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중의 간신 유자광,
    그의 일생과 프리즘으로 역사를 보다
    [책]『유자광, 조선의 영원한 이방인』(정두희,계승범)
        2023년 04월 15일 07: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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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적 인물을 통해 보는 조선 초 전환기

    유자광은 임사홍, 원균 등과 더불어 조선사에 손에 꼽히는 ‘간신’이다. 실제 1908년 순종 때 복권되기까지 400년 동안 조선의 주류인 사림에 의해 나라를 그르친 간신 중의 간신으로 꼽혔다. 그러나 고인이 된 스승과, 그 제자가 합심해 10여 년만에 그려낸 유자광의 진면목은 다르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유자광이 활동하던 15세기 후반~16세기 초는 조선에서 서얼차별이 본격화되고, ‘유교화 정풍운동’이 권력무대에 등장하던 시대적 전환기였다. 첩의 소생에서 정1품 당상관으로, 결국은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은 유자광의 행적을 출세를 위한 미천한 출신의 안간힘으로만 보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놓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조선의 기득권이 만들어낸 ‘가짜 뉴스’를 헤치고 꼼꼼한 사료 조사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기법을 가미해 보여주는 문제적 인물 유자광의 일생은 읽는 재미가 각별하다.

    평생을 따라붙은 낙인, 얼자孽子 출신

    유자광은 전 부윤 유규의 얼자다. 천민 출신 첩이 낳은 아들이란 의미다. 그러기에 만만찮은 문장 실력을 갖추고 말 타기․활쏘기에도 능했음에도 서얼 차별이 막 본격화되던 당대에는 중앙정계에서 입신하기 어려웠다. 이시애 난 때 공을 세워 세조 때 병조정랑, 성종 때 한성판윤에 등 요직에 임명될 때마다 양반 출신의 적자 혹은 과거 급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간 등의 반론에 부딪치거나 심지어 탄핵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세조의 특은으로 온양 별시문과에 장원을 했어도 얼자라는 ‘주홍글자’를 벗어날 수 없었다. 중종반정 때 핵심인물인 3대장의 뒤를 이어 당당히 1등 공신에 올랐지만 실권을 휘두르는 요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오히려 반정 후 과거사 정리 등과 관련해 “유자광에서 잘못되었다”는 만악의 근본으로 지목되거나 “성품이 음흉하고 교활” “사특한 소인배” 등 주관적 인물평에 시달려야 했다.

    임금만 바라보며 당대의 기득권과 맞서다

    유자광은 승부사였다. 배경이 없었기에 오로지 임금의 총애에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젊은 인재들로 원로 공신 세력을 견제하려던 세조, 권력기반이 취약했던 예종, 친정체제 확립을 서둘렀던 성종 등에게 유자광은 총애를 받았다. 그러기에 예종 때 개국공신의 고손자이자 태종의 외손이며 이시애 난 평정에 큰 공을 세운 남이를 고발하는 승부수를 던진다. 유자광은 이로써 익대공신에 올라 중신들과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른다. 성종 때는 수렴청정을 거두려는 대왕대비를 만류한 당대의 권신 한명회를 역모죄로 고발하는 승부수를 던지기도 했다. 이어 친정 초기 자연재해가 심해 고심하던 성종을 위해 공경대부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지 임금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상소로 총애를 확보한다. 그 덕에 숭정대부 무령군으로 지위가 올라갔지만 조정의 모든 관료를 적으로 삼긴 했지만 정치 상황을 읽는 유자광의 안목은 뛰어난 바가 있다.

    정사에선 잊힌 뜻밖의 경륜과 능력

    유자광은 권력의 풍향에 민감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었다. 성종 때는 특진관으로 경연에 참영하기도 했으며 사신으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는 등 실무능력을 갖췄다. 당초 중앙정계에 데뷔한 계기가 이시애 난을 평정하기 위한 헌책을 세조에게 올린 것이었다. 여기에 사행을 다녀오며 본 압록강 변 국경 요충지 의주의 성벽을 더욱 견고하게 쌓고 군비를 강화하며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연산군 때 등청하는 관원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관원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던 사옹원의 제조를 맡아서는 당상관과 당하관을 차등해 주던 밥의 양을 균일하게 하는 ‘개혁’을 주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성종 때 동래로 유배 가 있는 중에도 현감 비리 고발, 과중한 공물 개선, 조선 수군 군비 강화 등을 담은 시정책을 올리기도 했다.

    유자광이 도덕적으로 허물이 없고 정치적으로 과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이었고,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하고 심문관을 맡아 파장을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을 지배한 성리학의 기준이란 ‘비늘’을 씻어내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개인’이란 프리즘을 통해 역사를 살피는 의미일 터이고 그것이 이 책의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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