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인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②
    [컬렉터의 서재] 일제강점기 태형(笞刑)의 한 연구
        2023년 03월 22일 10: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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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1

    조선시대 태형

    이왕 태형이 나온 김에 조선시대 태형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그 전에 먼저 단원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서당 풍경’부터 보자. 서당 훈장이 아이에게 회초리를 친 직후의 상황을 그린 것이다. 그림 가운데 회초리를 갓 맞은 아이는 아파서인지 쭈그리고 앉아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고, 이를 지켜보는 아이들은 측은해하기보다는 키득거리고 있다. 조선후기 서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훈장의 책상 밑에는 아이를 친 회초리가 하나 놓여있는데, 아주 가느다랗게 생겼다.

    회초리는 긴 나뭇가지를 일컫는 순우리말로 어린아이를 벌 줄 때나 마소를 부릴 때 쓰는 도구를 뜻한다. 이 회초리를 한자로는 ‘鞭(편)’이라고 하는데, 채찍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학생을 가리키는 것을 ‘교편(敎鞭)을 잡는다’고 하고, 채찍질하여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로 ‘지도 편달(指導鞭撻)’이라는 말도 쓰이고 있다. 오래전부터 회초리는 권위와 힘을 상징해 왔다. 아버지를 뜻하는 한자 ‘父(부)’도 한 손에 회초리(도끼로 보기도 함)를 든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이끌어 가는 아버지를 뜻한다. 처음에는 한 손에만 회초리(혹은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글자가 변해 오면서 다른 쪽에도 한 획이 추가된 것이다.

    [사진] 조선후기 김홍도의 [서당풍경]. 훈장 왼쪽편에 가늘고 짧은 회초리가 놓여있다. 서서 엎드린 이의 볼기를 치는 용도의 태와 달리, 앉아서 다리를 걷은 학동의 종아리를 치는 용도였으므로 길이는 태보다는 짧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그림 속에 나오는 회초리는 일제 강점기 태형에 사용된 ‘태’와는 어떻게 다를까? 일단 그것보다는 짧아 보인다. 위에서 다룬 일제 강점기 태형 사진 속의 태는 1m가 조금 넘는 길이였고, 규정상으로는 54.5cm 정도로 되어있다. 태형을 집행할 때는 때리는 사람이 서서 수형자의 볼기를 아래 방향으로 쳐야 하므로 일정한 길이가 필요했을 것이다. 회초리는 그 사용 용도에 맞는 크기와 길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너무 길어서도 불편하겠지만, 너무 짧아서도 볼기를 제대로 칠 수가 없다. 그런데 서당 풍경 속 회초리는 훈장이 앉아서 학동의 종아리를 치는 용도이기 때문에 길이가 길면 제대로 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종아리 치기에 적당한 길이를 추론하면 대략 30-40cm 정도였을 것이다. 실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물 중에는 조선시대 사용된 나무 회초리가 있다. 4면에 유교 경전의 문구가 새겨져 교육용 회초리라는 것을 애써 증명하고 있는 이 회초리는 길이가 44cm이다. 다만 굵기는 약간 굵어서 낭창낭창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태형(笞刑)과 거기에 사용된 태(笞)에 대해 알아보자.

    전통사회의 태형(笞刑)은 육체에 가하는 형벌로, 가는 막대로 죄인의 등짝이나 볼기를 때리는 방식의 형벌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주로 엉덩이를, 그 이외의 지역에선 등을 때렸다.

    전통사회의 형벌은 ‘오형(五刑)’이라고 하여 ‘태장도유사(笞杖徒流死)’가 있었다. 그 중 태형은 오형 중에선 가장 약한 형벌로 작고 가는 회초리로 10~50대를 때리도록 규정한 반면, 장형은 태형보다 조금 더 무거운 죄를 범했을 때 태보다 조금 굵은 회초리로 60~100대를 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도형(徒刑)은 장형에 처한 후 일정 기간 가두어 두는 것을 말하고, 유형(流刑)은 중죄에 대한 형벌로 죄인을 먼 곳이나 섬으로 유배보내는 형벌이다. 마지막 사형(死刑)은 중죄인을 죽이는 것으로, 목 매달아 죽이는 교형(絞刑)과 목을 베는 참형(斬刑) 두가지 방식이 있었다.

    그렇다면 태와 장은 어떻게 다를까? 태(笞) 규격은 ‘대두경(두꺼운 쪽) 2분 7리(약 0.9 cm), 소두경(얇은 쪽) 1분 7리(약 0.56 cm), 길이 3척 5촌(약 116 cm)’인 반면 장(杖)은 그보다 두꺼워 ‘대두경 3분 2리(약 1 cm), 소두경 2분 2리(약 0.7 cm), 길이 3척 5촌(약 116 cm)’였다. 태나 장은 길이가 똑같아 얼핏보면 큰 차이가 없었고, 다만 장이 태보다 아주 조금 굵었을 뿐이었다. (굵다고 해봐야 두꺼운 쪽 기준으로 고작 0.1cm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조선시대 태와 장은 116cm로는 일제 강점기 조선태형령에서 규정한 태 54.5cm보다는 2배 정도 길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왼쪽은 조선시대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실린 태, 장, 신장의 규격으로 태형을 집행할 때는 제일 오른쪽의 태를 사용했다. 태의 지름은 1cm가 채 안되고, 길이는 대략 116cm로, 일제강점기 사용된 태 보다 길었다. 그림의 붉은 색 테두리부분에서 보듯 태와 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른쪽은 일제강점기 조선 풍속을 다룬 엽서 중 태형에 관한 것이다. 이런 태형 사진 다수는 연출 사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 우리에게 익숙한 곤장은 또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장(杖)을 곤장으로 이해하거나 그렇게 번역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나 태장(笞杖)의 장과 곤장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곤(棍)은 조선시대 형벌의 기준이 된 [대명률]에는 따로 규정이 없다. 선조 때부터 매의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곤장으로도 표현되고, 정조 때 편찬된 [대전통편]에서 관련 제도가 명문화되었다. 곤장은 원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고, 궁궐이나 군대 등에서 큰 죄인을 처벌할 때로 한정하였다. 대상이나 용도에 따라 소곤(小棍), 중곤(中棍), 대곤(大棍), 치도곤(治盜棍) 등으로 구별하였다. 곤장의 크기는 태형과 장형에 쓰이는 태, 장보다 훨씬 큰 도구였기 때문에 사용에 보다 엄격한 규제가 존재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관들이 태와 장을 사용해야 할 곳에 곤장을 사용하는 등 형벌의 남용이 심각해졌다. 이런 세태를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오늘날의 벼슬아치들은 큰 곤장 사용하기를 즐겨한다. 두 종류의 태(笞)와 세 종류의 장(杖)만으로써는 통쾌한 맛을 느끼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사진] 한말 기산 김준근이 그린 풍속화로 왼쪽은 ‘태장치고’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실제 태와 장은 외형상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오른쪽은 ‘곤장치고’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곤장은 원래 군무(軍務)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인에게까지 사용 범위가 확대되고 남용되었다.

    1910년대 태형 사례들

    일본 순사들에게는 그들이 원한다면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도 한국인을 구타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해마다 수만명에게 태형을 가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남는 것이라고는 줄을 이은 불구자와 시체 뿐이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을 취재한 F.A 멕켄지의 기록이다. 이렇게 회초리를 든 일본 헌병경찰과 순사는 한국인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어린 아이들을 달랠 때 일상적으로 쓰던 “순사 온다”란 표현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헌병경찰과 순사는 엄밀히 말하면 성격이 다르고 계통이 구분되는 것이지만, 보통 섞어 사용하기도 한다.)

    태형은 1910년대 주로 경범죄에 대한 처벌로 이뤄졌는데, ‘조선태형령’과 비슷한 시기에 제정된 ‘경찰범처벌규칙’을 위반하면 헌병경찰들이 즉결처분을 통해 행할 수 있었던 형벌이다. 1910년대 헌병 경찰은 즉결처분권이라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권한은 일제하 가벼운 범죄에 대해 사법재판까지 가지 않고 경찰이 단죄하도록 한 것이었는데, 이에 따라 헌병경찰은 조선인에 대해 구류, 벌금, 태형 등을 가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즉결처분권에 따라 태형을 결정하는 과정이 매우 자의적이고 주관적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3개월 이하 징역이나 구류형, 또는 100원 이하 벌금이나 과료를 받을 죄라면 태형으로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태형은 무수하게 남발되었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 사회를 설명할 때 태형을 빼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인들은 어떤 이유들로 태형을 당했는지, 그리고 그 후유증은 어떠했는지, 태형과 관련된 사회의 한 단면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들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태형 처벌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도박이었다. 1910년대 태형 처벌자 중 도박에 의한 것이 무려 75% 정도를 차지할 정도였다. 도박에 대한 기사 한두 가지만 보자.

    [매일신보] 1913년 6월 19일자에는 인천에 거주하는 최순보, 장희문, 윤봉성 세 사람이 최순보의 집에 모여 노름을 하다가 발각, 경찰서에 잡혀가 태 30대씩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듬해 1914년 7월 2일자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경성동 부두다리 박석환은 함영준과 함께 노름을 하다가 동대문분서에 잡히어 볼기 열 다섯 개씩 단단히 때려 풀어주었다.” 이 이외에도 도박하다가 잡혀 태형을 당했다는 기사는 수도 없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다.

    그 다음으로 많은 경우는 삼림령 위반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전에는 온돌방을 데우고자 마을 뒷산에 올라 가서 자유롭게 땔나무를 하고, 마른 솔잎을 긁어왔는데 이제는 그것이 1911년 새로 신설된 삼림령에 따라 함부로 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매일신보]에는 “인왕산 국유산림에 들어가서 솔나무가지를 도벌키 위하여 간수 몰래 한뭇을 도벌하다가 들”켜(1918.1.30.), “경성 경복궁 신무문 밖 보안림 안에 들어가서 솔잎새 한웅큼을 절취하다가 발견되어”(1918.2.3.) 태형을 받은 일이 실려 있다.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한 것도 아닌데 단순히 가로수를 꺾어 태 5대를 맞은 이도 있었다.

    [사진] 대정 4년(1925) 남원군수가 남원에 거주하는 안병주에게 발급한 사유림 벌채 허가증이다. 조선총독부가 1911년 제정한 삼림령에 따라 식민지 조선인들은 산에 들어가 함부로 벌채할 수가 없었다. 1910년대 경찰범처벌규칙 위반으로 태형을 받은 자 중 상당수가 허가 없이 산에 들어가 벌채한 자들이었다. 이 문서 제일 왼쪽에 세로로 “주의: 무허가벌채자는 오십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에 처함”이라는 경고문구가 보인다. 이 문서가 작성된 1925년에는 태형은 이미 폐지된 상태였다.

    위생 문제로 처벌 받은 경우도 많았다. 과일장사하는 이완우는 익지 않은 감을 팔다가 순사에게 발각되어 태 15대에 처해졌고([매일신보] 1912년 10월 8일), 인천부 내면 우각동에 살던 김원택은 “그 거주하는 근처가 청결치 못하여 위생상 방해가 적지 아니함으로” 태 20대에 처해졌다고 한다. ([매일신보] 1913년 4월 30일) 1913년 5월 23일의 [매일신보]에도 김원택과 비슷한 사례가 실려있는데, 인천 부내면 외동 조인녀(45), 동부 내면 우각동 이덕창(34), 문영안(32), 박원근(25), 지영종(37) 등 5명은 “부근 개천과 문앞이 청결치 못하야 위생상 방해가 적지 아니함으로 지난 21일 해당 경찰서에 호출하여 엄중히 설유한 후 각각 태 10대씩을” 맞았다. 여기서도 드러나듯 태형 처분은 자의적이어서, 청소를 게을리 하여 주위가 청결치 못하다 하여 인천 부내동 조인녀 등 5명은 각 10대를 맞은 반면, 역시 인천에 살던 김원택은 태 20대를 맞았다. 위에서 언급했던 바 익지 않은 감을 팔았다고 태 15를 맞은 이완우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또 어떤 기사에는 똑 같이 익지 않은 감을 팔았는데 태 80대를 때린 경우도 있다. 엿 장수, 아니 헌병경찰 마음대로였다.

    한편 도시에서 도로통행을 방해하여 태형 처벌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국보가 태형 5대를 맞은 사연이 [매일신보] 1914년 7월 4일 기사에 실려 있는데 “경성 남대문 바깥 청파에 사는 이국보는 지나간 하루날쯤 마차를 타고 가면서 고삐를 잡지 않고 가다가 잡혀서 장판에 올려매고 볼기 다섯 개를” 맞고 풀려났다. [매일신보] 1912년 5월 11일자에는 도로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하여 태 5대를 맞은 김경진에 대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1912년 5월 8일 창덕궁 이왕 전하(퇴위한 순종)가 덕수궁에 행차할 때 중부 수진동 부근에서 한 순사보가 교통 통제를 하는 때 그가 “나는 내 갈 길로 가거늘 그대에게 무슨 관계가 있어서 금지하느냐”고 따졌다. 이에 순사보가 “이 같이 완매한 백성은 처음 보았다”고 엄중히 훈계하였더니 김경진이 “너는 무엇이기에 나더러 완매한 백성이라하느냐”며 욕설과 함께 대꾸했다. 그러자 그 순사보가 참다 못하여 김경진을 “포승으로써 단단히 포박하여 관할 경찰서로 잡아가서 엄중히 설유한 후 볼기 다섯 개를 단단히 때려” 풀어 주었다.

    웃통 벗고 일하다가 태형을 당한 사례도 있는데, [매일신보] 1913년 7월 26일자에는 ‘웃통 벗고 볼기 맞아’라는 제목으로 다음의 기사가 실려 있다.

    개성군 남부면 방동에서 주막 영업을 하는 김석방의 집에서 고용하는 윤영안(32), 석부면 반송방 정자동에서 고용하는 김사환(29) 두 명은 사세국(司稅局) 출장소 건축 공사장에서 역부로 종사하는 터이더니 본월 19일에는 웃통을 벗어 버리고 노동을 하다가 순사에게 적발되어 태형 십대씩에 처해졌다하더라

    생산적인 직업에 종사하지 않는 부랑걸식자들도 태형을 피해갈 수 없었다. [매일신보] 1914년 6월 10일자 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서대문 경찰분서장은 일정한 직업이 없이 신체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힘 안들이고 빌어먹기를 주장으로 삼아 낮과 밤으로 각처로 돌아다니며 비럭질하게 열이 났던 자들에게 그들의 장래를 경계하여 볼기 스무개를 단단히” 때렸다.

    태형으로 끝내지 않고 아예 예수처럼 십자가 모양의 형틀을 매고 시내를 걸어다니게 한 사례도 있었다. 이는 명확히 ‘조선태형령’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였는데, 3·1운동 시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로 보인다. 미국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발행된 신문 [The Constitution] 1919년 4월 9일자 보도에 실린 내용이다.

    평양에서는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장로회 신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을 마구 잡아가 옷을 벗기고 십자가 형틀에 묶은 후 태형을 가했다. 이어 형틀을 매고 시내를 걸어다니도록 했는데, 시범 케이스로 시민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였다. 경찰들은 신학생들에게 “너희가 믿는 예수도 십자가를 매고 걸었으니, 너희도 아버지를 따라 그런 특권을 누려보아라”라며 이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를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로 받아들인 당시 마페트 등 이 지역 선교사들은 경찰당국에 거세게 항의했고, 이에 당시 33보병연대 연대장 고지마는 기독교 십자가를 능욕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910년대 일본의 식민권력은 태형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공포와 지배를 관철시키고 있었다. 당시 회초리를 든 헌병경찰은 일상의 감시자로서 한국인의 생활 전반을 구석구석 살피고 통제하고 있었다. 식민권력은 저 멀리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를 지배하는 강력하고도 구체적인 힘이었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태형의 의미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헌병경찰과 태형으로 상징되는 1910년대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을 지냈던 아카시 모토지로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이 시기 조선은 계엄령 같은 상황이었다. 조선 전체가 창살 없는 병영국가였다.”

    태형으로 죽은 청년, 김명하와 탁창국

    태형을 회초리 맞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안된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태형으로 수술을 받거나 심지어 죽는 경우들도 적지 않았다. 제대로 된 항생제가 없던 시절, 3일에 걸쳐 30대씩 총 90대를 맞았다면 흔히 피부 혈관이 파괴되고, 피부는 다 괴사가 되어 녹아내리게 된다. 이들은 결국 패혈증으로 죽게 되는 것이다.

    태형 90대를 맞은 이의 상처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일본 기독교회 인사들이 3·1운동 직후 조선을 시찰한 후 작성한 시찰 기록 중에는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태 90대를 맞은 58세 남성에 대한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좌측 볼기는 피부가 전부 벗겨지고 약 직경 3인치에 걸쳐 지방 및 볼기살이 노출되었으며, 주위는 전부 종기가 심하여 고통스러운 상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평안북도 선천 미동병원 의사의 말을 통해 신의주 감옥에서 태형을 당해 자신의 병원에 입원한 6명이 있었는데, 그 중 2명은 수술 후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생존한 나머지 4명의 상태도 심각한 상태였다. 역시 시찰단의 기록이다.

    4명의 환자는 모두 직경 4인치에 걸쳐 피부가 벗겨지고 우측 볼기살이 돌출되어 상단에 손끝 전부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있다. 깊숙이 뒤까지 삽입되어 있는 거즈를 빼내니 살에서 피와 고름이 섞여 나와 (시찰단) 일행 중 2명은 끝내 바로 보지 못하고 나왔다.

    이 미동병원에서 수술 후 사망했다는 2명의 인물은 작년 보도채널 [뉴스타파]가 추적하여 그 신상을 밝힌 바 있다. [뉴스타파]는 2022년 영국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굴한 자료들 속에서 프랭크 스코필드박사의 보고서를 찾아 보도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에서의 잔혹행위’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3·1운동 당시 평안북도 강계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태형을 당한 피해자들의 증언과 함께 4명의 피해자 상처 사진을 첨부했다.

    스코필드 보고서에는 선천 미동병원에 입원했지만 결국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한 강계의 두 청년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일본 기독교회 인사들이 방문해 시찰기록을 남겼다는 바로 그 병원이다. [뉴스타파]가 추적해 밝힌 두 청년의 이름은 김명하(19세)와 탁창국(22세)이었다. 그들은 강계에서의 만세 시위 때 2,000장이 넘는 태극기를 제작·배포해 태형을 당한 인물들이었다. 영국 외교 문서철에는 19살 청년 김명하의 죽기 직전 상황이 당시 선천 선교병원 간호사의 증언으로 남아 있다. 일제의 잔혹한 태형으로 죽어가던 김명하의 마지막 모습은 참으로 비장했다. 조선인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 한다는 말이 퍼져 나가던 1910년대 헌병경찰이 휘두른 회초리 끝에는 이렇게 패혈증으로 죽어가는 조선인들의 피눈물이 있었다.

    19세 김군(김명하)의 엉덩이는 심각하게 감염돼 있었고, 괴사한 조직을 많이 제거해야 했습니다. 마취에서 깨며 그는 쉴새없이 ‘대한독립만세(Long Live Korea)’를 외쳤습니다. 김군은 회복하는 기미가 보였지만 이후 패혈증이 발생했습니다. 사망 당일 오후 내내 김군은 손가락 끝을 물어 뜯으려 했습니다.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던 나는 그의 입에서 손을 떼어놓았습니다. 물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는 마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우리나라의 자유를 보고 싶습니다.”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는 이내 숨을 거두었고, 나중에서야 그가 연신 손가락을 묻어뜯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앞서 간 애국자가 그러했듯 그도 자기 손가락 살점을 물어 뜯어 피로 ‘독립선언(the oath of Independence)’을 쓰려 했던 겁니다.

    김동인의 [태형], 오기영의 [사슬이 풀린 뒤]

    마지막으로 태형을 소재로 한 가장 인상적인 글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김동인의 단편소설 [태형], 또 하나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오기영의 회고록 [사슬이 풀린 뒤]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진] 왼쪽은 김동인의 소설 [태형]의 표지이다. [태형]은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해진 인간의 도덕적 양심과 이기적 욕구의 갈등을 잘 그려낸 작품이다. 오른쪽은 오기영이 쓴 회고록 [사슬이 풀린 뒤]의 표지이다. 회고록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대신해 태형을 맞는 최치행 부자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인터넷 사진)

    먼저 김동인의 소설 [태형]부터 보자. 이 소설은 1922년 12월부터 1923년 1월까지 잡지 [동명]에 3회에 걸쳐 연재된 작품으로 부제는 [옥중기의 일절]이다. 3·1운동 당시의 옥중 상황을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은 미결수 감방에 온 1인칭 서술자 ‘나’의 눈을 통해 감방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더운 여름, 다섯 평이 조금 못되는 감방에는 마흔 네명의 미결수로 가득차 비좁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땀냄새나 악취가 풍겨 숨쉬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다섯평이면 가로 세로 각각 4미터 정도 밖에 안되는 넓이다. 이렇게 좁다 보니 밤에는 잠자는 사람과 서서 기다리기로 한 사람을 정해 교대로 잠을 자야만 했다. 죄수들은 좁은 감방에 앉아 파리의 자유를 부러워하고들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태형을 선고받고 감방에 들어온다.

    ‘나’는 노인에게 판결이 어떻게 됐는지 묻는다.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태형 구십도랍니다.”라고 답한다.

    나는 “거 잘됐구려! 이제 사흘 뒤에는, 담배도 먹구, 바람두 쏘이고…”라고 답한다.

    여기에 노인의 답변 한마디가 문제였다.

    “여보! 잘됐시오? 무엇이 잘됐단 말이오? 나이 칠십 줄에 들어서 태 맞으면, 말하기도 싫소. 난 아직 죽기 싫어 공소했쉐다!”

    상소했다는 말에 감옥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먼저 ‘나’는 노인에게 성을 낸다.

    “여보! 시끄럽소. 노망했소? 당신은 당신이 죽겠다구 걱정하지만, 그래 당신만 사람이란 말이오? 이방 사십여 인이 당시 하나 나가면 그만큼 자리가 넓어지는 건 생각지 않소? 아들 둘 다 총에 맞아 죽은 다음에 뒤상(늙은이) 하나 살아 있으면 무얼해? 여보!”

    다른 사람들도 영감을 용서치 않았다. 노망했다, 바보다, 제 몸만 생각한다, 내어 쫓아라 등등

    그러자 영감은 주위의 반응을 의식해서인지 “그럼 어떡하란 말이오?”라고 묻는다.

    ‘나’는 주저없이 답한다.

    “이제라도 공소를 취하해야지!”

    결국 노인은 90대의 태를 맞으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간수를 통해 공소를 취하하고, 태형을 받기 위해 간수를 따라갔다. ‘내’가 노인을 내보내고 자리에 돌아오면서 감옥 안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그들의 얼굴에는 자리가 좀 넓어졌다는 기쁨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바깥에서 매의 숫자를 세는 소리와 함께 노인의 죽어가는 신음소리가 섞여 들린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소설은 ‘나’의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끝난다.

    나는 저절로 목이 늘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머리에는 어젯밤 그가 이 방에서 끌려 나갈 때의 꼴이 떠올랐다.

    “칠십 줄에 든 늙은 이가 태 맞구 살길 바라갔소? 난 아무케 되든 노형들이나…..”

    그는 이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초연히 간수들에게 끌려 나갔다. 그리고 그를 내어쫓은 장본인이 나였다.

    나의 머리는 더욱 숙여졌다. 멀거니 뜬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나는 그것을 막으려고 힘껏 감았다. 힘 있게 닫힌 눈은 떨렸다.

    김동인의 [태형]은 감옥이라는 질식할 듯한 공간 속 죄수들 사이의 갈등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 놓이면 평소의 덕성이나 겸양, 친절에서 벗어나 인간의 심성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또 추해질 수 있는가하는 인간의 비극적 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글은 오기영의 [사슬이 풀린 뒤]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3·1 만세시위에 앓던 몸으로 자리를 털고 나섰다가 붙들려 태 90대를 언도받은 순동이 형님에 대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 최치행은 아들이 태 90대를 맞다간 아들이 제 명에 살지 못할 것을 알고 병든 자식 대신 자신이 볼기를 맞겠다고 헌병분견대를 찾아가 하소연한다.

    “저 자식이 죽습니다. 분명 장하(杖下)에 물고가 납니다. 자식의 구십도 대신에 아비를 곱절 백팔십도 쳐주시면 그 은혜 백골난망이올시다”

    그렇게는 안된다고 헌병보조원에게 뺨을 맞고 쫓겨나기를 몇 차례 끝에 최치행은 결국 허락을 받게 된다. 부자가 서로 맞겠다고 하니 절반씩 나누어 맞으라고. 영감은 이 말에 매우 기뻐한다. 드디어 이튿날 아침 영감은 헌병대에 출두하여 첫날치 삼십도를 맞고 따라갔던 동리 사람에게 업혀 나왔다. 그 다음날 업혀서 헌병대에 나온 영감에게 볼기 칠 보조원이 오늘치 열다섯대를 맞으면 된다고 하자, 노인은 “아니오. 오늘치 30대 모두 내가 맞읍시다”라며 고집을 부려 다시 30대를 맞게 된다. 영감은 업혔던 이의 등에서 내려 검붉게 군데군데 부풀은 볼기짝을 까고 볼기채 위에 엎드렸다.

    “자아, 시작-”

    “엇!” 철썩

    “엇!” 철썩

    으, 응, 우후, 우후하는 소리가 영감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이날치 30대가 끝나고 그를 끌어내렸다. 그는 태형틀에서 끌어내리는 줄도 몰랐고 업혀 나올 때 유치창 속에서 아들이 목을 놓고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기절했기 때문이다.

    또 그 다음날 영감은 또 오늘치도 자신이 맞는다고 하소연하여 다시 업혀 가 태형틀에 올라갔다. 사람들은 저러다가는 자식은커녕 영감이 먼저 죽을거라고 모두 걱정하였다. 영감의 소원대로 사흘째의 볼기도 영감이 맞음으로써 벌의 결산이 끝나 아들도 풀려나 업혀 나가는 아버지를 뒤를 울며 따랐다.

    “아버지, 나 때문에 이 매를 맞으시고….”

    순동이네 집에서는 자리에 엎드려 맥을 놓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머리맡에 병약한 아들이 울었다. 그러나 영감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며칠 뒤 기운이 다소 회복되었을 때 그는 문병하는 사람들에게, “허, 나야 내 자식을 위해 매나 좀 맞은 게 뭐 장하오이까. 예수는 온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혀 보혈을 흘리셨소.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말하고 이런 때야말로 더욱 전도하기 좋은 기회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교회 전도사였던 것이다.

    덧붙여

    이상 태형에 관한 긴 글을 마친다. 그런데 독자들께서는 왜 뜬금없이 태형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으실지 모르겠다. 사실 이 태형에 대한 글을 쓴 이유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벌써 하순에 접어든 3월이 다 가기 전에 이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일제 강점기 태형은 이 3월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태형령’을 제정·반포한 날이 1912년 3월 18일이고, 1920년 3월 31일을 끝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마다 3월이 되면 3·1운동만 떠올릴 것이 아니라, 회초리 든 헌병경찰과 ‘조선태형령’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자는 취지로 태형을 다루고 싶었던 이유다.

    둘째. 최근 한일정상회담을 전후하여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크게 제창되고 있는 시대 상황 때문이다. 일본 보수 우익의 논리를 일본 총리도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자가 그대로 추종하고 대변하는 기막힌 현실을 목도하면서 일본의 식민 지배가 과연 우리에게 은혜이자 축복이었는지, 또 그 시대가 우리를 야만의 나라에서 문명화와 근대화가 달성된 ‘아름다운 나라’로 탈바꿈시켰는지 되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조선의 문명화’로 그렇게 강조했던 그 일본이, 실제로는 전근대적 형벌인 태형을 통해 조선인들을 강압통치했던 것이 식민 지배 현실이었다. 심지어 관리와 교사들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차기도 했다. 선량하고 은혜로운 제국주의 국가는 이 지구상 어디에도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다. 악랄한 제국주의 국가와 조금 덜 악랄한 제국주의 국가만 있을 뿐이다. 그냥 자신들의 국가 이익을 쫓아 식민지를 경영했을 뿐이다.

    셋째. 또 한일정상회담 관련 이야기다. 최근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익이 아니라 일본 국익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 외교가에서 흔히 쓰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외교란 ‘51대 49’의 결과를 만들어 모두 자신이 49가 아닌 51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결국 외교란 총성 없는 전쟁이고, 51퍼센트와 49퍼센트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고난도 방정식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일본이 원하는 모든 것(이것은 오랫동안 미국이 원하던 것이기도 하다)을 허허 웃으며 다 내주고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100 대 0’! 한국 역사상 최고의 굴욕 외교이자 외교 참사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민들은 국익뿐만 아니라, 자긍심도 잃었다. 식민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이제 철없는 수구주의자의 푸념으로 치부되고, 일본의 요구를 거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미래를 위한 통큰 결단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국민들은 지금 왜 저렇게 정부와 대통령이 일본에게 저자세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어떤 길로 걸어가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것일까? 외교에서 국익을 내팽개친 것도 문제지만, 안으로는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행정부의 수반이 무효화시켜 버린 것도 민주주의 기본가치이자 헌법의 기본 정신인 삼권분립을 위반한 소지가 있다. 무엇보다 강제 징용 피해자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수십년간 싸워서 어렵게 쟁취한 결론, ‘1965년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그 결론을 대한민국 정부 스스로가 걷어차 버렸다. 그리고는 징용 피해자들의 입장을 무시하고, ‘제3자 변제’라는 엉뚱한 해법을 내놓았다.

    이 정부의 인사는 어떤가? 능력있는 인사를 두루두루 쓰려 하지 않고, 국가 주요 기관에 검찰 출신들을 죄다 채워 나라를 아예 검찰 공화국으로 만드는 한편, 야당과의 협치를 모색하기는 커녕 반대파 탄압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검찰의, 검찰에 의한, 검찰을 위한 대한민국! 이게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지, 검사들의 나라가 아니다. 일본과의 외교 문제에 대해서는 무조건 미래를 보라고 외치면서, 안으로는 스스로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는 대략 20년은 퇴보했다. 바깥에 나간 대통령은 빙긋빙긋 웃으며 국익을 내팽개치면서, 안에 들어와서는 국민과 야당, 노조에 위협적인 표정으로 큰 소리친다. 경제는 엉망이고, 무역 수지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데, 뾰족한 대책은 없다. 게다가 정책은 오락가락이다. 심사숙고없이 툭 던진 정책에 반발이 생기면, ‘대통령 개인 생각’이었단 말로 변명한다. 대통령이 된 순간, 그는 국가의 수반이자 헌법기관이며, 그의 모든 행위는 곧 공적 행위다. 그는 자신의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막중한 자리임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이렇게 대통령이 자질 없고 능력 없고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선택지는 하나 밖에 없다.

    그래 그거! 그게 유일한 답이다.

    이런 생각 끝에 다다른 그 단어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사전에 ‘신분이 강력하게 보장되어 있는 대통령 등 고급 공무원의 위법행위에 대해 처벌하거나 파면할 수 있는 특별한 제도’로 정의되어 있는 그 단어.

    ㅌㅎ으로 되어 있는 단어인데…

    ㅌㅎ.. ㅌㅎ..

    그 단어가 머리를 계속 맴돌다가 결국 같은 초성을 가진 ‘태형’이 먼저 떠오르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태형 이야기를 다루어야겠다고 결심한 세 번째 이유였다.

    태형! 태형이 유일한 답?

    *사족: 일제 강점기 태형에 대한 글을 쓰려고 검색어에 ‘태형’을 치면, 형벌로서의 태형보다 훨씬 많이 뜨는 자료가 BTS의 ‘뷔’(본명이 김태형)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수를 뜻하는 ‘도수(度數)’를 추가해 ‘태형 도수’라는 검색어를 넣어 검색했더니 역시 BTS 뷔가 쓴 안경 도수에 대한 기사들이 쭉 뜬다. 이래 저래 일제 강점기 태형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앞으로 태형(笞刑)에 대해 검색하고 싶으시면 반드시 ‘일제강점기’란 단어와 함께 검색하시길 권한다.

    <참고한 글>

    염복규, 「1910년대 일제의 태형제도 시행과 운용」, [역사와 현실] 53호, 2004
    오기영, [사슬이 풀린 뒤],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2
    송기호, [과거보고, 벼슬하고],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정병욱, [낯선 삼일운동], 역사비평사, 2022

    *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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