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불교를 빛낸 네 승려 이야기
    [컬렉터의 서재] 국사 공부가 어렵다는 K에게
        2023년 04월 17일 03:02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선생님! 도대체 이 괴상한 용어들은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교관겸수, 정혜쌍수, 돈오점수….”

    K야. 어느 날 네가 따지듯이 들고 온 교과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의천은 흥왕사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으며, 또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청사를 창건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이를 뒷받침할 사상적 바탕으로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 체계인 정혜쌍수를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철저한 수행를 선도하였다. 또 지눌은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하는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의천과 지눌이 고려시대 승려이고, 뭔가를 통합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교관겸수, 정혜쌍수, 돈오점수 이런 용어를 보면 무슨 암호 같아요. 국사 교과서에 저런 어려운 용어들이 중간중간에 섞여 있어서 흥미가 많이 떨어져요.”

    그래. 네 말처럼 국사 교과서는 그리 친절하지 않았구나. 그러면 선생님들이라도 친절해야 할텐데, 진도 나가기 바쁘다는 이유로 역시 그러지 못했을 거야.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이런 어려운 용어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던 너에게 오늘은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 위의 용어들이 무슨 의미인지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원효와 의상

    K야.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던 때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해보자꾸나.

    우리나라에 불교가 언제 들어온 건지는 알고 있겠지?

    그래. 삼국시대야.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이고, 백제는 침류왕 때니 대략 4세기 후반경이란다. 신라는 두 나라에 비해 다소 늦은 5세기경 수용되었고, 6세기 법흥왕 때 이차돈 순교 사건을 계기로 공인되었단다.

    그런데 외래 종교나 사상이라는 것이 나름 복잡한 체계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이해되긴 힘들었고, 그것이 다 소화되는 데는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했단다. 그럼 불교가 완전하게 소화되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을까? 대략 50년? 100년?

    그 정도로 짧지는 않아.

    성리학 예를 들어보자. 고려 후기 당시 최신 유학이었던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안향에 의해서인데, 1290년 원나라 간섭기였던 충렬왕 때였어. 그런데 이(理)와 기(氣)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우주 원리나 인간 심성을 다루는 이 사상을 완전하게 소화하는 데 무려 3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단다. 조선시대 명종과 선조 시기 이황과 이이가 활동했던 때로, 이황이 『주자서절요』, 『성학10도』를 저술하고, 이이가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저술했을 때가 대략 1560~70년대였으니까 그 시기를 기준으로 하자면 270년, 280년 정도거든. 이황은 주자의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이이는 심지어 그것을 조금 더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아. 우리나라 지폐 1,000원권과 5,000원권에 그분들이 실려 있는 데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란다.

    그럼 이 이야기를 불교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불교는 4세기 후반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이게 완전하게 소개된 게 7세기 후반이야. 그러니까 불교도 대략 300년이 걸렸다는 거지. 그럼 성리학 쪽 이황과 이이에 해당되는 사상가들이 불교계에도 있을 거 아니냐? 그 분들이 누구냐하면 바로 원효와 의상이야.

    그럼 이 7세기 후반 활동했던 이 신라의 대사상가들이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차근차근 살펴보자. 이들의 업적은 당시 통일기 신라 불교계의 2가지 과제와 연결해 이해하면 좋은데, 하나는 불교 이해의 심화이고, 또 하나는 불교의 대중화야.

    원효는 누구보다 그 시대 불교계의 과제를 정면으로 해결하고자 나선 인물이야. 불교 이해의 심화와 관련한 그의 업적부터 보자. 우선 이름 속에서 그의 업적을 유추해볼 수도 있어.

    원효(元曉), 으뜸 원(元)! 밝을 효(曉)! ‘으뜸 밝음’, ‘짱 밝음’.

    그래! 원효는 눈을 번쩍 떠서 당시 가장 밝았던 인물이야.

    4세기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 여러 종파가 뒤죽박죽 뒤섞여 들어왔던지라 삼국시대에는 불교라는 것이 부분적 단편적으로 이해될 뿐 전체적으로 이해되지 못했단다. ‘군맹무상(群盲撫象)’이란 사자성어를 들어봤을 거야. 불교경전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데 ‘시각 장애인들의 코끼리 만지기’라는 뜻이다. 귀를 만진 어떤 사람은 코끼리를 ‘부채’라 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이라고 하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밧줄’이라고 하는 식이지. 삼국시대 한국인들의 불교 이해 수준이 꼭 이런 수준이었어.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 최초로 감았던 눈을 번쩍 떠서 불교를 전체적으로, 또 종합적으로 보게 된 인물이 바로 원효였던 거야. 눈을 떠서 보니 놀랍게도 불교는 밧줄이기도, 부채이기도, 기둥이기도 했어. 이런 경지에 오른 원효는 여러 종파들이 불교는 밧줄이네 부채네 기둥이네 하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무척 안타까웠을 거야.

    그래서 그는 생각했어. 여러 종파의 이론들이 얼핏 보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여도 보다 높은 차원에서는 융합될 수 있다고. 그래서 그는 여러 종파의 대립과 다툼을 화해시키는 사상을 제시했어. 이를 화쟁사상이라고 하는데 화해시킬 화(和), 다툴 쟁(爭)자야. 다른 말로는 일심사상(一心思想)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원효가 불교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사상이었어. 만약 그랬다면 원효 역시 어느 한 쪽의 주장에 가담하여 불교가 부채니, 밧줄이니 하면서 싸웠겠지. 원효 단계에서 불교가 드디어 한국에서 완전히 이해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원효의 업적이 더 빛나는 것은 그가 유학파가 아니라 국내파라는 점인데, 너는 원효가 당나라 유학을 가다가 중간에 돌아온 이야기를 알고 있을 거야.

    원효의 업적은 여기서 멈춘 것이 아니었어. 그는 불교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이야. 삼국시대 불교가 처음 수용된 이래 불교는 철저히 지배층 중심의 종교였어. 한자로 쓰인 불교경전을 민중들은 읽을 수 없었고, 혹여 읽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 이렇게 불교는 철저히 귀족들만의 종교였고, 불교를 신앙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었지. 민중들은 불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신앙하는지를 제대로 알기 어려웠어. 원효는 이런 민중들에게 문턱을 대폭 낮춰서 민중들이 불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제시했어. 일종의 변칙 같은 것인데, 경전 내용을 읽을 필요도 알 필요도 없이 6자의 글자만 무조건 외라는 거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부처님인데, 그 부처님 이름을 입으로 계속 외라는 거야. 그 앞에 붙이는 ‘나무(南無)’는 영어로 말하면 ‘believe in∼’, ‘rely on∼’이런 뜻이야. 그러니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 부처님께 의지합니다’. ‘아미타 부처님을 믿습니다’, ‘아미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뭐 그런 뜻인 거지. 이렇게 부처 이름을 외는 행위를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원효는 민중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염불만 열심히 하면 나중에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 거야. 아미타 신앙을 민중들에게 보급한 방법도 특이해. 그는 책상머리에 앉아서가 아니라 직접 신라의 천촌만락을 돌아다니며 아미타 신앙을 퍼뜨렸어. 심지어 ‘무애가’라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까지 말이야. 이런 노력 때문이었는지 원효 사후 수십 년이 지난 후 신라의 무지렁이 민중들이 드디어 부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단다. 이렇게 불교 대중화에 대한 그의 기여는 큰 것이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다음의 욱면 이야기는 노비가 염불을 통해 성불했다는 이야기인데, 다소 신비한 내용이긴 하지만 불교 대중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 기록이야.

    욱면은 신라 경덕왕 때에 강주(康州)의 귀진(貴珍) 아간(阿干)의 집에 살던 종이었다. 그녀는 주인을 모시고 절에 갔을 때 마당에 서서 염불을 했으나, 주인은 그녀가 직분에 어긋남을 미워해 늘 곡식 두 섬을 주어 하루 저녁에 다 찧게 했다. 하지만 욱면은 항상 초저녁에 다 찧어놓고 절에 가서 염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뜰의 좌우에 긴 말뚝을 세워놓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매 놓고는 합장하며 좌우로 이를 흔들어 스스로를 경책(警策)하기까지 했다. 그때 하늘에서 ‘욱면 낭자는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라’는 소리가 들렸고, 스님들이 이 소리에 욱면을 법당에 들어가 예에 따라 정진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의 음악이 서쪽으로부터 들려오는가 싶더니 욱면이 몸을 솟구쳐 집 들보를 뚫고 나갔다. 이어 서쪽 교외로 가더니 육신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해 연화대에 앉은 채 큰 광명을 내쏘면서 천천히 가버렸는데 음악소리는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진] 왼쪽은 일본 고산사에 소장되어 있는 원효대사 진영으로 무로마치 시대(1336~1573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은 용산 효창공원에 서 있는 원효대사 동상이다. 이 동상은 1969년 재계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는데, 동상 뒷면에는 “원효는 자주적 독창적 사상가였고 신라 통일의 정신적 지주였다. 번영과 평화와 통일의 이상을 높이 쳐들고 그 확실한 길을 보여줬다”라고 적혀 있다. 한국 불교사상을 대표하는 원효대사는 현재 이 동상 외에도 원효로, 원효대교 등의 이름으로 기념되고 있다. (왼쪽은 인터넷 사진, 오른쪽은 박건호 수집 사진)

    그럼 의상(義湘)이 남긴 업적은 무엇일까? 그가 원효와 동시대 인물이란 것은 너도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원효와 의상이 함께 당나라 유학길을 가다가 원효는 ‘해골물 사건’을 계기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지만, 의상은 그 길로 당나라 유학을 떠났어.

    불교 이해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의상도 원효처럼 높게 평가해야 할 인물이야. 원효나 의상이 활동할 당시 우리나라 불교는 교종 중심이었어. 교종이 뭐고 또 선종이 뭔지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은 교종이 경전을 중시하는 불교였다 정도로만 알아두자.

    그럼 질문!

    세계 4대 종교 중 가장 방대한 경전을 가진 종교는 무엇일까? 쿠란의 이슬람교?, 바이블의 크리스트교? 이렇게 질문한 의도를 이미 눈치챘을 거야. 그래, 정답은 ‘불교’야.

    그런데 그렇게 방대한 불교 경전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경전으로 평가되는 경전이 뭐냐 하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짧게 줄여서 『화엄경(華嚴經)』이야. 이 경전은 석가모니가 성도한 깨달음의 내용을 담았는데, 한마디로 불교 사상의 에센스가 담긴 경전으로 보면 돼. 그런데 문제는 이 『화엄경』이 너무 난해하다는 점이야. 불교 사상의 정화(精華)가 담겼다는 이 경전이 지독히 어려웠기 때문에 이 『화엄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교 사상을 완전히 소화했다고 할 수 없겠지. 반드시 넘어야 할 거대한 산 같은 존재가 이 『화엄경』이었던 거야.

    의상의 업적은 당나라 유학 가서 단 몇 년 만에 이 『화엄경』을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돌아왔다는 거야. 그러니까 원효와 의상은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대사상가들인데 약간 장르가 달랐던 게지. 원효가 불교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상 체계를 확립한 분이라면, 의상은 불교 경전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난해한 『화엄경』을 완벽하게 이해한 분이었다.

    그럼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이 ‘내가 화엄경을 다 이해하고 돌아왔다’라고 말하면 분명히 의심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야. 의상이 당나라에서 흥청망청 놀다가 돌아와서는 말로만 『화엄경』을 완전히 마스터했다고 떠드는지 알 수 없잖아. 그렇다면 의상은 자신의 높은 사상세계를 뭐로 증명할 수 있었을까?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라는 신비한 그림을 한 장 그려왔어. 이는 『화엄경』 핵심 내용을 210자의 글자를 통해 표로 만든 건대, 의상 자신이 이해한 화엄사상의 핵심이 여기 담겼다고 보면 돼. 이 그림은 당나라 유학생활을 결산하는 의상의 졸업논문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데, 화엄사상을 잘 모르는 사람도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에 도착할 때까지 한자 한자 글자를 따라가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화엄사상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거야. 『화엄일승법계도』는 지금도 『화엄경』의 근본 정신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한 명저로 평가되고 있어.

    이렇게 화엄사상을 완벽하게 이해한 대사상가였던 의상은, 신라로 돌아온 얼마 후 신라 화엄종을 창시하고 영주 부석사를 그 본찰로 삼았단다. 앞으로 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 중 하나인 부석사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 절에서 무엇보다 의상 혹은 화엄사상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꼼꼼히 살펴봤으면 좋겠다. 의상 귀국 때 따라 들어온 당나라 선묘낭자 이야기라든지, 부석사 창건 당시의 설화가 담겨있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 그리고 절의 공간 배치라든지…….

    [사진] 왼쪽은 의상대사 초상화이고, 오른쪽은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의 핵심을 하나의 표로 정리한 『화엄일승법계도』이다.

    그럼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로 요약된 화엄경의 핵심 내용은 뭘까? 210자의 내용 중 다음 부분을 살펴보자.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 있고
    一即一切多即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속에 시방(十方)을 머금고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티끌 속에도 또한 그렇네
    無量遠劫即一念   한량없는 먼 시간이 곧 일념(一念)이요
    一念即是無量劫   일념이 곧 한량없는 시간일세

    모든 것 속에 하나가 들어있고,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한량없는 시간 속에 한 순간이 들어있고, 한 순간 속에 한량없는 시간이 들어있다. 이렇게 우주 만물은 각자 개별적으로 떨어진 채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의상이 이해한 『화엄경』의 핵심 내용이야.

    흥미로운 건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중에 이 화엄경의 세계관을 아주 잘 반영한 영화가 있었다는 거야. 혹시 알겠니?

    힌트를 줄까?

    어떤 행성에 생명의 나무가 있어. 그 나무는 거대한 뿌리를 통해 다른 생명들과 연결되어 있단다. 내가 말 비슷한 생명체를 타고 내 머리카락을 말 갈기에 콘센트 꽂듯이 꽂으면 서로 존재가 연결되어 내가 말이 되고, 말이 내가 되기도 해.

    알겠다고?

    그래 맞아. 영화 [아바타]야. [아바타]에 그려진 ‘모든 생명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은 불교의 화엄사상과 관련되어 있어. 그래서 이 영화 개봉 당시 불교계는 환호했고, 조계종 승려들이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단다.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제임스 카메룬 감독은 서양 사람이잖아. 어떻게 된 걸까?

    어릴 때부터 그는 동양사상에 관심이 많았대. 그래서 그는 자기가 관심 있는 내용들을 일일이 다 메모해두었고, 그런 내용들을 영화에 담았던 거야. 잘 생각해봐. 장자의 ‘나비의 꿈’ 이야기도 그래.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고 부르는 이 설화에서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팔랑팔랑 춤추며 날고 있다가 깨어났지만, 과연 자신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었는지, 아니면 지금의 자신이 나비가 꾸는 꿈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장자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자인지 모를 이 이야기가 결국 아바타 이야기잖아. 영화 [아바타] 속에 담긴 이런 동양사상들을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훨씬 더 흥미로울 거야.

    어쨌든 원효와 의상은 7세기 후반경 한국의 불교 이해 수준을 이렇게 한 단계 높인 분들이야. 4세기 들어온 불교를 300년 만에 완전히 소화해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특히 원효는 귀족 불교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대중 불교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업적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왼쪽은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만든 영화 [아바타] 포스터, 오른쪽은 2010년 2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등 조계종 승려 150명이 ‘영화 속 세계관이 불교와 상통’한다며 단체 관람하는 모습이다.

    신라 말 선종이 유행하다.

    신라 말 이런 불교계에 큰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그건 선종(禪宗)이라는 새로운 불교의 유행이야. 8세기 후반 처음 수용된 선종은 9세기 들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단다.

    그럼 교종과 선종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줄게. 좀 어려울 수도 있어.

    먼저 불교라는 종교의 목표부터 생각해보자.

    불교는 무엇을 추구하는 종교일까?

    부처님 숭배? 그런 게 아니야.

    원래 불교는 ‘진리 획득’을 목표로 하는 종교야. 진리를 획득한 자를 ‘붓다(Buddha)’, 우리말로는 ‘부처’, 한자로는 ‘佛陀(불타)’라고 하지. 그래서 영어로는 불교를 붓다를 추구하는 종교라고 해서 ‘Buddhism’이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그 방법론이야. 어떻게 진리를 획득할 것인가?

    막연하지?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유일하게 진리를 획득한 인물이 있잖아.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 흔히 석가모니(釋迦牟尼)로 불리는 인물이야.

    방법이 막연하면 유일하게 부처가 된 인물인 석가모니를 따라하면 되잖아.

    내가 살이 쪄서 30kg 감량하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른다고 가정해 봐. 그런데 내 친구 중에 30kg 뺀 친구가 있어. 그럼 그 친구가 한 대로 똑같이 따라서 해보는 거지.

    교종은 ‘석가모니 따라 배우기’를 그 방법론으로 선택한 불교야.

    석가모니 가르침은 어디 담겼지? 그래 경전이야.

    경전에 담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하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교종의 기본적인 생각이야. ‘교’가 가르칠 ‘교(敎)’자잖아.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담긴 것이 경전이니 ‘교(敎)’가 곧 ‘경전’이라고 이해하면 돼.

    다시 정리해보자. 석가모니의 가르침, 즉 ‘경전에 대한 공부(敎學)’를 통해 진리를 획득하겠다는 것이 교종이야. 이때 진리는 ‘부처의 지혜’라고 보면 된단다. 더 쉽게 표현하면 교종은 ‘공부하는 불교’, 영어로 표현하면 ‘Studying Buddhism’쯤 되겠지.

    그런데 선종은 이와 전혀 다른 방법론을 제시해. 선종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쯤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가 중국 남조 양나라에 처음 이를 전했다고 해. 그런데 새로운 방법론을 이단시하는 분위기 때문에 달마는 갈대를 꺾어 양자강을 건너 북쪽으로 갔고, 뤄양의 소림사를 찾아가 그곳에 머무르며 힘껏 정진했는데, 소림사는 이렇게 중국 선불교의 중심 사찰이 되었어. 소림사가 무술로만 유명한 절이 아닌 거지.

    그렇다면 선종은 교종과 어떻게 다를까?

    선종은 교종이 중시하는 경전 공부의 문제점을 지적했어. 교종에서는 경전을 공부하면 진리를 배울 수 있다고 했는데, 경전은 말과 글로 되어있잖아. 그런데 이 말과 글은 표현의 한계가 너무도 분명하단 말이다. 예를 들면 여기 새로 출시된 열대 과일 음료가 있다고 하자. 10가지 맛이 미묘하게 섞였다는 음료를 내가 마신 후 이를 마셔보지 못한 이들에게 설명한다. 이 다양한 맛을 10분이고 20분이고 아무리 설명해본들 마셔보지 못한 이들이 이를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선종은 이렇게 음료수 맛 하나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말과 글이 어떻게 심오한 진리를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했던 것이지. 그러므로 진리는 말과 글로 표현될 수 없고, 경전에 담길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다. 경전이라는 것은 진리를 표현한 불완전한 수단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게 선종이 교종을 바라보는 태도야. 이때 등장하는 것이 유명한 달과 손가락 비유란다. 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진리라고 하자. 나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경전은 저 달인가? 손가락인가? 교종에서는 진리 그 자체로 여겨지는 경전이, 선종에서는 그저 손가락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경전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교종과 선종은 크게 달랐어.

    그렇다면 경전 속에 진리가 없다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선종의 설명에 따르면 진리는 경전이 아니라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각자의 마음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전을 읽고 공부하는 대신, 그 눈을 안으로 돌려 마음(心)을 직관(直觀)하는 것이다. 이를 줄여서 ‘심관(心觀)’이라고 한다. 이를 다른 말로는 ‘선(禪)’이라고 하는데, 주로 앉아서 하기 때문에 ‘좌선(坐禪)’이라고도 하고, 다르게는 ‘참선(參禪)’이라고도 한다.

    위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말도 선종에서는 아주 중요한 표현이야. ‘직지인심’은 ‘곧바로 사람 마음을 가리킨다’는 뜻이야. 문자나 언어를 빌리거나 외적 대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마음을 잘 응시해서 직접 단번에 마음의 근원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직지(直指)’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표현 같지 않니?

    그래 맞아.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로 알려진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에 나오는 바로 그 ‘직지’야. 책 제목을 아예 두 자로 줄여 『직지』라고만 부르기도 하지.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라는 책 제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한 책이란다.

    선종에서는 이렇게 ‘직지인심’을 통해 자신의 마음 깊숙이 내재하는 자기 내면의 불성을 직관하면,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깨닫게 되고 그대로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단다. 이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표현한단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이 8자의 글귀 속에 선종의 근본 정신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잘 기억해 둬.

    이런 논리에 기반한 선종 불교는 경전 공부 대신 벽을 마주보고 앉아서 눈을 지긋이 감고 마음 속의 불성을 깨닫기 위해 깊은 사유와 사색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유와 사색을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Meditating’ 정도가 되고, 선종 불교는 ‘Meditating Buddhism’쯤 되겠다. 영어로 선종 불교는 ‘선(禪)’의 일본식 발음을 빌려 만든 ‘Zen Buddhism’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설명의 편의상 ‘Meditating Buddhism’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을 이해하길!

    진리가 경전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선종에서는 경전 공부 대신 마음 속에서 불성을 깨닫기 위해 그저 묵묵히 않아서 선 수행을 행했어. 어느 정도 맹렬하게 수행을 했는지, 이 선 수행의 전설로 통하는 몇 분을 소개할게.

    먼저 선불교를 중국에 처음 전한 달마대사가 있는데, 그는 소림사 근처 쑹산의 바위 동굴 속에서 9년 동안 면벽 수행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지. 또한 일제 강점기 판사 출신으로 출가해 승려가 된 효봉 스님은 한번 앉으면 일어설 줄 몰랐다고 해서 별명이 ‘절구통 스님’이었어. 한번은 참선을 마치고 일어섰는데, 오랜 수행으로 엉덩이 살이 짓물러 깔고 앉은 방석이 엉덩이에 달라붙을 정도였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단다. 대한민국 승려로는 성철 스님이 유명한데, 이분은 7년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전설로 통하는 분이야. 장좌불와는 눕지 않고 앉아서 정진하는 것을 말하는데, 저녁에 잠을 자는 시간에도 자리에 눕지 않고 앉아서 참선 정진을 이어가는 거야. 아침 점심 저녁 세 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좌선으로 정진을 이어 간 것이 7년간이라니 성철스님의 수행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지.

    ‘공부하는 불교’ 대신 ‘명상하는 불교’가 신라 말에 유행하면서 지방 곳곳에서 속속 선종 사찰들이 들어섰단다. 그중 수미산파, 가지산파, 실상산파, 동리산파, 봉림산파, 사자산파, 사굴산파 등 9곳의 산문(山門)이 유명했는데, 이를 ‘9산 선문(九山禪門)’, 더 줄여서 ‘9산’이라고 부른단다. 지방에서 새롭게 성장하던 호족들이 선종을 적극 후원했다는 사실도 교과서에서는 중요하게 다루는 사실이니 같이 알아두거라. 당시 기존 불교계의 주류였던 교종은 화엄종, 법상종 등 5개 종파라 이를 간단히 ‘5교’라고 불렀으므로, 신라말 교종과 선종의 종파 현황을 전체적으로 말할 때는 흔히 ‘5교 9산’이라고 표현한단다.

    [사진] 왼쪽은 조선 중기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로 처음 선불교를 중국에 전한 달마대사의 모습을 거침없는 붓길로 호쾌하게 표현했다. 오른쪽은 신라말 ‘5교 9산’(5개의 교종 종파와 9개의 선종 산문)을 표시한 지도이다.

    고려시대 교종과 선종의 대립

    신라 말 이래 교종과 선종이 대립하게 된 상황을 이야기했는데, 문제는 이 둘이 사상체계가 무척이나 달라서 서로서로 비난하고 이단시했다는 사실이야.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교종은 석가모니의 가르침(敎)이 담겨있는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면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리는 배울 수 있는 것이고, 이때 경전 학습을 통해 획득되는 진리는 ‘부처의 지혜’이다. 그런데 경전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한 번에 이것을 다 공부할 수가 없다. 그래서 교종은 지식의 점진적인 축적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점수(漸修)’라고 한단다. 쉽게 말하면 스텝 바이 스텝으로 진도를 나간다는 개념이야. 한 번에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지.

    이에 비해 선종은 진리는 말과 글로 표현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다고 본다. 경전은 진리를 표현한 불완전한 수단에 불과할 뿐 진리 그 자체일 수 없다. 진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들어 있다. 그러므로 눈을 지긋이 감고 자신의 마음을 직관함으로써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 깊은 명상을 통해 획득되는 진리는 너무도 평화스럽고 자비로운 부처님의 마음 상태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불교수행법인 ‘선정(禪定)’이 필요하다. 선정(禪定)은 선(禪)과 같은 개념인데, 선의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정신집중을 뜻하는 ‘정’을 덧붙인 것이라고 해.

    선정은 생각을 쉬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활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불만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일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잡다한 생각을 쉬지 못하고 어리석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망념과 사념(邪念)과 허영심과 분별심을 버리면 이 세상이 곧 극락이고 이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는데,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쉬는 수행법인 선정을 닦을 것이 요구된다. 선정은 쉽게 말하면 부처님의 마음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일종의 명상 방법론 같은 것이다. 교종이 경전 공부를 통해 부처의 지혜를 배우고자 했다면, 선종은 깊은 명상인 선정을 통해 내 마음속의 부처의 마음을 스스로 깨닫고자 했다는 거야. 그런데 선종의 경우에는 앉아서 생각하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에 별도의 텍스트가 없었어. 그래서 교종에서 강조하듯 꾸준히 진도를 나간다는 점수의 개념이 나올 수가 없었어. 그래서 맹렬히 참선 수행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한방에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마치 벼락을 맞듯 어느 순간 갑자기 확 깨달아 버리는 것, 이를 ‘돈오’라고 하는데, ‘별안간’ 돈(頓), ‘깨달을’ 오(悟)자야.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교종과 선종의 차이점을 표로 요약해보자.

    이렇게 서로 생각이 다르다 보니 교종과 선종은 상대방의 방법론을 무시하면서 비난했단다. 먼저 교종 승려들은 ‘Only studying’을 외치며 경전 공부에 몰두하면서, 경전을 무시하는 선종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들은 면벽 수행하는 승려들에 대해 그 수행을 존중하기보다는 공부하기 싫어서 그저 앉아서 조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렸겠지. 반면 선종 승려들은 ‘Only Meditating’을 외치며 모두 벽을 마주보고 앉아서 선 수행에 몰두했어. 그들은 경전 공부하는 교종 승려들에 대해 헛되이 시간 낭비를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겠지. 진리는 결코 경전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 이렇게 그들은 ‘Only studying’, ‘Only Meditating’을 외치며 서로 비난하고 싸웠다. 중간 선택지도 없었고, 그 둘을 같이 하겠다는 생각도 쉽게 할 수 없었어.

    자, 그럼 이해하기 쉽게 퀴즈를 하나 내볼게. 다음 이야기에서 ‘내’가 만난 스님은 교종 승려인지 선종 승려인지 맞춰 봐.

    몹시도 추운 어느 겨울날 나는 우연히 깊은 산사를 방문하게 되었어. 그런데 그 절에서 어떤 스님이 불교 경전을 북북 찢어 태우면서 그 옆에 앉아 불을 쬐고 있는 거라. 이 이상한 상황을 보고 내가 그 스님에게 물었어.

    “스님, 왜 그 경전을 태우십니까?”

    그랬더니 그 스님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거야.

    “아이구 날이 너무 추워서, 이러다가 부처 얼어죽을 것 같아 경전을 태우고 있소이다.”

    대답할 수 있겠니?

    그래. 선종 승려야. 이 스님은 경전을 덜 중시하고 있잖아. 그에게 진리는 경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날이 너무 추우면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부처가 얼어죽을 수 있으니 경전 정도는 불 피울 수 있는 거로 생각한 거지. 그런데 이 장면을 교종 승려가 보았다면, 어땠을까? 이단도 이런 이단이 없는 거지. 기독교로 대입하면 춥다고 성경을 불태우며 손을 쬐는 사람이잖아.

    의천과 지눌,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모색하다

    이런 교종과 선종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고려시대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위해 나타난 두 명의 슈퍼스타가 있었는데, 한 명은 고려 중기 대각국사 의천이고, 또 한 명은 고려 후기 무신집권기 보조국사 지눌이야. 그들의 문제의식은 교종의 ‘Studying’과 선종의 ‘Meditating’을 같이 수행할 순 없을까 하는 것이었어.

    먼저 의천 이야기부터 해보자. 의천은 출신 성분부터가 심상치 않아. 그는 고려 최고의 금수저였어. 왜냐하면 아버지가 왕이었거든.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의천은 송나라 유학을 다녀온 후, 교종은 교종대로, 선종은 선종대로 각각 하나의 종파로 통합을 시도했단다. 교종은 기존의 화엄종 중심으로 통합하고, 선종은 천태종이라는 종파를 새로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고자 했어. 이때 천태종의 교리로 내세운 것이 ‘교관겸수(敎觀兼修)’였는데, ‘교(敎)’, 즉 경전에 대한 공부와 ‘관(觀)’, 즉 마음을 직관하는 선(禪)을 겸해서 같이 수행하자는 논리야.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이해가 쉬운데, “Let’s practice Studying and Meditating together” 이런 거지. 선종 통합을 목적으로 창시한 종파이기 때문에 선종의 수행방법도 필히 포용했어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수행방법 중 교종의 수행방법 ‘Studying’을 먼저 내세운 것은 의천이 교종 승려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천 당시 이 교종과 선종의 통합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의천 사후 다시 흐지부지되고 말았어.

    [사진] 왼쪽은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의 초상화이다. 오른쪽은 황해도 개풍군 영통사터에 있는 대각국사 의천의 탑비로, 의천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김부식이 지었다.

    의천의 바통을 이어받아 교종과 선종의 통합에 나선 이는 보조국사 지눌이었어. 지눌이 활동할 당시는 무신집권기였다. 일단 무신정변 이후 고려 불교계는 큰 변화가 일어났단다. 무신들 취향은 교종일까 선종일까? 글쟁이 귀족들은 교종 취향이었음은 쉽게 추측이 될 거야. 그에 비해 무신들 취향은 선종이었어. 글 공부 자체를 싫어했을 무신들이 교종을 좋아할 이유가 없고, 게다가 한방에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선종 논리도 무신들의 취향에 어울렸을 거야. 이런 이유로 선종이 무신들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한국 불교는 무신정변을 분기점으로 해서 기존 교종 우세에서 이후 선종 우세로 완전히 판도가 바뀌게 된단다. 이렇게 선종이 우세한 상황에서 지눌은 크게 두 가지 의미 있는 활동을 하게 된다.

    첫 번째는 신앙결사운동으로 이는 무신집권기 당시 불교계의 세속화, 타락과 관련되어 있어. 당시 불교 승려들 다수가 수행은 뒷전이고 오로지 부와 권력을 탐했어. 자고로 절이나 교회가 부유하고 배가 부르면 수행에 전념하기가 힘든 법이지. 지눌은 당시 불교계를 비판하면서 승려들에게 세속적 이익을 멀리하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자고 호소했어. 그리고 먼저 승려 본연의 모습으로 맹렬히 수행하는 본보기를 보이고자 정혜결사(이후 수선결사로 이름이 바뀜)라는 신앙결사를 만들었다.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수선결사(修禪結社)는 줄여서 정혜사(定慧社), 수선사(修禪社)라고 하는데, 이때 ‘사’가 절을 뜻하는 ‘사(寺)’가 아니라 신앙 써클을 의미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돼. 지눌이 정혜결사를 만들면서 썼던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읽어보면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과 함께 오로지 수행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는 지눌의 비장한 마음을 다 읽을 수 있을 거야.

    지금의 불교계를 보면,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일들이 비록 부처의 법에 의지하였다고 하나, 자신을 내세우고 이익을 구하는 데 열중하며, 세속의 일에 골몰한다. 도덕을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하루는 같이 공부하는 사람 10여 인과 약속하였다.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같은 모임을 맺자. 항상 선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는 데 힘쓰고,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힘들여 일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경영한다. 인연에 따라 성품을 수양하고 평생을 호방하게 고귀한 이들의 드높은 행동을 좇아 따른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이 결사를 통해 지눌은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는 모범을 보여주었고, 이로 인해 때 묻은 고려 불교계가 다소 정화되는 계기가 되었어. 그래서 역사에서는 지눌의 이 활동을 신앙결사운동 혹은 불교 정화운동, 불교 혁신운동이라고 부른단다.

    그런데 이 신앙결사운동 당시 지눌은 선종의 수행방법을 중심으로 교종의 수행방법을 융합한 새로운 수행방법도 제시했어. 선정(禪定)을 통해 부처의 마음도 깨닫고, 경학 공부를 통해 부처의 지혜(智慧)도 배우자는 거지. 선정과 지혜를 쌍으로 같이 수행하자는 것, 이를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표현했어. 이것도 이해하기 쉽게 영어로 표현해볼까?

    “Let’s practice Meditating and Studying together”

    아까 의천의 ‘교관겸수’와 달리 선종의 수행방법을 앞에 내세운 것은 지눌이 선종 승려였기 때문이야. 당시 지눌이 내세운 또 하나의 교리가 ‘돈오점수’인데, 이는 돈오한 다음에도 점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야.

    지눌이 말하는 돈오점수는 ‘돈오’를 통해 참된 자신의 본성을 보긴 하였지만, 오랫동안의 습기(나쁜 습관)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 했기 때문에, 그 뒤에도 지속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거야. 즉 첫 번째 깨달음이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 미숙한 깨달음이었다면, 그 후에 오는 점진적 수행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는 설명이야.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원래 선종에서는 원래 ‘돈오’만 이야기하거든. 한방에 확 깨치면 그걸로 끝이잖아. 점수의 논리는 교종에서 경전 공부를 통한 지식의 축적을 강조할 때 쓰는 수행 방법론이었어. 지눌은 자신의 선교 통합 추진 과정에서 선종 논리만이 아니라 교종의 논리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인 거야.

    참! 그가 만든 신앙결사 이름이 처음에 뭐였는지 기억나니?

    그래! 정혜결사야. ‘정’과 ‘혜’를 같이 수행하는 결사란 뜻이지. 그러니까 지눌은 신앙결사운동 따로, 선종과 교종 통합운동 따로 이렇게 진행한 것이 아니라 이 둘을 동시에 추진한 것임을 알 수있어. 위의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에 나오는 “항상 선(禪)을 익히고 지혜(知慧)를 고르는 데 힘쓰고”라는 문장에서도 바로 확인할 수 있지. 이 말 속에 선정과 지혜를 같이 닦자는 정혜쌍수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거야.

    어쨌든 지눌의 이러한 노력은 이후 조계종이란 새로운 종파의 창시로 이어지게 되고,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는 조계종의 중심 교리로 자리잡게 된단다.

    [사진] 왼쪽은 조계종을 창시한 보조국사 지눌의 초상화, 오른쪽은 지눌이 정혜결사를 제창한 송광사(전남 순천)의 모습이다.

    지눌의 제자였던 진각국사 혜심도 흥미로운 인물이야. 그는 유불 일치설을 내세운 것으로 유명한데, 궁극적으로 교종과 선종이 다르지 않다는 스승의 논리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도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했던 거야. 그 스승에 그 제자였던 거지.

    지눌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하나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 조계종을 창시한 지눌의 돈오점수 이론은 지눌(1158~1210) 사후 100년이 더 지난 후 승려 보우(普愚;1301~1382)가 ‘돈오돈수’를 주장하면서 논쟁의 대상이 된단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찰나에 깨달아 부처가 되면, 더는 수행할 것이 없다는 이론이다. ‘돈오점수’ 이론처럼 돈오를 이룬 후 더 수행할 것이 있다면, 그러한 찰나의 깨달음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며, 따라서 부처가 아직 아니라고 보는 거야. 즉 부처는 더 수행할 것이 없어야 부처라는 논리지. 이 논쟁은 이후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지눌 사후 700년이 더 지난 대한민국 불교계에서 다시 점화가 된단다. 논쟁을 다시 일으킨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앞에서 ‘7년 장좌불와’의 전설을 남긴 인물이야. 기억나니? 그래 성철스님(1912∼1993)이야. 그는 1981년 자신의 저서 『선문정로(禪門正路)』를 통해 한국 선불교의 정통 이론이었던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하고 돈오돈수를 주장하여 불교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어. 이 책에서 그는 중국 남종선의 조사(祖師) 혜능의 사상은 돈오돈수이며 지금까지 한국 선종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는 혜능의 종지(宗旨)를 제대로 잇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어.

    그리고 덧붙여

    K야.

    어려워했던 교과서 속 불교 용어들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원효, 의상, 의천, 지눌 네 인물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불교 역사를 거칠게나마 살펴보았다. 국사 교과서에 실린 교관겸수, 정혜쌍수, 돈오점수 이런 용어들은 그냥은 무척 어렵지만, 이런 배경 지식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하나하나 의미를 새기면서 공부하면 보다 쉽게 정리할 수 있을거야. 이제 네가 가져왔던 교과서 내용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보렴. 그러면 이전에 보이지 않던 내용들이 보일 거야.

    의천은 흥왕사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으며, 또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청사를 창건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이를 뒷받침할 사상적 바탕으로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 체계인 정혜쌍수를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철저한 수행를 선도하였다. 또, 지눌은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하는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K야.

    나는 너에게 원효, 의천, 지눌 등 큰 업적을 남긴 스님들을 설명하면서 가슴이 답답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기 때문이다. 원효, 의천, 지눌은 모두 대립되는 주장과 종파, 사상들을 융합시키고 통합하고 절충하려고 시도했다. 대립과 충돌, 갈등 없이 존재하는 사회는 없어. 문제는 이런 것들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융합하고 조화시키고 갈등을 해결하려고 시도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이지. 이것은 비단 종교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도 마찬가지야. 정치는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 지역과 지역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최고의 예술이 되어야 한단다. 권력을 잡고 대한민국 정부 운영을 떠맡은 이들이 있다면, 그 결과의 성패 여부를 떠나 이런 통합과 조화, 절충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이다. 그 역할을 포기하고 스스로가 한쪽 끝에 서서 갈등을 만들어내고 조장하고 증폭시키는 일을 즐기는 정부가 있다면 그 정부는 존재 이유를 상실한 정부이고, 국민들은 그 정부에 저항하고, 그리고 교체해야만 한다. 오로지 협소한 한쪽 이해관계만을 대변하고, 반대하는 이들을 수사와 파괴, 말살의 대상으로만 보고 협치를 모색하지 않는 현 정부를 보면서 느끼는 답답함, 이것이 원효, 의천, 지눌을 보면서 문득 떠올렸던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지눌이 창시한 조계종에 대한 거야. 이 조계종은 현재 대한민국 불교계 최대 종파란다. 조계종의 중심 교리가 정혜쌍수, 돈오점수라고 했지. 이런 이론이 선종과 교종의 수행방법을 통합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조계종 계통의 절에 가면 승려들이 선 수행도 하고, 경전 공부도 같이 겸해서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 거란다. 한국 불교에서 이런 모습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노력으로 새롭게 만든 전통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단다. 역사 속에서 전통이란 그저 주어진 그대로 똑같이 반복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지난한 도전과 투쟁으로 계속 새롭게 재창조해가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민족 전통문화라고 자랑하는 태권도와 사물놀이 등이 사실은 최근 100년 이내에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거야.

    앞에서 다룬 지눌의 돈오점수 이론이란 것도 그래. 조계종을 창시한 인물의 주장이라 해서 그대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 보우, 성철 등에 의해 돈오돈수 이론에 의해 거센 도전을 받게 되고, 이런 논쟁들을 배경으로 먼 훗날 또 새로운 이론과 사상이 만들어지는 지적 거름이 되기도 하지. 성철은 지눌 사후 대략 700년 후의 인물이고, 입적한 것도 고작 30년 전의 일이야. 역사는 이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인물, 문화, 사상, 기술, 도구 등을 만들고 소멸시켜 나간단다.

    K야. 그래서 역사는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마음 다짐이란다. 그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너는 이미 올라타 있다. 그 흐름에 그저 수동적으로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읽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너만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길 소망한다. 관객이 아니라 플레이어로 말이다.

    지눌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이런 말로 시작한단다.

    삼가 듣건대,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땅을 떠나서 일어나기를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한 마음(一心)을 미혹하여 끝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이는 중생이며, 한 마음을 깨달아 끝없이 미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분은 모든 부처님이다.

    (恭聞, ‘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離地求起, 無有是處也.’ 迷一心, 而起無邊煩惱者, 衆生也, 悟一心, 而起無邊妙用者, 諸佛也.)

    지눌의 말처럼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공허하다. 일단 넘어지면 왜 넘어졌는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자신의 힘으로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스스로 그 땅을 짚고 일어난 사람만이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이자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또한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만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또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네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네가 서 있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끊임없이 자기쇄신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네가 자신의 온전한 주인이 되어 언제나 가슴 뛰는 삶을 살아가길 빌며 이만 총총.

    *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