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방침 결정을 위한
    민주노총 대대를 앞두고
    [기고] 방침 수정과 깊은 고민 필요
        2023년 04월 15일 08: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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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에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었다. 97년이면 국민승리21이 만들어지고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그 해이다. 그 전에도 노동자정치운동, 진보정당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면 97년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여러 진보정당의 출발이 되는 해였고 노동자정치운동의 원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이 한편으로는 시민사회단체, 진보정치세력들과 논의를 거치고 한편으로 조직 내부의 이견을 조정하면서 정치방침을 결정하고 국민승리 21을 만들고 권영길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출마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논쟁을, 가슴 졸이는 파국의 순간을 겪어야 했던지….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던 민주노총의 각급 회의는 또 얼마나 많았으며 산별연맹단위로, 지역본부별로 조합원들과 간부들과 얼마나 많은 간담회와 토론회를 가졌는지….

    참으로 오랜 기간 끝없는 토론과 조정을 거쳐야 했다. 함께 할 단위들과의 깊은 토론 없는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정치방침이라는 것이 표 대결을 통해 과반수를 넘어 결정한들 그 집행력을 담보할 수 없는 데 표결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치방침이야말로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필요한 결정이 아니겠는가? 대중조직이 정치방침으로 인하여 갈등과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운동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결정 후에도 함께 할 수 있는 내용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정치위원장으로서 긴 긴 시간 전 지역본부, 전 산별의 간담회를 다니며 의견을 조율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의 공약수를 찾아야 했다. 끝없는 질책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랬기에 민주노총은 3월 임시대의원 대회, 5월 7일 민주노총 토론회, 5월 29일 7차 중앙위, 6월 19일 8차 중앙위, 7월 임시대의원 대회, 9월 임시대의원 대회를 거치며 단 한 번의 표결 없이 정치방침을 결정하고 길고 긴 노동자정치운동의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오늘 그 시간을 돌아보며 며칠 남지 않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대한 생각을 적어 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민주노총 집행부가 내년 총선에 공동으로 대응하면서 이후 새로운 노동자정치운동의 길을 열고 장기적으로 진보정치의 연대와 재편을 위해 민주노총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 또 이를 위해 민주노총이 정치방침을 결정하기 위해 대의원대회를 여는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민주노총 집행부가 이를 추진하는 방식이나 그 정치방침의 내용을 보면 내 바람대로 될 것인지 심히 우려스럽다. 심지어 나는 정말 민주노총 집행부가 노동자정치운동의 새로운 길을 열겠다는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나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2022년 12월 노동자대회(사진=노동과세계)와 양경규 위원장

    1.
    민주노총이 겸손하지 못하다. 민주노총은 노동자정치운동의 실종과 진보정치의 후퇴라는 오늘의 상황에 대한 책임이 크다. 그 책임을 인식한다면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뿐만 아니라 진보정당과 다양한 진보정치세력에 대한 규정력을 갖는 정치방침을 결정하려면 다른 단위들과 오랜 시간 깊은 토론과 조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민주노총이 방침을 결정하고 ‘이렇게 할 테니 하고 싶은 단위는 같이 하자’라고 하는 것은 자기 책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고 스스로의 역할을 과도하게 평가한 것이다. 잘 나가던 때(?)에도 민주노총이 스스로를 경계하며 함께하기 위해 몸을 낮추었건만 하물며 지금 민주노총이 결정하면 정치운동을 정리할 수 있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몸을 낮추고 모두의 연결의 끈이 되는 일부터 시작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2.
    민주노총은 먼저 현재의 조직적 상태를 돌아보아야 한다. 민주노총의 정치운동 기반이 어느 정도 상태인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동안 현장에서 노동자정치교육을 제대로 기획한 적도 없고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책임있는 진보정치 연대사업을 꾸준히 해 오지도 않았으면서, 그렇다고 96-97 노동법개정투쟁과 같은 대중적인 정치투쟁을 통한 계기가 주어진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정치방침을,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의견 조율이 필요하고 결정되면 높은 수준의 실천이 담보되어야 할,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는 진보연합당이라는 방침을 내놓은 것은 무리한 일이다.

    3.
    더구나 중집위에서 조차 통일된 안을 만들지 못하고 집행부가 결정한 방침(안)을 대의원대회에 상정하고 표결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은 더 우려스러운 일이다. 팽팽하게 대립하는 정치방침을 표결로 결정한다니 대중조직의 지도부로서 참으로 최소한의 책임의식이라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대립양상으로 미루어 표대결은 향후 최소한의 진보정당의 연대, 이는 단순히 중앙차원의 연대 뿐만 아니라 지역차원의 연대에도 부정적 후과를 낳을 것이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것이고 이는 올해 민주노총이 준비하고 있는 총파업 투쟁은 물론 민주노조운동 전반에 매우 중대한 어려움을 가져 올 것이다.

    4.
    무엇보다도 이 안에 대해 진보정당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음에도 공공연히 동의하는 정당하고만이라도 이후 추진할 것임을 주장하는 데 이르면 우려를 넘어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진정성 자체를 의심하도록 만든다. 민주노총 정치방침이 결국은 특정한 정당(진보당)의 확대와 강화로 귀결될텐데 이는 민주노총 집행부가 내세우는 전제에 반하는 일 아닌가? 민주노총 집행부는 민주노총 결정사항이라는 근거를 가지고 이후 진보당의 확대 강화사업에 나서겠다는 것인가?

    이런 이유로 나는 집행부의 추진 방식과 그 안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해 반대한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안을 철회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정치방침을 만들어 대의원대회에 상정해야 한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여기저기서 나오는 우려의 목소리를 무겁게 들어야 한다.

    나는 여기에 더해 민주노총에 보다 큰 책임을 갖고 있는 분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집행부에게 쓴 소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민주노총 정치방침에 대해 긍정적인 힘을 실어주고 있는 전직 위원장 두 분의 행보가 많이 아쉽다. 97년 노동자정치세력화 사업의 시종을 지켜 보았기에 그래서 누구보다 최근의 노동자정치운동의 실종, 진보정당의 분화가 안타까울 권영길 위원장이나 퇴임 후 노동자정치운동을 위해 노력해 온 한상균 위원장의 그 마음과 의지, 이해는 하지만 그것이 대중운동과 정치운동에 순기능이 될 것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집행부의 방침이 갖는 문제를 강하게 이야기하고 조직 내 더 많은 소통을 요구하면서 조직 전체가 동의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라고 따금하게 질책하고 조언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집행부에 요구해야 할 때이다.

    민주노총의 지역본부와 산별의 주요간부와 활동가들도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집행부의 방침 수정을 주문해야 한다. 단지 반대하는 것, 부결시키는 것을 넘어 집행부와 조율하고 소통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정치방침을 도출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집행부가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니 반대를 조직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며 대화를 포기하지 말았으면 한다.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통일된 정치방침을, 그 방침의 수준을 낮추더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정치방침을 만들어 다시 한 번 민주노총이 노동자정치운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가장 낮은 수준이라도 함께 출발하는 것이 중요한 때이다.

    부결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정치운동이라는 과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 부결은 민주노총이 다시는 정치방침이든 총선방침이든 다룰 수 있는 여지 자체를 없애 버릴 것이고 노동자정치운동의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이때 그 가능성마저 닫아버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현장의 계급투표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년 총선에서 조직대중의 계급투표 운동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직노동의 진보정치 기반으로서의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나는 이것이 오늘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냉정한 평가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민주노총이 다시 노동자정치운동을 위한 노력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지금 어렵지만 낮은 수준이라도 그 출발을 위한 합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임을 맡고 있는 지역본부장과 산별위원장, 그리고 민주노총 내 각 의견그룹들이 이런 자기 책임을 직시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물론 집행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열린 마음으로 일방적으로 안을 밀어붙이지 말고 함께 할 수 있는 방침을 내주기를 바란다. 집행부의 이런 노력이 없다면 부결 운동은 불가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당 정의당에 당부한다. 민주노총 정치방침에 대한 당 지도부의 태도는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그 안을 받을 수 없으니 관심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 내 노동본부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우려와 대책이 논의되고 있지만 이정미 대표나 당 지도부 차원에서는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에 대한 적극적인 토론과 논의가 없다. 정의당은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이 결정하는 정치방침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해야 한다. 무관심하거나 그저 반대의 의사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같이 노동자정치, 진보정치를 만들어 갈 것인지를 민주노총에 주문하고 방침의 변경을 요청하고 대안을 이야기해야 한다. 조직노동에 대해 정의당이 어떤 전략을 가질 것인지를 정말로 깊이 고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소개
    전 민주노총 정치위원장. 전 공공연맹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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