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없이 서글픈 관계
    [엽편소설] 관계라는 허상에의 집착
        2023년 03월 06일 03: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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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더스는 그가 무엇을 이루기 전에 총살 당할 거야.”

    남자가 여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트럼프가 꿈꾸는 미국에 대해 남자는 40분째 허드슨 강변을 걸으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반대편에 같은 패턴의 옷을 입은 젊은 커플이 여자의 옆을 지나쳐갔다. 할아버지는 지팡이 한쪽에 몸을 기댄 채 강바닥에 무엇을 찾듯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의 부인인 할머니가 먼저 걷다가 걸음을 멈춰 세우고 강바닥을 들여다보는 남편을 불러 세웠다.

    여자는 빠른 속도로 걷다가 벽에 새겨진 무늬를 가리키며 어때 보이냐고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의 말을 끊기 위해서였다. 남자가 여자와 보폭을 맞추기 위해 약간 빠른 걸음으로 여자를 쫓았다. 여자는 갑자기 날씨로 화제를 돌렸다. 남자는 아랑곳 없이 백인 일자리 위기에 대해 설파했다. 여자는 턱 끝까지 참았던 말을 뱉어버렸다.

    “오늘 데이트 시작부터 끝까지 그쪽이 백인 인종주의자라는 것을 저에게 각인시켜주고 있는 거 아세요?”

    남자는 ‘인종주의자’라는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일단 천천히 걷자고요. 허드슨 강 풍경이 이 시간 때 특히 좋아요. 오늘은 휴일이고 데이트 중이잖아요. 그런데 한나 당신은 지금 나로부터 도망치고 있어요.”

    여자는 그 말에 잠시 남자와 보폭을 맞췄다. 여자는 오늘 3천 평 규모의 수상공원을 산책할 줄 몰랐다. 여자는 자신이 신고 온 7센티 힐을 내려다보았다. 발가락이 앞쪽으로 잔뜩 쏠려 피가 몰려있었다. 여자는 상의를 타이트하게 옥죄고 하의는 화려하게 퍼지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강바람에 치맛자락이 허벅지 사이로 자꾸 달라붙었다. 여자는 자주 민망한 곳에 들러붙는 스커트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애썼다. 언뜻 보니 남자의 신발은 운동화였다.

    “강을 내려다보면 잉어도 있어요. 분명 위쪽 팻말에 잉어 밥을 주지 말라고 써 있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먹던 샌드위치를 던져주기도 해요. 제가 자란 곳은 중부공업지대예요. 주변에 강이라면 오수를 버리거나 오줌을 휘갈기는 장소였어요. 수상공원 데이트 이런 건 상상도 못 해요.”

    여자는 무심코 강 쪽으로 눈을 돌렸다. 첫 만남에서 남자는 러스트벨트 출신이라고 했다. 러스트벨트는 정치혐오로 가득했던 곳이었다. 미국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시골의 석탄산업 노동자들이 몰락의 길을 가고 있다는 신문을 종종 본 적 있다. 여자는 시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남자가 그곳 출신이라고 했을 때 대화를 조심해야 한다고 여겼다. 반면에 남자는 거침없이 말하고, 천진하게 웃었다. 여자는 점점 남자가 떠드는 말에 면역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조금만 더 걷다가 저 위쪽 벤치에 앉아요. 연인들은 무조건 위쪽 벤치에 앉곤 해요.”

    여자는 잠시라도 앉아 신발을 벗고 싶었다. 200미터 정도 걷는 동안, 남자는 튤립 콘크리트를 발견하면 여자에게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자와 여자는 얕은 동산을 하나 넘은 뒤, 보이는 벤치에 동시에 앉았다. 여자는 힐을 살짝 벗어 발가락을 옥죄고 있던 신발로부터 해방됐다. 남자는 광활하게 펼쳐진 강변을 잠시 보다가 몇 시 인지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였다. 여자는 흐르는 강물을 보다 무심코 말했다.

    “이 강물들이 흘러 어디로 가는 걸까요. 맨하튼을 다 감싸서 어디까지 갈까요?”

    “자유의 여신상 쪽으로 흐르겠죠. 허드슨 강의 기적, 그런 사건도 있잖아요. 그런데 어쩌다 이 드넓은 강이 이민자들이 국경을 넘는 수로가 돼 버렸어요. 허름한 배를 탄 이민자들은 아마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아 드디어 내가 기생할 미국 땅이구나 했겠죠. 끝도 없이 피곤하고 양심 없는 인간들이예요”

    여자는 이제 남자의 입에서 악취가 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힐에 발을 구겨 넣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그러자고 했다. 200미터쯤 또 말없이 걷다가 산책로에서 나갈 수 있는 계단을 발견했고 둘은 약속이나 한 듯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남자가 주차장에서 차를 가져오겠다며 여자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두 번째 만남이었다.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못한 여자였다. 여자는 연애가 성사되지 않을 때마다 자괴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 남자는 행동만큼은 적극적이었고 매너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여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대한 터였다. 하지만 함께 있은 지 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여자는 남자가 무분별하게 뱉는 말에 눌려 녹초가 되었다. 차를 가지러 간다던 남자는 다시 맨몸으로 여자에게 달려왔다. 남자는 숨을 바닥에 뱉으며 몸을 숙이고 말했다.

    “한나,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가기 아쉽지 않아요?”

    여자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미안해요, 좀 지쳤어요.”

    “저 배고파요. 한나 당신도 배고플 것 같은데, 배고파서 지친 거예요. 우리 일단 따뜻한 단호박 스프로 배부터 채워보고 생각해요“

    여자는 사실상 허기졌다. 여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금세 표정이 환해졌다.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식당이 있다며 여자의 손목을 무심코 잡았다. 잠깐이었지만 남자의 손이 참 따뜻하다고 느꼈다.

    캐주얼한 분위기에 조도는 낮고 테이블 위에 양초 불을 밝혀 놓은 아담한 식당이었다. 여자와 남자가 들어오자 일어나는 남녀가 있었고, 여자 쪽에서 꽃다발은 한쪽에 품은 채 꽤 만족한 식사를 마친 듯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남자는 메뉴판을 여자에게 슬쩍 보여주다 말고, 가엾고 배고픈 남녀가 먹기 좋은 메뉴를 자신이 알고 있다고 했다. 여자는 가엾고 배고픈 남녀라는 표현에 잠시 웃기도 했다.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놓이자 남자는 여자가 먹기 좋은 적당한 크기로 자르기 시작했다. 여자의 발가락 통증도 차츰 풀리는 것 같았다. 남자와 여자는 따뜻한 단호박 스프 냄새에 잠시 감탄하기도 했다. 여자는 남자와 음식 취향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배가 따뜻해지자 여자는 긴장이 풀렸고,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와 마주앉아 식사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근방에 유명한 와인 전문 바가 있다고 했다. 괜찮다면 다음에 와인을 먹고 야경을 보자고 했다. 여자는 허기가 가시자 기분이 풀렸고, 다음에는 이렇게 많이 걷는 데이트라면 미리 알려줄 것을 부탁했다. 남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여자와 남자는 우디 앨런 영화에 대해 잠시 대화를 나눴고, 생각보다 이야기가 통했다. 여자는 이 남자에게서 샌더스나 트럼프 이야기만 꺼내지 않는다면 꽤 괜찮은 남자일지 모른다고 느꼈다. 남자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여자는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슈미츠라는 애였는데 단짝이었어요. 저는 그 이름이 희한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느 날 선생이 잘못 읽어서 슈비츠라고 했고, 우리는 아우슈비츠라고 놀려댔어요. 그럴 때면 그 애는 일어서서 히틀러 흉내를 내곤 했죠. 그 애랑 이름이 비슷했던 역사 선생이 있었는데 홀리츠였어요. 마치 홀로코스터와 아우슈비츠를 섞어놓은 이름 같지 않아요? 그 선생은 수업을 마칠 때마다 특이한 인사법을 썼는데, 그가 아메리카 퍼스트하고 선창을 하면 우리가 미국을 위대하게! 라고 답하며 수업을 끝냈어요. 그 말은 곧 유행어처럼 떠돌았죠.”

    괜찮게 흐르던 식사 자리가 갑자기 원활하지 않은 공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여자는 목이 타들어 갔다. 탄산수를 달라고 했고, 남자가 여자와 자신의 잔에 탄산수를 따른 뒤, 짧게 여자의 잔을 부딪치며 “미국을 위대하게”라고 말했다. 여자는 탄산수를 한 번에 들이킨 뒤, 더 이상 안되겠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버니 샌더스 재단에 10년간 후원을 해왔어요. 그리고 트럼프가 당선된 날 자살 충동을 느꼈죠. 트럼프가 종종 1930년대만큼 신날 것이라고 외친 말은 미국이 파시즘에 가장 동조했던 시기를 말하는 거였어요. 극우 파시즘 이런 것들이 역겨워요. 아니 그런 것들이 인류를 망하게 할 거예요. 나는 아까도 당신이 이민자들을 피곤하고 성가신 존재라고 말했는데 불쾌했어요. 저는 생각이 달라요, 윌리엄 당신은 인종주의자가 맞군요.”

    남자는 스푼을 놓고 몸을 쭉 빼 여자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한나, 내 말 좀 들어봐요. 한나와 나는 남일 수 없어요. 일단 백인이고 ‘우리’예요. 우린 근면하게 노력하고 능력으로 여기까지 왔죠. 그런데 이민자들은요? 그들은 천성적으로 게을러요.

    우리가 베푼, 아니 우리의 복지제도의 관대함에 편승해 우리의 돈으로 생존하고 있어요. 우리가 근면하게 일해 번 세금을 뜯어가고 있어요. 자 보세요, 우리는 그들에게 결국 포위 당할 거예요. 그들은 유럽까지 퍼져서 일자리를 빼앗고 우리의 세금을 갉아먹고 국경 안팎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요.”

    여자는 이 남자가 쓰고 있는 ‘우리’라는 말이 몹시 불편했다.

    “윌리엄 지금부터 제가 당신의 별명을 지어드리죠. 당신은 파쇼예요. 아니 파쇼에 조종당하는 아이히만 당신은 또 다른 미국 극우세력의 아이히만이예요.”

    “그렇군요. 인종주의자에 아이히만까지, 그 여자 누구야 그래 당신과 이름 비슷한 그 여자가 악의 평범성? 그딴 소리를 운운했죠. 저는 지금 미국에 아주 평범한 축에 속한다고 당신이 말해주었네요. 대단히 고맙군요. 샌더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 미국 인구의 몇 프로나 될 것 같아요? 도대체 누가 특이한 거죠? 한나? 당신이 그 소수의 사회주의자라고 나에게 각인시키고 싶은 건가요?”

    여자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그런 한나를 올려다보았다.

    “진정해요. 한나 여기서 나가버리는 거 정말 비겁해요. 화장실을 다녀와요. 다녀와서 천천히 다시 이야길 해봐요.”

    “이젠 화장실 가는 것까지 당신의 지시를 따르라는 건가요? 지금 당신과 있는 이곳이 홀로코스터 같군요.”

    하지만 여자는 정말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이대로 나가버리면 화장실이 어딘지 찾기 어려울 것이고, 그 긴 산책로를 따라 나가야 택시라도 탈 수 있었다. 여자는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남자는 머리를 감쌌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오늘의 데이트가 망가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여자에게 인종주의자 아이히만이란 소리까지 듣게 된 지금의 자신이 무얼 느껴야 하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 혼자 있고 싶지 않다. 다음 주말이 오면 또 쓸쓸하게 텔레비전이나 보며 하루를 겨우 보내고 싶지 않다. 남자는 대화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몰랐다. 여자가 돌아오면 화제를 바꾸고 집에 잘 데려다주는 것으로 우선 이 하루를 마무리해야 했다. 남자는 아마 며칠 안 가 이 여자가 또 보고 싶을 것이란 것만은 분명했다.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에 남자는 계산을 마치고 외투를 입었다.

    “한나, 제발 내가 당신을 집에만 데려다줄 수 있게 해줘요.”

    여자는 기운이 다 빠져 이제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힐을 벗고 맨발로 그 길을 걸어 나갈 수도 있었다.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입었던 원피스 안쪽 단추를 다 끌러놓은 채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먹느라 지워진 화장도 고치지 않고 식당 밖을 나섰다. 남자는 여자의 두 팔을 부여잡고, 자신이 차를 가지러 올 때까지만 여기서 기다려달라고 애원했다. 곧 남자가 차 문을 열어주었고 여자는 쓰러질 듯 조수석에 기댔다. 여자는 숨이 막혀 창문을 열었다.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어스름지는 노을이 차장 밖으로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잠시 넋을 잃고 밖을 응시했다.

    남자는 여자를 살피며 운전대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남자는 자신과 최대한 떨어져 반대편 쪽으로 힘겹게 기대앉은 여자가 안쓰러워 보였다. 남자는 침묵을 깨고 싶어 라디오를 눌렀다. 그때 하필 오래된 영화 러브 어페어 ost가 흘러나왔다. 지나치게 로맨틱한 음악이었다. 남자는 침묵하는 여자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며 보았다. 여자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없었다. 남자는 오늘이 이 여자와 혹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애틋함이 밀려왔다.

    여자는 노을이 아름답게 내려앉고 있는 강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오늘 했던 만들을 떠올렸다. 파쇼, 인종주의자, 홀로코스터 이런 말을 듣고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은 남자였다. 끝까지 자신을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싶어하는 남자가 한편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러자 여자는 몹시 외로워졌다. 불을 끄고 잠을 청하려 들면 누군가와 말이 하고 싶어졌던 여자였다. 아무말이든 막 떠들어도, 있는 그대로 그 말을 다 들어줄 누군가 있길 바랐다. 여자는 심신이 지쳤고 외로웠다. 외로움은 익숙해지는 감정이 아니었다. 여자는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무엇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남자와 자신 사이에 흐르는 정적에 귀를 귀울이며 생각에 잠길수록 차오르는 무언가가 여자의 눈시울을 계속 뜨겁게 만들었다. 여자는 울음을 삼키다 말고 새어 나온 자기 흐느낌에 놀라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여자의 울음소리에 놀란 남자는 가만히 한쪽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남자는 여자가 울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지, 그 어깨를 감싸줘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독한 말을 내뱉었을 뿐, 한없이 연약한 여자가 아닐까 그런 막연한 생각이 밀려왔다.

    “한나, 오늘은 그냥 제가 다 잘못했어요.”

    남자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한나를 잃고 싶지 않아요.”

    여자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고 나가 서서 울었다. 남자는 어깨를 들썩이는 여자를 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남자는 조심스레 여자를 안았다. 여자는 남자의 품에서 무너져 내릴 듯 울기 시작했다. 노을 지는 강변에 부드러운 서풍이 여자와 남자를 감쌌다. 그것은 정말이지, 헤어진 연인의 재회 같은 장면이었다.

    남자는 여자를 집 앞에 내려놓고 여자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여자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여자는 위축된 뒷모습으로 집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는 한참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서 있었다. 남자는 시동도 안 켠 채로 그렇게 멍하니 운전대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다시 만날 수 있냐고 물어야 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 전화벨이 울렸다. 여자였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여자의 목소리가 꽉 잠겨있었다. 여자가 무언가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남자는 먼저 말문을 터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나 할 말이 있으면 해도 돼요. 무엇이든 내가 들을게요.”

    여자는 잠시 한숨을 쉬더니 나지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서부 실리콘밸리에서 살았었다고 했죠. 저는 동성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예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맙소사 한나, 그게 무엇이 문제죠? 서로 다름을 존중하면 돼요. 누가 뭐래도 우린 우리에요.”

    “도대체 어떤 존중을 말하는 거죠?”

    소곤대던 여자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여자는 침착하게 물었다.

    “윌리엄, 정녕 당신은 이 관계가 이어지길 바라나요?”

    남자는 가던 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에 차 말했다.

    “한나에겐 내가 필요해요. 한나의 그릇된 생각을 교정해주고 한나를 바른길로 인도해줄 내가 정말 필요할 거예요. 오, 한나, 우리는 혈통이 같아요.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인간들은 우리랑 달라요. 내가 종일 말했잖아요. 그 변덕스럽기 짝이 없고, 부유하는 삶, 언제나 상처받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처럼 굴면서 우리에게 기생하는 이민자들이요. 그런 이들과 우리는 절대 우리가 될 수 없어요.”

    여자는 남자가 이야기하는 도중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끊긴 전화기에 다 대고 소리쳤다.

    “파쇼는 당신이야. 자신과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일방적으로 나를 차단하고 있잖아. 그래도 우린 우리고 우린 어쩔 수 없이 명백한 백인이야.”

    남자는 여자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지만 여자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한나, 나는 그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이야.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면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어, 관계란 그게 다야. 관계가 이어진다는 게 중요한 거야. 한나 어쨌거나 나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당신도 곧 괜찮아질 거야, 한나, 내 전화를 받아요. 우린 관계를 이어가야 해.

    * <엽편소설> 연재 링크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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