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인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①
    [컬렉터의 서재] 일제강점기 태형(笞刑)의 한 연구
        2023년 03월 22일 09:4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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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15년은 더 지났을 것이다. 경매를 통해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흥미로운 장부 한 점을 수집했다. 장부는 200페이지 정도로 두꺼웠는데, 표지 제목은 거의 지워져 『犯罪人 名簿(범죄인 명부)』라고 적힌 것을 겨우 읽을 수 있는 정도였고, 왼쪽 위에는 비밀 문서임을 뜻하는 붉은 색의 ‘秘’자(字)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제목 왼쪽 아래에는 너무 많이 지워져 읽을 수는 없지만, 세 자의 한자가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마 이 명부를 만든 관공서 명칭일 것이다. 장부를 펼쳐보니 대정 7년(1918)부터 소화13년(1938)까지 20년간의 범죄인 총 194명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이들의 주소지는 모두 ‘충남 예산군 오가면’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읽을 수 없었던 큰 제목 옆의 세 자는 ‘吾可面(오가면)’이었을 것이다. ‘오가면’이라고 하더라도 이 장부는 면사무소같은 행정관서보다는 경찰관서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 장부에는 벌금, 태형에서부터 징역, 사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처벌을 받은 당시 ‘범죄인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특히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죄명은 도박, 삼림령 위반, 주세령 위반이었다. 내가 이 명부에 흥미를 가져 수집한 것은 한 면소재지의 사례를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의 범죄 현황을 살펴보겠다는 생활사적 관심도 없지 않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이 범죄인 명부가 3·1운동 시기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명부를 통해 일제 강점기 충청도 어느 면 소재지 사람들이 3·1운동에 참가한 후 어떤 죄목으로, 어떻게 처벌받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이 장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충남 예산군 오가면 사람들 중 3·1운동과 관련하여 처벌받은 사람은 총 13명이다. 1919년 4월 7일부터 4월 23일까지 그들은 모두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 받았다. 3·1운동 당시 이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있었던 것일까? 3·1운동 당시 이 예산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를 검색해보면, 오가면을 포함하여 여러 면이 4월 4일과 5일 밤을 이용한 봉화 시위를 전개한 사실을 찾을 수 있다. [매일신보] 1919년 4월 10일자 기사를 보자.

    예산군 내에서는 지나간 4일 오후 10시경부터 예산면 대술면 오가면 신압면 고덕면 각 리, 신양면 일부 약 15개소에서 각각 다수한 군중이 각각 봉화를 들고 소요를 하였고 5일에는 예산장날을 이용하여 오후 1시경에 장꾼 일동이 소요하며 행동이 불온하였으므로 헌병분대에서 출동하여 진압한 바 군중편에 중상자가 4,5인에 달하였고 동일 오후 7시경에는 또 예산군 읍남면 형제고개와 서편 관영산과 북편 금오산과 동편 시산 4개소에서 다수한 군중이 거화하고 소요하였으므로 해산케 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부득이 발포 해산을 하자 또한 비가 오므로 모두 헤어졌다더라.

    오가면 『범죄인 명부』에 실린 1919년 4월의 보안법 위반자 13명은 아마 이 봉화 시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명부에 실린 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살펴보면 오민영(50), 박치덕(34), 강덕몽(25), 이명노(27), 이순태(22), 고성보(33), 나덕재(29), 박영근(32), 김덕삼(42), 박인석(25), 전봉석(26), 윤희두(28), 박덕준(32)으로 20∼30대가 중심이었다. 직업란이 비어 있는 윤희두와 고성보 2명과 아예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표기한 박덕준을 빼고는 직업은 모두 농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들 중 봉화시위를 주도한 이는 누구였을까?

    오가면 신장리에 살았던 강덕몽(姜德夢)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강덕몽이 받은 처벌이 다른 이들에 비해 무거웠기 때문이다.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13명 모두 ‘태형(笞刑)’ 처벌을 받았는데, 그 중 7명은 30대, 5명이 60대에 머물렀다면, 오로지 강덕몽만 90대를 맞았던 것이다. 이를 통해 강덕몽이 주동자, 60대를 맞은 5명(오민영, 박치덕, 전봉석, 윤희두, 박덕준)이 중간 주동자급, 나머지는 모두 단순 가담자로 분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명부를 통해 3·1운동에 가담한 이들이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았고, 처벌 형태는 주로 ‘태형’이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13명의 기록 내용 중 ‘판결 또는 즉결관청명’항목에 모두 ‘예산헌병분대’라고 적힌 사실을 통해, 그들이 정식 재판을 통해 처벌받은 것이 아니라, 예산헌병분대에서 즉결처분으로 태형을 당했다는 것도 알았다. 당시 태형 처벌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즉결처분에 의한 것인데, 경찰서장, 헌병분대장 또는 헌병분견소장은 ‘조선태형령’에 의거하여 재판 절차를 밟지 않고 태형 처분을 할 수 있었다. 두번째는 재판을 통해 태형 판결을 받은 경우이다. 3·1운동에 참가하여 보안법을 위반하여 처벌받은 오가면의 13명이 정식 재판을 받고 태형 처분을 받았다면, ‘판결 또는 즉결관청명’ 항목에 ‘예산헌병분대’가 아니라 예산을 관할하고 있던 공주지방법원 같은 법원 명칭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3·1운동과 관련해서 즉결처분과 재판에 의해 태형을 받은 사람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통계자료로 각각 9,078명, 1,674명, 합해서 10,752명이었다. 오가면 『범죄인 명부』에 실린 강덕몽 등 13명도 앞의 저 9,078명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진] 왼쪽은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의 『범죄인명부] 표지, 오른쪽은 장부 내용 중 1919년 4월 19일자 강덕몽에 대한 기록이다. 붉은 색 테두리 부분에서 죄명에 ‘보안법 위반’이, 형명·형기항목에 ‘태 90’이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3·1운동 당시 역사의 한 단면을 담고 있는 이 장부는 지금은 내 소장품이 아니다. 나는 이 명부를 국사편찬위원회에 의뢰해 전자사료관에 공개한 후,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매도했다. 관심있는 독자께서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http://archive.history.go.kr/)에서 ‘일제시기 범죄인명부’로 검색하면 고해상도 사진을 통해 명부 내용 전체를 살펴 보실 수 있다.

    한 장의 태형 사진

    15년 전에 수집했던 범죄인 명부를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보내고, 몇 년 후 나는 다시 태형에 관련된 심상찮은 사진 하나를 경매를 통해 수집했다. 이 사진은 책인지 사진첩인지 모를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였는지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지금까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 미스터리한 사진은 다행히 상태가 매우 좋은데, 인쇄본이 아니라 실제 인화한 사진이다. 크기는 가로 15cm, 세로 10.5cm로 엽서 크기와 비슷하다. 나는 이 사진을 보는 순간 희귀한 일제 강점기 태형 사진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외국인이 찍은 조선말이나 대한제국기 태형 사진은 꽤 남아 있어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조선의 풍속’이라는 제목의 엽서에도 조선의 폐습을 알리고자 한 의도인지 심심치 않게 태형 사진이 실린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태형 사진은 그동안 좀체 볼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사 교과서에도 1910년대 무단통치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이 시기 태형 사진이 실릴 법한데도, 제복 입고 칼을 찬 교사 사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태형 관련 사진이 실린 경우에도 그냥 십자 모양의 태형틀 사진이 고작이다. 제대로 된 사진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진] 2010년대 중반 필자가 수집한 일제 강점기 태형 사진. 태형장의 분위기가 자못 무겁고, 긴장감이 돈다. (박건호 소장)

    태형은 회초리같은 매로 볼기를 때리는 형벌이다. 이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던 형벌이었는데, 갑오개혁 때 폐지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폐지를 못하고 유지되다가 일제가 1912년 ‘조선태형령’을 제정하여 다시 제도화되었다. “조선인은 일본법을 따르든지 죽든지 하나를 선택하라”는 제일성으로 식민통치를 시작했던 이가 초대 총독 테라우치 마사다케였다. 그런 그였으니 조선인을 대하는 태도 역시 강압적이었다.

    조선인은 근로를 낮게 여기고 편안함만을 탐내는 자들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강제력을 쓸 수 밖에 없다

    이 말처럼 그는 1910년대 강압적인 수단을 앞세운 무단 통치를 실행했다. 헌병경찰제도와 ‘조선태형령’도 그 일환이었다. 헌병경찰제도는 1910년대 일제가 조선인의 저항운동을 탄압하고자 헌병과 경찰을 통합하여 치안을 담당케 한 제도였다. 헌병경찰은 재판없이 범죄인을 처벌하는 즉결처분권을 가졌는데, 이를 통해 보통 구류, 과료, 태형 등이 실행되었다. 태형의 집행을 위해서는 별도로 1912년 ‘조선태형령’을 제정하였다. 이로써 헌병경찰이 조선인에게 태형을 가하는 모습은 1910년대 흔한 일상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일제는 “여자와 북어는 패야한다”라는 일본 속담을 약간 바꾸어 “조선인(엽전)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 한다”라는 말을 퍼뜨리며 태형을 합리화했다.

    그럼 이제 사진을 들여다 보자.

    먼저 이 사진은 한 명의 조선인 수형자가 태형틀 위에 볼기를 드러낸 채 엎드려 누워있고, 그 주변을 다수의 일본 헌병경찰이 에워싸고 기념 사진을 찍은 것이다. 모욕적인 사진이지만, 그나마 그들이 웃지 않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이 모욕감을 다소 줄여주고 있다. 실제 태형 집행 때의 사진인지 아니면 연출 사진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실제 태형 현장에서 찍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1910년대 이런 태형장면은 흔한 것이어서 당국이 사진을 찍고자하면 쉽게 찍을 수 있는 것인데, 굳이 연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조선태형령’이 1912년에 제정되었다가 1920년 폐지되었으므로 이 사진은 110년 정도된 사진이다.

    둘러 서 있는 이들은 대부분 헌병경찰로 보이지만, 제일 왼쪽의 인물과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인물은 경찰복이 아니라 기모노를 입고 있어서 저들의 정체가 궁금하다. ‘조선태형령’에 부속된 ‘조선태형령시행규칙’ 제7조에는 ‘태형의 집행 중에 집행에 종사하는 자 외에는 그 장내에 들어갈 수 없다. 단, 입회 관리의 허가를 얻은 자는 예외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가 태형 집행에 종사하는 경찰 관계자일 수도, 아니면 이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하여 ‘입회 관리의 허가를 얻은’ 일본 민간인일 수도 있겠다. 그 정체를 일일이 단정할 수는 없지만 둘러 선 이들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헌병경찰 복장에 일본인 특유의 콧수염을 길렀거나 기모노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단 유일하게 기모노도 입지 않고, 콧수염도 기르지 않은 인물이 있다. 태를 손에 들고 있는 오른쪽에서 4번째 인물이다. 이 인물은 다른 이들에 비해 나이도 유난히 젊어 보인다. 조심스럽지만 그는 어쩌면 조선인으로 헌병을 도와주는 역할을 했던 헌병보조원였을 수도 있겠다. 1910년대 일본 헌병경찰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언어 문제였다. 식민지 경찰로서 조선인을 상대하려면 조선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 겸 그들을 도와줄 보조인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인으로 헌병보조원을 두었던 것이다. 기록들을 보면 실제 태형을 가하는 이들이 헌병경찰보다는 헌병보조원인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통해 유일하게 태를 들고 때리는 포즈를 취하는 이 젊은 청년이 조선인 헌병보조원이었을 거라고 추측해 본 것이다.

    이 사진을 찍은 장소는 어디었을까? 아마 이곳은 감옥이나 헌병대 (혹은 헌병분대)였을 것이다. ‘조선태형령’ 제11조에는 “태형은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서 비밀리에 집행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역이 어느 지역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사진 앞면과 뒷면 어디에도 힌트가 없다.

    [사진] 왼쪽은 1910년대 태형 사진 중 태를 들고 있는 청년의 모습으로 다른 이들에 비해 나이가 젊고, 복장도 헌병경찰 복장과 다소 다른데다가 일본인 특유의 콧수염도 없어서 조선인 헌병보조원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은 사진 중 태형대에 올라 엎드려 태형을 기다리는 조선인의 모습이다. 두 눈 사이 잔뜩 찌푸린 미간이 태형 전 그의 두려움과 긴장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엎드려 있는 남자를 보자. 이 중년의 조선인 남자는 단발을 한 상태로 흰 옷을 입었다. 조선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단지 복장 때문만이 아니라 ‘조선태형령’ 제13조에 ‘이 (태행)령은 조선인에게만 적용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태형은 일본에서는 1882년 이미 폐지되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이 태형을 미처 폐지 못한 상태에서 식민지로 전락했고, 일제는 이 태형을 다시 법제화했기 때문에 ‘조선태형령’을 ‘조선인에 한함’이라고 천명할 수 있는 형식상 명분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태형이 일본 내지에서는 30년 전에 이미 폐지된 것인데 비해, 너희들에게는 원래 있던 형벌이었으므로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논리였다.

    태형틀에 올라 엎드린 남자는 팔이 묶이지 않은 상태이다. 조선총독부 훈령인 ‘태형집행심득’ 제1조에 따르면 ‘태형은 수형자의 양손을 좌우로 뻗게 하고 형틀 위에 거적을 깔고 엎드리게 하며 양팔 관절 및 양발을 띠로 조이고 바지를 벗겨서 둔부를 노출시켜 집행하는 것으로 한다’고 되어있다. 이를 통해 추측건대 이 사진은 태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남자의 찌푸러진 미간이 그 순간의 긴장감과 공포심를 보여준다. 원래 매를 맞을 때보다는 맞기 직전의 공포가 더 큰 법이다. 태형을 당한 직후라면 볼기의 핏자국은 그렇다치더라도 이 수형자는 축 늘어진 상태였을 것이다. 당시 태형을 당한 이들은 대부분은 제 발로 걸어가지 못하고, 업혀 나갔다고 한다. 추운 날씨는 이 남자의 고통을 더 크게 했을 것이다. 주변에 서 있는 헌병경찰들의 복장, 특히 왼쪽에서 세 번째, 오른쪽에서 두 번째 남성의 털코트를 보면 이 때는 추위가 매서운 겨울 언저리였을 것이다.

    이 사진에는 세 개의 태(笞)가 보이는데, 두 개는 손(오른쪽에서 4번째 일본옷입은 남자, 5번째 헌병보조원으로 추정되는 남자)에 들려있고, 하나는 형틀에 비스듬히 걸쳐져있다. 이 사진 속 태의 길이는 사람의 키를 기준으로 유추해 봤을 때 1m가 조금 넘어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이건 규정 위반이다. ‘조선태형령 시행규칙’에는 태 규격도 규정하고 있는데, 그 형태는 “길이 1척 8촌, 두께 2푼 5리, 너비는 태의 머리를 7푼, 태의 손잡이를 4푼 5리로 하며 대나무 조각으로 만든다. 마디는 깎아내고 삼으로 세로 방향으로 싸는데, 잘라 낸 부분에서 태의 머리는 1촌 2푼를 남기고 손잡이는 6푼을 남긴다. 삼실로 외부를 가로 방향으로 단단히 감되 한번 감을 때마다 등 부분에서 서로 묶어서 한 가닥의 모서리를 이루게한다. 길이 5촌의 베 조각으로 태의 손잡이를 감싼다. 바깥지름이 태의 머리가 2촌 3푼, 태의 손잡이가 1촌 5푼이 되도록 한다”라고 되어 있다.

    옛 단위가 나왔으니 이를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단위로 환산해보자. 1촌(寸)은 손가락 마디를 뜻하는데, 우리말로는 ‘한 치’라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엄지손가락의 좌우 넓이가 1촌인데, 보통 3.03cm로 계산한다. 10촌이면 1척(尺)이 되는데, 30.3cm이 된다. 1척은 우리말로는 ‘한 자’라고 한다. 1푼(分)은 1촌의 10분의 1인데, 0.3cm이다. 1푼을 다시 10분의 1로 나눈 단위가 1리(釐)인데, 이는 0.03cm가 되는 것이다.

    그럼 ‘조선태형령’에서 정하고 있는 태의 길이 ‘1척 8촌’은 어느 정도일까? 위의 환산 방식을 적용하면 태의 길이는 대략 54.5cm, 두께는 0.75cm, 태의 너비는 머리부분이 2.1cm, 손잡이부분 1.35cm가 된다. 그런데 사진 속의 태는 이런 규정이 무색하게 길이도 두 배 정도 길 뿐 아니라, 대나무 조각을 삼베로 감싸야 한다는 규정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그저 단단한 나무 꼬챙이로만 보일 뿐이다. 실제 태 규격과 관련해 규정을 어긴 경우는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기록을 보면 헌병경찰들이 수소의 생식기를 말려 태로 사용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이를 ‘쇠좆매’라고 불렀는데, 쇠좆매 끝에는 납덩이가 달려 있어 이것으로 맞으면 살이 손상당하고 납독이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실제 사용된 쇠좆매로 전해지는 것이 없어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사진 속에서 규정에 맞지 않는 것은 태의 규격 뿐만이 아니다. ‘태형집행심득’에서는 ‘형장에 음수(飮水, 마실 물)를 두고 수시로 수형자에게 먹일 수 있게 한다.’, ‘수형자가 비명을 지를 우려가 있을 때에는 물에 적신 포(布)를 입에 물린다.’는 규정도 있다. 그러나 사진 어디에도 수형자가 마실 물이라든지, 물 적신 천 등이 따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형틀에 묶인 저 조선인 남성이 맞았을 태의 도수(度數;매의 대수를 세는 단위)는 어느 정도였을까? 저 남성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가 없어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당시 ‘조선태형령’을 통해 태형의 집행 방식과 그 도수는 대략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조선태형령’ 제7조에 따르면 태형은 한번에 30대까지 맞을 수 있고, 하루에 1회를 넘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태형을 언도할 때도 이 30대가 기준이 되어 그 배수를 이용하여 30대, 60대, 90대 이런 식으로 많이 했다. (물론 30대 이하로 10대, 15대, 20대, 25대 이런 것도 가능했다.) 서두에서 살폈던 일제 강점기 예산 오가면 [범죄인 명부] 속 보안법 위반자들 13명이 30대, 60대, 90대로 처벌받았던 사실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 경우 규정상 30대는 하루에, 60대는 이틀에 걸쳐, 90대는 3일에 걸쳐 집행되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일제 강점기 태형 처벌 기록 중에서 90대 이상을 언도받았거나 맞은 사례를 본 적이 없다. 90대의 태형은 사람이 죽지 않을 만큼의 최대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매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실제 90대를 맞고 죽은 이들도 꽤 있었다. 여기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태형령’ 제4조에 여타의 형벌을 태형으로 환산할 수 있는 규정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르면 징역 1일이 1대, 벌금 1원이 1대로 계산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벌금 20원을 언도받았는데 벌금 낼 돈이 없으면 태 20대를 맞는 것으로 퉁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게 바로 ‘몸으로 때우는’ 것이겠다. 예나 지금이나 몸뚱아리가 돈이다. 이렇게 벌금형이나 징역형을 태형으로 대신할 수 있게 한 것은, 이것이 일단 행형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90일 징역형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석 달 동안 감옥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려면 상당한 비용이 발생하는데 비해, 이걸 태형으로 대체하면 3일에 걸쳐 90대를 치고 내보내면 되니 87일간의 행형비를 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형 비용의 절감도 절감이지만 총독부가 태형을 선호한 것은 태형이 가지는 강력한 징벌 효과 때문이기도 하였다. 일제의 권위와 힘을 조선인들에게 직접 과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신체에 직접적 타격을 가하는 태형만한 것이 없었다. 이는 1917년 조선총독부 사법부 감옥과가 쓴 「태형에 대해」라는 글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태형의 징벌 효과에 대해 이런 설명을 하고 있다.

    이 교육받지 않은 죄수의 대부분은 영예심도 없고 수치심도 없는 열등한 자로, 이와 같은 범인에게 단기자유형 처벌해도 완전히 행형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이들 범인에 대해서 효과적인 형벌을 찾는다면 오직 본 제도 [태형]가 있을 뿐, 누구든 정신적 고통에 둔감한 자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고통을 실감시킬 수 있는 체형을 처벌하는 것 외에 방도가 없다.

    태형은 실제 어떻게 집행되었는가?

    이렇게 미스터리한 일제 강점기 한 장의 태형 사진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 태형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다. 사진을 통해 태형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면, 이제 실제 태형이 집행되던 현장으로 가보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던 오기영(吳基永, 1909~?)이 해방 후 쓴 회고록으로 [사슬이 풀린 뒤]라는 책이 있다.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 있는 오기영은 일제 강점기 여성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강주룡을 세상에 알린 인물이다. 1931년 7월 <동광>이라는 잡지에 실린 ‘을밀대 상의 체공녀: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가 바로 오기영이 쓴 것인데, 다만 필자는 ‘무호정인’(無號亭人)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이 회견기는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간 이유는 물론 그의 삶의 내력까지 소개하고 있다. 오기영은 해방 이후 고향인 북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기영은 자신의 회고록 [사슬이 풀린 뒤]에서 그가 열 한 살 때 고향 황해도 연백군 배천에서 겪었던 3·1운동과 함께 담장 너머 목격한 태형 실행 장면을 생생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럼 오기영의 안내에 따라 1919년 3·1운동 당시의 태형이 행해지는 황해도 연백군 배천의 헌병분견대 뒷마당으로 가보자.

    [사진]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 태형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 거의 유일한 사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대와 출처는 모두 불명이다. 상투 틀고 형틀에 묶인 수형인을 둘러싸서 서 있는 저들이 대한제국 당시 한국 군인인지 아니면 일제 강점기 일본 헌병경찰인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더 필요하다. ‘밀덕’들의 분발과 제보를 기대해본다. (인터넷 사진)

    온 동리의 가택수색이 끝난 뒤에 죄가 가볍다고 보는 사람은 우선 볼기를 쳐서 내보내기 시작하였다. 경(輕)하다는 벌이 볼기 구십도(九十度)는 맞는 것이다. 하루 삼십 도씩 사흘 맞는 법이다. 볼기 치기가 시작되자 그 숱한 사람을 여기 있는 보조원만으로는 너무 팔이 아프고 힘드는 노릇이어서 연안에서 응원 보조원이 열다섯 명이나 왔다. 볼기채는 분견대 뒷마당에 있었다. 오늘은 누구누구가 맞는 차례라 하여 사흘째 맞는 이들의 가족은 업고 갈 사람을 데리고 분견대 문밖에서 기다렸다.

    “아무개 업어 가라”고 볼기 치기가 끝날 때마다 보조원이 문간을 내다보며 소리를 쳤다. 그러면 들어가서 업어 내왔다.

    “아이구 아이구우 우후-“

    업기는 하였으되 볼기짝에는 손을 댈 수가 없어서 아랫도리를 부축하는 사람 하나가 더 매달려서 걸머지다시피 하여 가지고 나왔다. 동리에서 엎디어 앓는 환자가 매일같이 늘어가고 염 주부와 최 주부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바빴다.

    볼기 치는 뒷마당 북쪽 담은 과히 높지 아니하였다. 나는 한 번 살랑살랑 그리로 돌아가서 담을 기어올라 볼기 치는 광경을 구경하였다. 十자로 틀을 짰는데 그 위에 사람을 엎어서 팔과 다리는 밧줄로 볼기채에 묶어놓고 볼기짝을 까놓았다. 보조원 두 사람은 벌써 여러 사람을친 모양이어서 모자는 쓴 채 저고리는 벗어놓고 상판이 시뻘겋게 상기가 되어가지고

    엇! 엇! 하며 번갈아 쳤다.

    “우후 우후”

    엎어져 맞는 이는 첫날이면 소리로 친다지만 대개 사흘째는 ‘우후’소리밖에 내지 못하였다. 어떤 이의 볼기짝은 시퍼렇게 멍이 들고 어떤이는 시뻘겋게 부풀어 터져가지고 흐물흐물하였다. 이런 볼기짝에서는 칠 때마다 철썩 소리와 함께 검붉은 피가 놀란 듯이 튀어나고 그것이 보조원의 상판때기에 튀어 묻기도 하였다. 그러면 보조원은 손등으로 얼굴을 쓱 문대고는 그담에는 다시 한 번 손바닥에 침을 뱉어 몽치를 가다듬어 쥐고서 내리쳤다.

    “아이구! 아이구.”

    “우후! 우후!”

    하루같이 이 소리는 이 마당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귀가 먹었나?” 하고 나는 생각해보았다.

    이렇게 허구헌날 숱한 사람의 아픈 소리도 못 듣는 하느님이면 소리도 안 내고 하는 묵상기도는 어떻게 듣는 건가 싶었다. 이 마당 한옆에 섰는 늙은 느티나무 위에서는 까마귀가 울었다, 까욱 까욱 –

    끔찍한 광경에 진저리치며 우는 것 같았다.

    위 태형 집행 과정을 통해 우리는 몇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주로 즉결처분을 통해 태형 이 실행되었다는 점, 태형이 헌병대(혹은 헌병분견대) 뒷 마당에서 실행되었다는 점, 헌병경찰이 직접 치기 보다는 헌병 보조원들이 태를 쳤다는 사실, 90대의 태를 사흘에 걸쳐 맞았다는 점, 태형을 당한 후에는 주로 업혀 나왔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경(輕)하다는 벌이 볼기 구십 도(九十度)는 맞는 것이다’는 회고는 좀 의아한 부분이다. 이 글의 맨 앞머리에서 살핀 충남 예산군 오가면의 경우 13명의 만세 시위 관련자 중 오로지 한 명만 90대 처벌을 받았고, 나머지 4명은 60대, 7명은 30대로 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앞에서 주동자급이 90대 처벌을 받았다고 설명한 부분과 배치된다. 이것이 지역적 편차 때문인지, 아니면 오기영의 잘못된 기억때문인지, 혹은 오가면 자료가 특수해서인지 좀 더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다. <계속>

    *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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