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발 끼하노와 김능환
    [기고]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 인식
        2023년 03월 08일 02: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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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후자에 대해서는 알지 모르지만 전자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이다. 위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언급하고 싶은 책이 있다. 브라질의 지식인인 에미르 사데르의 <역사의 복수>다.

    최근 우리나라 정부의 대일본 정책이 나왔다. 정책 최고위층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물론 이 책은 우리(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브라질의 역사에 대한 좌파적 관점을 드러낸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잘못 처리되어 온 역사는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 청구서를 내밀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 사람들이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다.

    이들은 1990년 에콰도르에서 피를 흘려가면서 정부(국가)에 대해 당당하게 그들의 오래 참아온 요구를 내밀었다. 그들의 생생한 모습이 우리나라에서 EBS가 직접 현지에 가서 만든 다큐멘터리(안데스 6부작)에 나온다. 이들은 가난하고 평범한 대중이다.

    그리고 2년 뒤인 1992년에 페루의 사회학자로 엘리트 지식인인 아니발 끼하노가 “식민성과 근대성-합리성”(이글은 현재 [오르비스 테르티우스](그린비)라는 책의 앞부분에 실려 있다)을 발표했다. 이 글이 현재까지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전 세계 특히 유럽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우리에게는 극소수 빼고 별로이지만, 바로 <탈식민성> 담론의 시작이다. 끼하노는 몇 년 전 2018년에 작고했다 전혀 유명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미셀 푸코는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페루 출신 사회학자 아니발 키하노.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500년 이상 차별받고 억압받아온 원주민들이 너무나 억울하지만 해결 가능성이 전무하여 뼛속 깊이 서러운 ‘한’으로 남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고 희망에 벅찬 이유가 뭘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근대성과 자본주의에 포획되지 않는 고유의 철학, 삶의 방식 즉 독특한 문화를 간직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현실에 대해 착각했다.

    원주민의 저항과 투쟁에 대한 일부 영화를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부자나 중산층(?)의 자녀들이 주로 좋아하는 바이올린(비록 후진 느낌이 확 들지만)을 즐겨 켜고 또 하나는 원주민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하는 말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미래에 우리는 분명히 이길 것이다”라고. 참으로 독특한 점이다. 근대성의 상식과 거리가 먼 그들 고유의 상식을 묵묵히 그리고 조용히 지켜내고 있다. 예를 들어, 죽은 사람과 직접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과 소통할 방법이 있다는 믿음 등. 우리도 죽은 사람과의 소통을 중시하지만 그 형식이 주류적 근대성의 가치관(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다.

    최근에 주류 언론과 유투브 등 미디어에서 ‘성장’을 비판하는 글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도 성장(GDP)만이 아니라 분배도 신경 쓰자고 주장하는데 이런 이분법은 잘못되었다. 성장이 바로 근대성의 핵심 주장임을 드러내고 비판해야 한다. 근대성에 저항하는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은 펜으로 그리고 대중은 자신들의 ‘피’로 증명하였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근대성에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가 들어있다. 하나는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성(위계서열적 차별성, 폭력성 예를 들어, 선진국, 후진국 등)이다. 유럽인들(미국인들을 포함하여)은 앞의 것만을 강조하고 뒤의 것은 마치 없는 것처럼 은폐한다고 끼하노가 지적했다. 식민성을 비판하는 라틴아메리카인들도 ‘이성’은 계속해서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 정부 고위층은 근대성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현실적 힘의 위계서열을 중시하여 미, 일과 밀착해야 한다고 한다. 일견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너무 전도된 논리이다. 그들은 경제 논리와 역사의 논리를 혼동, 착각하고 있다. 아니 그동안의 경제 논리조차도 지금 이 순간 지정학적으로 매우 빠르게 흔들리고 있음을 외면한다. 일본과 미국이 중국과 적대하면서도 중국을 무시하지 않듯이 우리도 어서 빨리 국력을 키워서 세계체제에서 대접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오야붕-꼬붕의 서열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식민성의 방식으로 그 체제에 편입되면 나중에 많은 시간이 흘러도 서열에서 올라가지 못하고 문제는 더욱 꼬이고 심각해진다.

    무조건 현재의 힘의 위계서열의 강자에게 대들고 도전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전략적으로 신중하고 지혜로운 방안이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런 전도된 시각에서 최근 어느 고위층이 김능환 전 대법관을 “무식한 탓에 용감했던”(경향신문, 2023.3.7.)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잘못된 비판이다. 그는 보수적 성향의 사람이다. 그는 대법관으로서 2012년 5월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징용에 관한 대법원 판결의 주심이었다. 그는 1965년 한일 협정과 상관없이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은 살아있다고 판결하였고 최근 윤석열 정부는 이를 정면으로 깔아뭉갰다. 그리고 위의 고위층은 어느 나라가 식민지였다가 우리처럼 악을 쓰냐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2023. 3.8일자 한겨레의 길윤형 기자의 칼럼을 일독하라고 권하고 싶다.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복수’할 것이다. 그것을 라틴아메리카가 유럽에게 보여주고 있다.

    필자소개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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