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南)으로부터 배우려는 자세
    [기고] 부모세대에 대한 ‘평생교육’이 필요한 이유
        2023년 03월 22일 07: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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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는 특히 ‘교육’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사회운동이 거리에서 시위하면서 어떤 부문의 변혁을 국가에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예를 들어, 장애인들이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승차 시위 등), 대부분의 경우 강의실에 모여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전문가를 불러서 강의를 듣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부의 경우, 실천 과제가 관념적, 추상적인 논의로 흐르거나 우파가 엉뚱하게 (사이비들이 허명을 내걸고 정부 지원의 아까운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하며) 일부 사회운동의 사례를 공격하기도 한다.

    이와 별도로 일상생활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등의 사례(길거리에서 가래침을 뱉거나, 길을 물어보아도 대답이 없고 새치기를 잘하는 등)를 보면 부모세대가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아마 그 이유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우리가 자주적, 전향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현실적으로 힘 있는 친일세력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유리하게 왜곡하거나 폭력적으로 억압한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 같다. 그리하여 현재의 기성세대의 부모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은 것 같다. 그들이 자녀들(현재의 부모세대)을 인간적으로,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오직 생존을 위해 ‘돈’ 또는 ‘성공’을 추구하도록 편견에 찬 길을 걷게 하거나 또는 자녀들을 무조건 무섭게 대하거나, 지나치게 주눅 들게 하는 것이 교육적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 내부의 여러 문제도 여기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다(이런 의미에서 텔레비전의 오은영 박사의 상담 프로가 매우 좋아 보인다).

    물론 그들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나이가 많이 들어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성찰을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이런 흐름이 현재의 부모세대에게도 이어지는 것 같다. 특히 1960년대부터 “조국 근대화”를 내건 정부에 의해 이런 현실적 성공 제일주의 철학은 광범하게 퍼져 나갔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어느 날 눈 떠보니 ‘선진국’이 되었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잘못된 가치관으로 인해 국가와 사회 자체가 소멸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심각한 위기에 대해 일부 지식인들이 현재의 여당, 정부에 의해 눈 떠보니 ‘후진국’이 되었다는 식으로, 진영 가르기 방식의 문제제기를 하는 건 잘못이라고 본다.

    각설하고 우리 사회의 변혁을 바라는 ‘좌파’와 ‘언론’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와 비슷하거나 같은 점이 많은 대만은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와 다른 생태계의 사회발전을 이룰 수 있었는지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렸으면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북유럽(독일,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등)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맞는 말이지만 우리와 사회, 문화적 맥락이 너무나 다르고 그들도 유럽은 유럽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최근 약 200년의 인류 역사는 서북 유럽이 주도했다. 오히려 우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가난한 ‘남’(라틴아메리카를 포함하여)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특히 ‘언론’은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그들이 잘 모르는 우리 사회에 있는 빈약한 복지제도에 대해 일년 내내 지속적으로 보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거의 매일같이 아주 비참하고 불행한 사례들이 알려지고 있는데 이런 일이 계속되면 사회가 완전히 붕괴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남’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1980년대 이후(우리의 경우는 2000년대 이후), 사회의 일부를 아예 ‘배제’하는 신자유주의 질서 안에서도. 이와 다른 흐름을 ‘남’이 가졌던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배제야말로 아주 무서운 것이고 이에 대해 198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저항한 사람들이 라틴아메리카의 대중이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비율이 아주 낮은 국가들이 우리를 제외하고 튀르키예, 칠레, 멕시코 등인데 이들은 북유럽 국가들이 아니다. 북유럽 국가들은 아예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 믿기지 않겠지만 멕시코의 대통령 오브라도르가 자국의 기득권계급과 ‘민주’를 얘기하는 미국의 주류언론을 위선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는 사례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도 많다(현재 유투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타락한(?) 선관위와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하는 오브라도르는 현재 국민들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다. 이때 ‘남’은 남반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북반구에도 ‘남’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예를 들어 EBS의 [국제 다큐 영화제] 등을 통해서도 잘 느낄 수 있다. 요즘의 젊은 MZ세대는 여행을 통해 일부러 이런 ‘남’(예를 들어,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유투브에 많이 있다)을 즐기는 것 같다.

    학문적 관점에서 이 지점이 중요한 이유는 포르투갈의 사회학자인 드 소우자 산투스가 지적하듯이, 현재의 유럽에서 만들어진 주류 사회과학이 인류 전체의 다양한 사회 경제적 위기에 맞는 이론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에서는 대중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운동을 통해 대안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지만 이런 실천을 기존의 유럽(미국 포함)에서 만든 이론들이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 예를 들어 현재의 전 지구적이고 복합적인 경제 침체와 인플레, 지정학의 위기를 기존의 경제학 이론이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존의 주류 이론의 허구를 비판하고 고치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지금 “저출생 문제” 등 국가 소멸, 사회 소멸을 생각할 정도로 막장에 다다른 우리 상황에서 ‘남’의 그들에게 배울 점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더군다나 그것 중에는 과거에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후지다고 또는 전근대적이라고 우리 스스로 버린 것들도 많다.

    부모세대에게 재교육을 하는 경우에, 그 내용은 당연히 민주주의를 다루어야 하고, 조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히 신중하게 그리고 강압적인 방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해야 할 것이다. 핵심은 모든 사람이 당당하게 자기권리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인식하도록 하는 거다. 오늘날 정부 여당이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것은 물론 잘못이지만,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우리 사회가(노골적으로 말하면 소위 진보라고 자부하는 민주운동권 세력이) 노동조합에도 들지 못하는 그 아래 노동자들을 여러 가지 형식으로 배제하고도 그 잘못을 오랫동안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굳이 사족을 더한다면, 운이 좋아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운이 나빠 여러모로 힘든 사람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약 10년 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마딴사’라고 하는 변두리 빈민동네에서 사회연대 운동을 하던 50대의 아주머니가 오른 팔뚝의 알통을 보이며 “우리는 자살하지 않는다”고 외쳤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필자소개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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