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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이규식/ 후마니타스)
        2023년 04월 01일 09: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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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증 뇌병변 장애인의 기록이 책으로 나오기까지

    “기획재정부 장관 집에서 현행범으로 잡힐 뻔했는데 장콜(장애인 콜택시)이 안 와서 안 잡아갔다.”
    – 이규식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gyusig2), 2022년 7월 14일

    “학교는 의무교육인데 왜 그때는 장애가 있는 아이를 둔 부모에게 벌금이나 죄를 묻지 않았을까? 내가 장애가 있어서였을까. 그러고 몇 년이 지나서 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또 아침마다 나가길래 어딜 가나 했는데 ‘직장’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 직장이라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 … 내 나이 열아홉 살에 처음 시설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모님이 시설에 데려다 주셨는데 그날이 주일이라 목사님 설교를 듣던 중에 어머니, 아버지가 집에 가신 걸 알게 되었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른 사람들은 우는 내 모습을 보고 목사님 설교 말씀에 감동받아서 우나 싶었다고 했다. … 똑같은 생활이 싫었다. 시설에서 나오기 전에 어머니한테 다시 데리러 와달라고 전화했다. 그래서 다시 집에 왔는데 그때 우리 집에 계단이 많았다. 반층 정도 올라가야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아버지랑 어머니랑 동생이 1층에서 맨날 업고 3층 집 앞까지 왔다 갔다 해줬다. 그렇게 집 밖에 나가서 동네 한 바퀴 빙빙 돌다가 불빛이 보여 가보니 정립회관이었다. 안에 나 같은 장애인이 많아서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 들어가 보니 3층에 박(경석) 선생님이 있었다. 그때 박 선생님이 들어오라고 해서 가보니 (노들)야학이 뭔지 설명해 주었다. 그때부터 야학이 뭔지도 모르고 다니게 되었다. … 내가 혜화역에서 리프트 타다가 떨어지고. 그때부터 이동권연대가 시작되었다. … 처음에 서울역 철로에 들어갔고 시청 철로에 들어가서 잡혀서 조사받았고 조사받을 땐 48시간 동안 못 나왔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조사를 받았다. … 수도 없이 도로를 막고 그 덕분에 장콜도 생기고 그 덕분에 저상버스도 생겼다.”

    – 이규식의 페이스북, 2022년 7월 10일

    호소이자 외침이었다. 오랫동안 그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끝내 비집고 나온 말이었다. 그의 싸움이 ‘죄’라면서도 정작 그를 옮길 마땅한 이동 수단도 수감할 시설조차 마련해 두지 않은 사회의 뒤처진 풍경을 고스란히 비추는 문장이었고, 무엇보다 한번 보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글이었다. “22년 넘게 장애인 이동권을 요구하는 동안 내가 죄를 지었다면 대한민국이 죄를 짓게끔 만든 거 아니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이 말을 꺼내기까지 그는 어떤 싸움을 했고, 어떤 시간을 살았을까. 그의 세상이 문득 궁금했다.

    중증 뇌병변 장애인인 그는 손을 거의 쓰지 못한다. 왼손만 간신히 움직여 전동 휠체어의 기어를 조작하고 숟가락을 들거나 한다. 혼자 자판을 두드려 가며 책을 집필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활동으로 온통 채워진 일과를 보내는 틈틈이 컴퓨터에 자서전 폴더를 만들어 자료를 모으고 원고를 끄적여 왔다. 기억이 더 달아나기 전에 지나온 삶을 기록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싸움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말 한마디를 뱉으려면 힘을 짜내야 하는 언어장애가 있는 그에게, 여러 이유로 말하기보다 듣기를 선택해 온 그에게, 말보다는 몸으로 운동해 온 그에게 생각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일은 평생 거의 없다시피 했다. 책을 쓴다는 건 그에게 낯설고 고단한 작업이었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이규식의 삶 또한 그렇듯, 이 책 역시 그 혼자 이루어 내지 않았다. 함께 기억을 더듬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이규식도, 동료 집필진도 기꺼이 서로 의지했고 서로 배웠다. 집필에서 출판으로 이어지는 과정 자체가 이규식이 앞당기고 싶었던 어떤 미래를 보여 준다.”

    – 본문 303, 304쪽

    장애를 이유로 ‘사회적 말하기’의 기회를 좀체 얻지 못한 이규식의 처지를 평소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규식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그의 10년차 활동지원사 김형진,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며 이규식과 남다른 우정을 주고받은 김소영, 오랜 지인이자 인권 활동가인 배경내가 ‘동료 집필진’으로 결합했고, 이규식에게 친형보다 각별한 제주 삼달다방의 이상엽이 기획을 도왔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조각난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예전에 살았던 시설에 가보고, 22년 운동의 역사를 되짚으려 영상과 신문 기사를 찾아보거나, 역사적 순간들을 함께한 동료들의 기억을 청해 들었다. 동료 집필진은 이규식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다가도, 때로는 되묻거나 다른 표현을 제안하면서 ‘이규식의 문장’을 찾으려 애썼다. 관련 자료를 검토해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토론하며 문장을 수선해 갔다. 간신히 나온 원고 초안을, 이제 장애 인권 운동의 역사와 맥락에 넣어 살핀 뒤 이규식에게 보완을 요청했다. 그렇게 그 스스로 표현하길 “평생 해온 말보다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뱉어 낸 말이 더 많았”던 시간을 거쳐, 읽는 사람의 무릎을 치게 하고 귀를 사로잡는 이규식만의 말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는 한 개인의 생애사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장벽과 차별의 그물망까지 드러낸 한국 장애 인권 운동사이다. 최초로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 자신의 언어를 통해 살아온 시간을 기록하고 사회를 해석한 책을 썼다는 점에서, 그동안 언어화되거나 기록되기 힘들었던 중대한 목소리의 공백이 비로소 메워지는 출발점이라고 할 만하다.

    ‘행운’을 ‘제도’로 바꾸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싸움

    “매일 새벽 5시에 하루를 시작한다. 지하철 선전전에 나가기 위해서다. 벌써 1년이 넘었다. 몸도 마음도 무척 고된 시간이었다. 남몰래 이렇게 기도한 적도 있다. 활동지원사가 아팠으면, 내가 불러도 활동지원사가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하고. 그 핑계를 대고 안 나갈 수 있으니까. 그러다가도 기어이 일어나 집을 나섰다.”

    – 본문 7쪽

    “1999년 어느 날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혜화역에서 리프트를 타다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 그 추락 사고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촉발했습니다. 혜화역 2번 출구로 나가면 ‘혜화역 장애인 휠체어 추락 사고 이후, 여기서 이동권을 외치다’라고 적힌 동판이 있습니다. 서울 지하철 역사 가운데 가장 먼저 엘리베이터가 생긴 곳이 바로 혜화역입니다.”

    – 2023년 2월 10일 280일 차 혜화역 선전전에서 박경석의 발언
    (<비마이너>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592)

    법원에서 ‘이동권’이 인정된 첫 사례였다. 아찔한 사고였지만 타박상에 그쳤다니 기적이었고, 무엇보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더없이 다행이었다. 크고 작은 행운은 그의 인생에 여러 번 찾아왔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던 시절, 7년 넘게 반복된 시설 생활이 지겨워 충동적으로 떠난 제주도에서는 생면부지의 청년이 3박 4일 동안 활동지원사처럼 동행했다. 시설에만 있지 말고 동네라도 돌라며 선뜻 전동 스쿠터를 선물한 사람도 있었다.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니다 운명처럼 만난 노들야학은 그에게 ‘싸우는 장애인’의 삶을 새롭게 열어 주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그의 첫 ‘자립 주택’ 판잣집에는 파리며 모기에 뱀만 같이 지낸 게 아니라 “서울에서 비싼 월세 내기 아깝지 않냐”는 이규식의 꾐에 기꺼이 넘어온 야학 교사 동거인들도 복닥거렸다. 이동권연대, 이음센터, 발바닥행동 등에서 어깨를 맞댄 동료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든든한 의지처이다.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고 알리는 지하철 선전전에선 음료를 쥐여 주며 응원하는 시민을 만난다. 이규식이 매일 조금씩 더 자유롭게 이동할수록 그의 세상도 우리의 세상도 커져 간다.

    “자립을 하고 노들야학을 다니면서부터는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다. 오카리나도 사서 불어 보고 동료들에게 같이 가자고 닦달해 수영도 하고 목각 작업도 해봤다. 특히 휠체어를 몸에 맞게 개조하는 일이 제일 재밌었다. 휠체어가 아무리 장애의 특성과 다양한 몸을 고려해 만들어진다고 해도 나에게 온전히 맞진 않았다. 의자의 기울기가 미묘하게 맞지 않아 조금 더 큰 바퀴로 앞바퀴를 바꾸어 달면 다행히 평형이 맞았다. 뻣뻣하게 굳어진 두 다리가 자칫 바깥으로 뻗치면 위험해서 휠체어 앞에 철판도 달았다. 직접 철공소에 가서 알루미늄 사고 용접소에 가서 용접해 달라고 말했다. 몇 번 고쳐 보기도 하고 직접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 지금은 보기에도 깔끔하게, 가벼우면서 튼튼한 소재로 개조하는 법을 알게 됐다.”

    – 본문 248, 249쪽

    “다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나아, 두우울, 셋!!!!!!’ 셋 하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하늘을 날았고 잠시 후 물속으로 퐁당 빠졌다. 다른 사람들은 다이빙하면 몇 초도 안 돼 위로 올라오던데, 내 몸은 시간이 멈춘 듯 물속에서 올라갈 생각을 안 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한 시간은 지났을 무렵, 그제야 물 밖으로 몸이 튀어 올랐다. … 아, 다이빙이 이런 느낌이구나. 그제야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혼자 막 웃었다. 이제 난 다이빙도 해본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다. 아직 한 번밖에 안 해봤지만, 자꾸 해보면 껌이겠지?”

    – 본문 268, 269쪽

    “처음으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고, 처음으로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처음으로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직접 샀을 때의 두근거림. 처음 바다를 봤을 때나 처음 캠프파이어를 했을 때 찾아온 설렘. … 더 많은 설렘을 만나고 결국 그 설렘이 일상이 되기를. 그래서 장애라는 게 특별한 삶이 되지 않는 삶을 살면 좋겠다.”

    – 본문 210쪽

    ‘설레는 일상’은 누구에게나 소중하지만 모두가 누리지는 못한다. 와이어가 끊어져 70대 노부부의 생사를 가른 2001년 오이도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 사건 이래로 지금까지 리프트 사고로만 다섯 명의 장애인이 목숨을 잃었다. 2014년에는 집에 불이 났지만 채 5미터가 안 되는 출구까지 탈출하지 못해 결국 세상을 떠난 이도 있었다. 이 책을 준비하며 기억을 되살리고자 10대 후반에 머문 의정부 시설을 찾아가서는 그 당시 함께 지낸 장애인 대부분이 이미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행운은 저마다 다르게 주어지고, 부담은 아직도 가족에게 전가된다. 이동하다 목숨을 잃을 뻔했고 노는 것조차 싸움인 ‘투모사’ 이규식의 지난 22년은 ‘행운’을 ‘제도’로 만들기 위해, 또 권리 중의 권리를 얻기 위해 몸부림한 시간이었다. 집이나 시설에 갇혀 있지 않고 세상으로 나와 배우고, 놀고, 일하며, 한데 어우러지기 위해 만날 권리, 이동할 권리.

    “어느덧 50대 중반이다.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죽으러 나갔던 10대의 이규식과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 주어진 몸으로 뭘 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데 집중하자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러자면 내 몸이 아니라 세상을 내 몸에 맞게 바꿔야 했다. … 나는 천사가 아니라 전사가 되었다.”

    – 본문 281쪽

    “천사가 아닌 전사로 살아온 내가 생을 마감할 즈음엔 세상이 많이 달라져 있으리라 믿는다. 저상버스가 지역마다 골목골목까지 누비고 장콜뿐만 아니라 일반 택시도 장애인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세상. 활동보조 시간도 필요한 만큼 주어지고 다양한 공공 일자리가 생겨나 일하는 장애인을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세상.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일하고 밥과 술도 같이 먹으며 어울려 지내는 세상. 수급비 깎일까 두려워 일을 포기하고 적은 수급비에 맞춰 꾸역꾸역 살아가느라 세상과 고립된 채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렇게 지역사회에서 어울려야 ‘장애인이니까 우습다. 병신이니까 못 한다.’는 생각도 점차 사라질 테니까.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나아진 세상이 분명 되어 있을 거다. 지금도 이미 바뀌고 있으니까.”

    – 본문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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