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레의 새 헌법 제정
    실패와 이유를 돌아보며
    [L/A 칼럼] 대중과 엘리트의 괴리
        2023년 04월 04일 10: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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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9월 4일에 칠레에서는 좌파적 변혁의 내용을 담은 새로운 헌법안을 두고 국민투표에 부쳤지만 63%가 반대로 부결되어 변혁이 실패했다. 사실 현행 헌법을 고치려는 개정이지만 체제 변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에 헌법 제정이었다. 그리하여 제헌의회가 만들어졌었다.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도 제헌의회가 만들어졌었다. 부결된 뒤에 좌파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짧은 글이지만 실패의 이유와 맥락에 대해 필자가 알고 있는 정보를 취합해보려고 한다.

    놀라운 얘기이지만 현행 칠레 헌법은 피노체트 군사독재 시절인 1980년에 만든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명분은 뚜렷했다. 하지만 1973년에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피노체트는 1989년에야 찌그러든다. 밀턴 프리드만 등 시카고 보이스가 지원했다는 피노체트 체제에 암묵적으로 기성세대는 지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피노체트가 독재를 했지만 경제는 상당히 성장했다는 둥, 여러 가지 맥락상 칠레는 쉽게 얘기해서 “남미의 한국”이라 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좌파(핑크타이드로 불리는)의 흐름과 상당히 다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일부 지식인들도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웃나라인 아르헨티나와 많이 다르다. 아르헨티나는 사회적 공공성이 높은 나라다. 물론 아르헨티나는 페론 등에 의해 포퓰리즘으로 흘렀지만 칠레는 민주주의의 제도를 지켰다고 하겠지만.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는 주장의 근거는 수출드라이브 경제정책(우리의 경우 자동차 등 공업제품이라면 그들은 사과와 포도주 등의 차이는 있지만)과 교육정책(교육의 다양성, 학부모의 자유로운 선택권, 교육 바우처 등) 때문이다. 물밑에 숨어있는 우파의 힘이 상당하다는 것을 보더라도 우리 사회와 비슷하다. 당연한 것이 오랫동안 우파와 자유주의 세력에 의한 신자유주의 개혁(?)이 진행되었고, 그로 인한 기득권층이 형성되었을 터이다.

    칠레는 1990년부터 우파가 아닌 자유주의 세력이 오랫동안 헤게모니를 가졌지만 이들 자유주의와 우파의 정책적 차이가 크지 않은 점도, 미디어가 주로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것도 우리와 비슷하다(구체적으로 칠레에서는 사회적 공공성의 확대 대신에 자유와 개인주의가 많이 강조된다). 특히 거시경제는 그런대로 잘나가지만 국민들 사이의 양극화(불평등)가 심하다. 물론 이런 흐름에 대한 고등학생, 대학생의 집단적 시위와 저항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강하다는 점이 우리와 다르지만. 특히 2019년 10월의 체제 변혁을 요구하는 거리 시위는 아주 거대했다(우리나라 매체에서도 시위 사진 등이 크게 실렸었다). 이 항의를 계기로 제헌의회도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좌파의 당혹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대중과 엘리트 지식인 사이의 괴리가 컸다고 또는 지적 담론과 현실의 괴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원주민 구성 비율이 낮은 칠레에서 마푸체 원주민의 권리 강화를 위한 제헌의회의 새로운 헌법안에 대해 칠레의 중산층이 냉소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제헌의회의 구성 자체가 내부적으로는 매우 동질적이고 따라서 이들 엘리트들은 이웃나라도 했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제헌의회는 국민투표 약 1년 전부터 작동하고 있었다. 칠레 좌파 엘리트들의 가면이(매우 자유주의적인) 벗겨졌다고 하면 너무 가혹한 비판일까?

    가브리엘 보리치 좌파 정부에 치명상을 준 것은 분명하다. 특히 중요하게 볼 것은 작년 국민투표가 있을 시점에 고율의 인플레와 함께 칠레의 대표적인 수출상품인 구리 가격의 하락 등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경제적 곤경은 경우에 따라 좌파에게 유리할 수도 있다고 본다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작년 3월에 출범한 보리치 정부의 잘못으로 경제가 어려웠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보리치 정부와 좌파가 너무 성급했던 것은 아닐까? 적어도 칠레 국민이 제헌의회의 새로운 헌법안에 불만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결과가 나온 뒤에 보리치는 아쉽지만 대화를 계속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현 정부의 기가 꺾인 것은 분명하므로 정치일정을 박력 있게 이끌어갈 수 있을까?

    칠레의 좌파 역사학자로 권위 있는 세르히오 그레스는 “미디어와 교육을 통해 칠레 국민에게 심어졌던 ‘칠레의 모범적 민주주의‘는 신화였다. 따라서 현재 아주 큰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선진국이라고 자부(착각?)해왔기 때문이다. 선진국(?) 클럽인 OECD의 회원국이다.

    더군다나 현대 칠레의 평화적 정권교체, 공화국 이념, 정당민주주의의 발전 등 제도적 안정성은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었지만 ’허구‘일지 모른다는 비판이다. 조심스런 지적이지만 제도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공허할지 모른다. 왜냐면 제도적 발전과 실제 사회경제적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현대 주류 사회과학의 실패일지도 모른다. 특히 칠레 엘리트의 능력주의에 기초한 효율성, 질서의식 등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아주 유명하다. 가장 뼈 때리는 비판은 칠레에 오랫동안 민주주의가 부재했다는 비판이다. 그레스에 의하면 칠레의 19세기는 내전 상태에 이를 정도로 정치세력 간에 갈등이 심했기 때문에 20세기에는 정치적 통합과 대화, 타협을 위한 제도 발전에 주력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번 변혁의 실패는 소위 민주화와 경제 성장이 같이 했다는 공식담론 또는 대외 이미지의 자부심(이런 담론 형성에 우파만이 아니라 콘세르타시온으로 불리는 자유주의 세력도 합류했다)에 큰 균열이 생긴 것 같다. 남의 일 같지 않아 걱정이 많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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