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대체 두분이 무슨 연대를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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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15일 08: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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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완의 아버지 앙리와 그의 집 사과나무 아래서
     

    어제(13일) 새벽, 칼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94세의 나이로, 기력이 쇠하셔서 수면 중에 세상을 놓으셨다.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어조로 눈물을 쏟아내던 희완은 급히 프랑스로 떠났다. 호상이라 할만한 완벽한 조건을 가진 죽음이었지만, 모든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격렬한 감정의 파도를 불러일으킨다.

    칼리가 알려준 할아버지의 죽음

    그의 죽음을 전해 듣기 전, 새벽에 칼리는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이답지 않은 깊은 울음을 토해냈다. 목이 쉬도록 “안돼, 싫어” 하고 외치던 아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파르르 몸을 떨다가 엄마 품에서 잠들었다. 처음 보는 칼리의 발작적인 울음에 우리는 아이가 악몽에 시달렸나 보다 생각했다. 몇 시간 뒤 전화를 통해, 비보를 접하고 나서 할아버지가 칼리 꿈에 들르셨던 게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식 표현대로라면 그는 분명 나의 시아버지다. 그러나 희완을 남편이라 불러본 적이 없듯이, 돌아가신 그분 또한 시아버지라는 관계 속에서 바라본 적은 없었다. 나의 엄마가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너도 가야지” 하고 말할 때 비로소 ‘아, 그가 나의 시아버지였구나’ 하는 자각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줄곧 할아버지라 불렀었다. 그의 손녀들이 그를 부르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희완과 그의 여동생은 희완이 며칠간 프랑스에 다녀와야 한다는 사실을 나와 칼리가 잘 받아들여주길 바라는 마음이었고, 내가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 간다는 것은 그들에겐 상상 밖의 일이었다.

    펄쩍 뛰며 꼭 내가 가야 한다고 주장하던 나의 엄마도, 칼리 고모와 칼리 아빠의 그러한 생각을 듣고는, 바로 “그럼 다행이네”라며 금방 입장을 바꾸셨다. 엄마의 초기 주장은 결국 소위 시댁식구들의 나에 대한 시선을 염려해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할아버지로 불렀던 그 분에 대해서 나는 진하진 않지만 선하고 푸근한 태도를 지녀왔다. 그분 또한 나에 대해서, 비슷한 감정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4년 전 부르고뉴에 있는 희완의 작업장에서, 나이 90에 아들을 보러 멀리 서해안 브르타뉴 지방에서 10시간 정도 차를 몰고 오신 그 어른을 처음 뵈었다.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보일 수 있는 의례적인 호기심도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 대한 생경함도 그는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지닌 인간에 대한 보편적 선의를 가지고 나를 대했다.

    앙리가 내게 취했던 지극히 심플한 태도는 늦은 나이에 아내도 자식도 없는 아들의 처음 보는 여자친구에게 취할 수 있는 아버지의 태도로서 내가 자란 사회에서 학습해온 그것과는 판이한 것이어서 그 자체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떠나 이렇게 순수하게 만날 수도 있다는 걸 일깨워준 것만으로 감사한 만남이었다.

    교사였던 그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징병되어, 독일 포로수용소에 7년간 수감되어 있었다. 그 때의 기억은 그의 나머지 인생을 지배하여, 누구든 말 상대만 있으면,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 한다.

    내게도 역시 그 때의 경험을 풀어놓았는데 그가 전쟁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희완이 개입하여 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전쟁 얘기 ‘고문’에서 헤어나지 못해서”라고는 했지만, 거의 반사적이고 다소 폭력적인 개입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들의 무례한 말 끊기에 앙리는 전혀 동요의 빛도 보이지도 않고 자신의 질서 속으로 천천히 회귀하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희완 여동생은 아버지의 전쟁 얘기를 너무 반복해서 들은 나머지 그것이 심각한 신체적 부작용을 일으켰고, 심리치료를 통해 그 원인이 아버지의 전쟁 얘기라는 걸 알아내고 치유되었다. 앙리는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전쟁이야기를 전했지만 그러는 사이 주변인들은 그가 지녔던 고통을 조금씩 나눠가져야 했다.

    전쟁은 종료 후에도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인류에게 독을 꾸준히 전파하고 있었다. 1년 전,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앙리는 더 이상 주변을 괴롭히지 않기 위해 점점 더 깊은 침묵으로 빠져들면서, 전쟁의 기록을 글로 적어내고 있었다. 글은 초기 1년째의 기록만을 간신히 채운 채 중단되었다.

       
      ▲ 희완의 아버지 앙리와 생후1개월된 칼리의 첫만남
     

    너의 인생은 너의 것

    희완 아버지가 나를 그토록 쿨하게 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사회가 가진 결혼에 대한 판이한 가치관이 1차적으로 작용을 했음은 물론이다. 인생의 한 때를 같이한 여자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아이도 아내도 없는 독신을 유지해 온 희완에게 가족 중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은 우리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동네에선 지극히 당연했다.

    오히려 최근 희완의 조카가 올 여름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을 때 우리는 매우 낯설어 했다. 희완은 “참 이상한 생각이네”하면서 웃었다. ‘가엘’이 ‘결혼’을? 매우 섬세하고 자의식 강하며, 비타협적인 정치적 태도 때문에 친구를 갖는 것조차 쉽지 않은 그녀를 아는 우리로서는 ‘결혼’을 하라고 누군가 강요하면 결사항전 할 것 같은 그녀를 떠올리는 일이 더 쉬웠던 것이다.

    가엘이 2년 전부터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살고 있었고, 아이도 원하는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선택이라는 생각엔 변함 없었다. 물론 우리는 그녀의 선택을 당연히 존중하였고 축하인사를 전했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프랑스 사회에는 결혼을 하는 사람에 대한 가벼운 역차별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체제 순응적이라는 혐의를 갖게 하는.

    한국사회에서 결혼이라는 공간을 겹겹이 둘러싼 모든 허물. 간신히 그 때까지 모르고 살 수 있었다가도, 결혼을 둘러싼 단 몇 년간의 시기 속에 완전히 온몸으로 체득하고 뼈저리게 부딪히며, 저항할 수 없이 미끄러져 들어가 투항하게 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기제들. 그 몇 가지 단면을 설명해주면 희완은 40~50년대 프랑스도 비슷했다고 대답한다.

    그럼, 그 모든 것이 완전히 절연된 시기는? ‘68’이다. 오늘의 프랑스 사회에 남아있는 멋진 구석의 대부분의 시발점인 ‘68’은 드골주의로 대표되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사회분위기를 전복하고, 10년간에 걸쳐 건강한 개인주의, 엄숙주의에서 벗어난 다원적 정치의제들-페미니즘, 성소수자운동, 환경운동 등-을 사회전체에 뿌리내리게 했다.

    그중에서도 남의 일을 간섭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기준과 가치로 살아가는 서로 인정하는 개인주의는 68의 가장 큰 사회적 유산이다. 때로는 개인주의의 도가 지나쳐서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진 ‘이심전심’의 코드가 퇴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명확히 설명하고 요구하지 않으면, 자신의 의도가 상식적으로 알아서 파악되는 걸 기대하기 힘든 답답한 구석은 있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 사회가 철저히 체화하고 있는 개인주의는 단기간에 학습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완벽하게 전 세대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 개인주의가 신자유주의와 만날 때, 매우 요상한 방향으로 그 형질이 전이되면서, 점점 참기 힘든 사회로 프랑스를 변모시키는 슬픈 현실을 묵과할 수는 없지만.

    개인주의가 가진 미덕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사회를 세련된 시민사회로 성숙시켜 왔으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제도화하여 사람들이 획일화의 틀에 갇히지 않고, 각자가 선택한 방식 속에서 인권과 사회보장의 혜택을 평등하게 누리게 한 정치제도의 역할도 눈부신 것이었다.

    저출산의 일반적 경향을 홀로 탈출, 출산대국으로 부각되고 있는 프랑스의 성공의 배경에는 완벽하게 출산과 육아를 사회적 과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이전에, 다원적인 가족의 형태를 제도 안에서 포섭해내려는 노력이 주요했다고 본다.

    통계적으로 프랑스에서 결혼 밖과 안에서 태어난 아이의 비율은 50:50이며, 이들에 대한 제도적, 인습적 차별은 0이다.

    시민연대계약

    늘어나는 동성커플의 관계를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해 99년에 만들어진 제도인 시민연대계약(PACS: 빡스)도 제도가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솎아내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변해가는 삶의 패턴에 제도가 유연하게 따라가는 것의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빡스는 동성커플만을 위한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제3의 선택이 되었고, 실제로 빡스를 하는 더 많은 사람이 이성커플이며, 그것은 나와 희완의 선택이기도 했다.

    빡스를 굳이 했던 것은 출산을 위해 다시 파리에 온 내가 체류증을 얻는데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 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결혼은 하고 싶지 않고, 혹여라도 체류증을 받지 못하는 일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방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굳이 PACS를 하지 않았어도 프랑스 국적을 가진 아이-칼리는 두 나라 국적을 모두 가지고 있다-의 엄마라는 사실만으로도 체류증(1년이 지나면 영주권으로 전환) 발급은 쉽게 이뤄진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빡스는 결혼과 달리 주례(구청장)도, 증인도 필요 없는, 단 두 사람만의 합의에 기초하는 계약이며, 파기할 때도, 합의가 굳이 필요하거나, 합의가 안 되면 재판을 해야하는 절차의 괴로움 없이 일방의 통보로 가능하다.

    결합할 때는 두 마음이 합쳐져야 하지만, 헤어지는 건 실제로 한 마음만 떠나도 성립된다는 현실을 잘 반영하는 제도다. 물론 결혼이 부여하는 제도적 혜택, 세금감면에서부터 국적취득까지 모두 가감 없이 동등하게 주어졌다.

    그리고 서로의 계약 내용은 완전히 열려있어, 서로 정하기 나름이다. 빡스 증서를 받으러 가던 날 혹시나 하고 정장을 차려입고 나섰던 나는, 담당자가 내주는 서류를 그냥 받아서 나오는 것으로 끝나는 싱거운 세리모니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3주 전쯤 태어난 칼리가 아빠 품에서 자고 있었고 이른 아침이었지만, 샴페인 잔을 테라스에 앉아 부딪히며 우리의 빡스를 자축했다.

    ‘혼인’이란 두 글자

    결혼을 안 한 죄로, 관광비자 밖에 얻지 못한 희완이 3개월마다 해외여행을 하는 호사를 중단하기 위해 한국 쪽 제도를 알아본 결과, 한국국적을 가진 아이의 아빠라는 이유로 좀 더 긴 체류를 보장받는 비자를 발급해주는 건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뚱딴지같은 발상으로 취급됐다.

    혹시나 하고 제시해 보았던 시민연대계약서를 찬찬히 훑어보던 구청직원은 “도대체 무슨 연대를 두 분이 하셨다는 건지 모르겠다. ‘혼인’이란 두 글자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매우 친절했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를 좌절시켰다.

    혹 우리가 혼인신고를 했다 하더라도, 1년짜리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재산증명과 재직증명서를 출입국관리소에 내야하고, 실제로 어디에 살림을 차려서 살고 있는지에 대한 실사가 이어진다는 설명에, 가난한 사람은 국제결혼도 맘대로 못하게 하는 이 반인권적 제도에 굴복하느니 없는 돈을 창밖으로 뿌리는 걸 선택하는 것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Happy & Golden

    본의 아니게 세 번째 중국여행을 하고 돌아온 희완은 중국에서 가장 자주 보는 영어단어는 Golden, 한국에서는 Happy라고 증언한다.

    행복은 물론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쟁취되고 학습되며, 전이되는 것이다. 어린아이 속옷에, 팬시용품에 값싸게 수놓아진 장식으로서의 Happy가 지천인 이 사회.

    그러나 설명 안 되는 ‘원래 그런 것들’ 납득 안 되는 그들만의 편협한 ‘정상의 테두리’가 도전받지 않고 활개치는 동안, 이 사회에서의 행복은 버석거리는 포장지 위에서만 존재하는 공허한 사기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황금으로 만든 것이라 믿고 싶어하는 중국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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