, 간호보조원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처음 나를 맞아주었던 담당 산파에서부터, 그날 하루 종일 만났던 모든 여성들은 마을잔치라도 준비하는 듯 경쾌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들의 눈빛은 마치 ‘잠시 뒤 좋은 일이 있을거에요’라고 가볍게 윙크하는 듯 했다. 서로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는 여성들의 그룹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친밀하고 온화한 분위기는 공포에 위축되어 있던 나를 확실히 위로해주었다.

    무통분만 주사라는 의학적 개입을 선택하는 순간, 앉거나 엎드려 아이를 낳는 완전히 자연스런 분만은 포기해야 하므로 가능한 한 그 순간을 미루고 싶었다. 그러나 물속에서의 시간이 1시간이 넘어가자, 고통은 물로 잠재울 수 없는 수준으로 한층 치솟았다.

    결국 척추에 시술해야 하는 무통분만 주사를 요구했고, 여느 산모들처럼 침대에 앉아, 자궁이 더 열리기를 기다렸다. 기계에는 하늘이 깨질 듯 비명을 질러야 할 산통이 뾰족한 산을 그리며 지나가는데, 이 신통한 문명의 이기는 그 고통을 무화시켰다. 옆에 있던 희완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평소처럼 뱃속 아가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두시간 반이 지나자 무통분만 주사의 약 기운이 떨어지고 약을 재차 투입해야 했는데, 2차 투입부터는 주사의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3, 4차로 몰핀의 수치를 높여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살인적인 고통이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했다. 사랑스런 아기가 뱃속에서 나오는 중인데, 마치 공룡이 내 뱃속을 짓이기고 다니는 것 같았다.

    마취과 의사가 당황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몰핀 강도를 높이는 것을 포기하고, 새롭게 주사투입 장치를 설치하였다. 온 몸이 고통에 휘갈겨지고 난지 2시간 지난 뒤였다. 놀랍게도 의사가 무통분만 주사를 새로 설치하기로 한 순간부터, 난 비명지르기를 참을 수 있었다.

    약 기운이 돌기 위해 적어도 15분은 있어야 했지만 내게 던져진 한줄기 희망이 공포를 덜어주었던 것이다. 기약없이 이어지는 불안이 고통을 가중시켰고, 희망이라는 불가시한 존재가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음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무통분만 주사 재시술 후 한 시간 쯤 지나자 이번엔 전혀 예기치 못했던 또 다른 고통이 엄습해왔다. 허벅지에 갑자기 신경이 뭉쳐서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아픔이 왔는데, 누군가 바늘을 한주먹 움켜쥐고 세게 그 곳을 가격하며 비트는 듯했다. 시간은 벌써 밤 10시를 넘어가는데, 이 때부터는 산통이 다가올 때, 힘을 줄 수도 없었다. 다른 고통을 압도하는 허벅지의 고통이 산통을 삼켜버려 산통이 감지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침 9시부터 물 한모금도 먹지 못해, 더 이상 어떤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모든 걸 내게 맡겨놓고 한없는 고통 속에 날 던져두고 있는 모든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제발 어떻게 좀 해 달라”. 나는 희완과 산파를 붙잡고 절규했다. 12시간이 넘게 지속되는 이 고통에서 영원히 헤어나오지도 아이를 낳지도 못할 것만 같았다.

    20세기 초에 아이를 낳은 이사도라 던컨은 그녀의 자서전에서 2박3일간 산통이 계속되는 동안 그녀를 고통 속에 내버려 두던 의사를 질타하며, 이토록 당연시되는 야만스런 출산의 관행이 남자들이 치러야 할 것이었다면, 분명 의학은 다른 방법을 강구했었을 것임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1세기가 지나 의학은 출산의 야만스러움을 상당부분 개선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피할 수 없이 고스란히 겪어야만 했다.

       
     

    자정이 되서야 처음 나타난 의사

    결국 자정이 되서야 의사가 불려왔고, 겸자시술이 시행되었다. 의사의 열 손가락에 긴 가위같은 것을 끼고 자궁 속으로 깊게 손을 집어넣어 아이의 머리를 감싸는 작업으로 아이가 보다 쉽게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시술이었다. 그러나 강제로 아이를 끌어내리는 건 아니었고 여전히 힘을 주어야 하는 건 내게 남겨진 몫이었다.

    겸자가 아이의 머리를 감싸쥐는 과정이 끝나자, 그날 만났던 유일한 남자였던 당직의사는 내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인, 내 얼굴을 똑바로 보세요. 이제부터 당신 차롑니다. 호흡을 고르고 아이가 나올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해 아래로 힘을 주세요”. 아…. 그러나 나는 허벅지의 고통 때문에 힘을 주어야 하는 순간을 느낄 수 없었다.

    이 때, 경험 많은 또 다른 산파가 방에 들어왔고, 그녀의 도움에 의해, 그래프에 가파른 산이 밀려올 때 지시에 따라 의식적으로 호흡을 아랫배로 밀어넣었다. 날이 바뀌고, 새벽 1시 반, 아이의 머리가 나왔다는 탄성이 터져 나온지 30초도 안돼서, 칼리는 내 배 위에 놓여졌다.

    한 마리 괴물이 들어있는 건 아닐까 싶던 조금 전의 상상은 사라지고, 역력한 동양아이의 얼굴을 한 나의 아가에게 “너였구나, 엄마가 미안해… 힘들었지. 그 속에서 빨리 나오고 싶었지” 난 출생의 고통을 함께 했을 아이에게 환희 가득한 표정으로 눈물을 쏟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이는 이상하게도 울지 않았다. 불안해진 내가 “왜 아이가 울지 않지요?” 하자, 그제서야 아이는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듯 울음을 터뜨렸다. 땀과 눈물과 핏자국으로 얼룩진 희완의 기진맥진한 얼굴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피로 범벅된 그의 흰 셔츠가 16시간 반 동안 얼마나 치열한 전투 끝에 정의의 여신 칼리가 탄생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희완은 탯줄을 가위로 잘라냈고, 이어서 산파와 함께 아이를 목욕시키러 갔다. 체력이 허락하면 산모도 함께 아이를 목욕시키러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난 그런 호사완 거리가 먼 상태였다. 멀리서 산파들이 태어난 아이를 호들갑스럽게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가, 난 의식을 잃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렸던 것이다. 반시간쯤 뒤에 깨어난 내게, 홍차 한 잔이 전해졌다.

    마지막에 너무 힘을 준 탓에 항문이 밀려나와 평화롭고 가뿐해야 할 몸에는 또 다른 고통의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벼락처럼 충격적인 고통에서 놓여난 뒤 비로소 만끽할 수 있었던, 맨발로 우주의 신비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듯한 출산 직후의 경험들은 새롭게 이어지는 고통의 릴레이를 너그럽게 관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휠체어를 타고 입원실로 옮겨진 내겐 바로 아이에게 수유를 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주어졌다. 이 모든 걸 겪고 나서, 어떤 충전도 없이 바로? 바로.

    어느새 나의 두 가슴은 아이의 탄생을 맞아 서둘러 모유를 준비하고 있었고, 산파의 도움으로 어설프게나마 자세를 잡은 아이와 내가 수유를 시도했다. 새벽 5시 아이는 힘차게 젖을 빨았다. 기껏해야 글이나 생산해낼 줄 알았던 내가, 이토록 구체적인 생산물을 몸에서 만들어내고 직접적으로 이것이 내 아이를 성장시킨다는 사실. 그것은 출산에 버금가는 구체적이고 충격인 감동이었다.

    생동하는 우주의 일부이며,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 대지이자, 생명을 잉태해내고 키워내는 내 안의 여신이 일순간에 수억광년을 가로지르며, 깨어나는 듯했다. 가깝게는 14세 때 시작되었던 초경에서부터 내 어머니와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이어온 생명창조의 위대한 전설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우주가 일깨워줄 내안의 신성을 탐험하게 될 것이었다.

    여자는 신이었고 남자는 인간이었다

       
      ▲ 희완의 작품 "수정교"의 첫번째 성화(聖畵)
     

    희완은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신은 여성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그들 속에 내재한 신성과 모성에 무한한 경의와 인류를 위한 희망을 걸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찍고자 했던 나의 초상도 억압하는 남성(조지 부시, 차우체스쿠 등) 억압받는 평범한 여성들을 대비시키는 작업이었다.

    아이의 출산과 더불어 내가 우주의 신비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동안, 그 모든 과정을 바로 옆에서 함께 했던 희완에게 여성에게 내재한 신성에 대한 믿음은 더욱 구체적인 것이 되어갔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남자가 행한 조력은 여자가 이후 몸 안에서 진행시켰던 모든 과정, 또한 그보다 훨씬 이전, 소녀시절부터 달과 함께 차면 기울고, 기울고 나면 다시 채우는 우주의 섭리를 온몸으로 습득하며 준비해온 어머니로서의 과정에 비할 때 지극히 미약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희완은 분명히 인지했다. 그는 이 놀라운 경험들이 사회적으로 너무 적게 공유되어왔음을 탄식하며 나로 하여금 경험을 기록을 하고 전파하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그는 나와의 사랑이 그의 영혼에게 새로운 날개를 달아줄 무렵, 나를 여신으로 자신을 그 여신을 섬기는 신도로 묘사하고 그것을 수정교라는 하나의 종교로 명하며 경전과 107개의 성화까지 곁들인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킨 바 있다.

    13세 때 청년 공산당원에 가입했고, 20대에는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서른 이후론 줄곧 아나키스트로 살아온 시들지 않는 좌파인 희완은 21세기에 들어선 한 여자를 신으로 섬기는 소박한 신도로서, 고단수의 에코-페미니스트로서 다시 한 번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그들의 잠자던 영혼에 날개를 달아줄 여신이 있을 터이다. 그녀를 만나거든 그 앞에 겸허히 엎드려 사랑과 존경을 바치시길. 그 때 인류는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폭정을 중단하면 자신을 주겠다고 사담후세인에게 공언하던 이탈리아의 배우출신 국회의원 치치올리나의 선언은 언론이 전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스꽝스런 해프닝만은 아닐 수 있다고 짐작해본다.

    릴라병원은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산모는 환자가 아니고 출산은 의료행위가 아니며, 의사는 단지 필요한 순간 부분적 개입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철저히 믿는 릴라병원에서의 출산체험은 여러가지로 내게 의문을 남겼다. 과연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솟구쳤다.

    나의 엄마는 나를 낳고서 목 놓아 우셨다고 했다. 딸인 것이 한스러워서가 아니라 딸이기 때문에 나중에 또 이토록 험한 경험을 내가 반복해야 할 것이 미안해서였다. 엄마의 걱정대로 난 36년이 지난 뒤에 매우 혹독한 출산경험을 해야 했다. 자연스런 출산에 집착한 나머지 의학적 개입 위한 더딘 결정들 속에서 내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과연 그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는지 확언할 수 없었다.

    첫 수유를 하고 한 숨 자고난 아침, 배달된 첫 아침식사는 참담했다. 주먹만한 바게트 빵. 밀크 커피. 오렌지 하나. 이걸 먹고 아이 젖을 만들라고? 배달 해주는 아주머니는 이 평범한 프랑스의 아침식사에 더 이상 추가할게 뭐가 있냐고 날 별스럽게 취급했지만, 내게는 미역국을 한사발 씩 먹어야 젖이 나온다고 배워온 한국여자의 본능이 이 때만큼은 격렬하게 발동했다.

    미역국은 못줘도 이건 아니잖아!! 하필 그날따라 지방에 강연을 가야 했던 희완이 그동안 연마해온 미역국을 끓여오지 못하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옛 룸메이트 옥남이 압력솥 가득 걸죽한 미역국을 담아오지 않았던들 그날 아침의 우울은 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칼리와 함께 눈을 뜬 그날은 3월 8일. 출산예정일을 한참 어기고 엄마를 긴 고통 속에 머물게 하면서 이 고집스런 아이가 택한 자신의 생일은 <세계여성의 날>이었다. ‘치밀하기도 하지. 짜식. 나면서부터 자신의 신화를 위한 첫 장을 준비하는군.’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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